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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호 교육칼럼] 영화 ‘기생충’과 교육

우리는 일전에 교육과 관련지어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흥미롭게 시청한 적이 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도를 넘는 교육경쟁이 가족과 사회를 얼마나 일그러뜨리는가를 생생하게 보았다. 그런데 이 교육경쟁은 자본주의적 경쟁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최근 한국영화 ‘기생충’이 개봉 10일 만에 관객 700만명을 돌파할 전망이라고 한다. 손익분기점 370만명은 개봉 1주일도 채 안 되어 쉽게 넘어섰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자본주의 경쟁의 결과인 빈부차와 양극화를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교육경쟁과 맞닿는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현실로 가져온 듯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마치 청진기를 든 의사처럼 자본주의 사회의 건강 상태를 진찰하고 그 심각성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듯하다. 경쟁이 치열하면 경쟁을 피하려는 경향도 강해진다. 그래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안전한 수입과 노후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공무원과 공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줄은 선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초 과학기술은 물론 인문학적 소양 나아가 국가경쟁력이 약화하고 있다. 이 경쟁의 장은 복지의 안전망이 취약한 자본주의다.

영화는 빈부 차이를 방치한 자본주의의 종말을 미리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상황에서는 부자는 빈자들에 대해 ‘갑질’이 일상화되고, 빈자들은 부자들에 대해 선망과 동시에 증오라는 상반된 정서에 놓인다. 태어나고 죽을 때 모두 평등하게 빈손인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가진 것이 없는가를 의심, 체념하다 잠복해 있던 적개심이 절제의 고삐가 풀릴 때는 범죄로 이어지기 쉽다. 영화 속 송강호(기택 역)가 집주인을 살해하는 것이 우연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 ‘기생충’
영화 ‘기생충’ⓒ제공=CJ엔터테인먼트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의 잉여가치는 본래 상당 부분이 노동자의 몫이다. 이것이 노동자한테 환원되지 않는 것은 자본가의 탐욕 이외에 자본이 권력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는 규정상 상호 계약관계이지 예속관계가 아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기업주 즉 자본가는 골리앗으로 노동자는 다윗처럼 여겨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와 자본가의 속성을 알리기 위해 ‘자본론’에서 하나의 예를 든다. 요지는 노동자들이 일제히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 자본가는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을 만큼 취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에서 한 기업주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방적공장을 짓고 토지임차금 없이 그리고 저임금으로 큰 수익을 내려고 했었다. 이때 노동자 계급의 성인 남녀와 아동들 3천명을 데리고 호주로 함께 갔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대거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토지임대료가 없는 주변의 땅에서 스스로 농사짓는 등 생산활동을 하며 자유로이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본가에게 종속되어 착취되는 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결국 공장은 문을 닫았다. 일단 노동자는 다수이며 기술을 갖고 있다. 반면에 자본가는 돈은 있으나 수적으로 적고 특정 기술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국의 재벌기업이 택배까지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자본이 사회를 식민화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제어되지 않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통제되지 않는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사회를 암울하게 만든다. 미국의 노학자 노엄 촘스키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한마디로 ‘국민 즉 노동자(약자)의 희생을 대가로 이익을 편취하는 것(profit over people)’으로 규정하고 있다. 재화의 분배가 왜곡되면 가지지 않는 자들의 분노는 원한으로 바뀔 수 있다.

자본주의 병폐에 대응하는 우리 교육은?

이제 봉준호 감독이 던져 준 자본주의적 양극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우리 교육은 지금 훌륭한 자본가와 노동자들을 배출하고 있는가?” 우선 학교에서 노동교육이 없었다. 지금도 노동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독재정권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는 복지를 희생한 성장이 불완전한 것과 맥락을 함께 한다. 민주정부, 촛불정부라는 현 정권에서도 노동권 보장이 제대로 안된 상황이니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일본만 해도 이미 초등학교 때 노동법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다행히 요즘 서울 및 충북교육청 그리고 광명시 등에서 학교 노동교육을, 성남시에서 직원 대상 노동교육을 실시하면서 점차 확산추세를 보인다.그러나 아직 전면적이지 않다. 심지어 문재인 정부의 노동 및 교육이 낙제점이라는 조사 결과가 있을 정도다(관련 기사:2019.4.28일자 서울신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연구소, 노동인권교육 실태 및 조합원 의식조사 보고서 , 2015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연구소, 노동인권교육 실태 및 조합원 의식조사 보고서 , 2015ⓒ민중의소리

노동법은 산업혁명의 고장 영국의 노동환경에서 문제의식이 싹트고 만들어진 것으로서, 질서 있고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고용주와 노조의 관계를 정립하는 가이드라인이다. 즉 노조의 파업권 및 기업주의 직장폐쇄의 가능 범위를 비롯하여 노동조건, 노동자 및 고용주의 권리와 의무 및 책임의 한계 등을 다루면서 상호 원만하게 협의에 도달하는 기법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위키백과 영문판 ‘노동법’ 참조).

다음으로 경제교육은 어떤가? 초중고생들에게 경제교육이 보편화하여 있지 않다. 학생들이 교내외 알뜰장터를 운영하는 것을 포함하여 경제지표 읽기와 기초적 분석, 재테크의 방식 등 자본의 성격을 현실적으로 익힐 기회가 없다. 경제교육이 없으면 경제 흐름과 자본가의 성격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된다. 그러면 학생 대다수가 미래의 노동자들인데, 이들이 자본가들의 논리에 휘둘리기 쉬운 조건에 놓인다. 나아가 자본의 탐욕과 횡포에 봉사할 수 있다.

2019.6.6일 한국의 고등과학원에서 근무 중인 김찬울 연구원(한국의 울산과학기술원 UNIST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미국방성 장학생으로 연구하다 현재 병역특례 의무기간 복무로 한국에 체류 중)은, “미국의 가정에서는 초등학생들 용돈을 주식으로 주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특히 유태인 가정에서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주식투자를 투기로 여기는 일반정서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극복할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의 학교에서 이제는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

김승환 전북도 교육감 등 전국의 시도교육감들이 세종시에서 고등학교 무상교육 예산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김승환 전북도 교육감 등 전국의 시도교육감들이 세종시에서 고등학교 무상교육 예산에 대한 국가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뉴시스

경제 불평등과 교육 불평등이 서로를 강화하고 있어

사회적으로 취약계층에 대한 생활비, 재취업비, 의료보험이 확대되고 있고 교육에서 무상급식에 이어 무상교육이 시행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미래가 불안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교육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지위 경쟁의 수단임과 동시에 교육 자체가 하나의 상품화되고 있다.

사회적 지위 경쟁의 유리한 조건에 있는 계층은 당연히 경제적 상위계층이다. 이 계층의 자녀들이 이미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사교육으로 무장한 상태이기 때문에 경쟁의 출발점부터 앞서 있다. 가난해도 책 많이 읽은 학생이 성적경쟁에서 앞서가는 경우가 있지만, 요즘은 그게 더 어려워지고 있다.

로봇, AI로 무장한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대에 한국은 아직도 미래 대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채 과거 학습습관과 객관식 평가방식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이런 방식이 자본주의의 경쟁과 지위분배에 있어서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이며 심지어는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도 일부 그렇게 학생들의 학습본능을 제약하는 경향이 있어 지식암기 관행에 대해 비판적으로 쓴 기사를 참고할 만함:2017년 2월 15일자 영국의 가디언).

과열 경쟁은 객관식 시험을 낳고, 시험은 암기를 낳고, 암기학습은 상상력의 빈곤을 야기시킨다. 일차로 성적경쟁의 낙오자들, 학교 중도 포기 학생들이 교육불평등의 약자로 전락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기저층을 이루면서 자본가에게 더욱 예속적인 삶을 살기 쉽다. 교육은 자본주의적 탐욕을 허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본주의적 욕망에 봉사할 수도 있다. 한국은 후자인 것 같다.

누가 기생충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다수의 노동자를 채무자로 만든다. ‘채권-채무자 관계는 사회복지 수혜자, 임금 노동자, 마트에 가는 소비자 모두를 채무자로 바꿔 놓았다. 채무는 죄의식을 수반하는 경향이 있다. 니이체는 독일어에서 도덕의 근본개념인 죄있는(Schuld)이라는 말이 부채(Schulden)와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극빈자들도 공공부채로 인해 채권자에게 간접적인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경제학자들은 프랑스의 신생아가 심지어 2천만 유로의 빚을 지고 태어난다고 말한다’(최승현:현 심석초등학교 교사 및 서울시립대 강사, 들뢰즈의 관리사회론과 현대 공교육의 과제, 2017).

이제 이 채무자가 기생충으로 보인다. 기생충이라는 용어 자체가 사회현상에 적용할 때는 비하의 성격을 띠게 되어 사용하기가 좀 민망하다. 노사갈등이 원천적으로 긴장 관계의 속성을 완전히 떨치기 어려운 이유는 잉여가치의 몫이 본래 누구 것인가에 대해 합의가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신들의 몫을 가져가는 자본가가 기생충이다. 교묘하고 탈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기업주를 보면 박멸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아니면 서로에게 기생충이 된다.

이제 교육은 서로를 기생충으로 볼 수 있는 적대적 관계의 두 계급 즉 브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자본과 노동을 화해시킬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이에 경제교육, 노동교육은 시대적으로 요청되는 절실한 교육적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의 건강한 노동자 및 기업인으로서의 가치를 익혀 사회로 내보내야 할 것 같다.

한국 정부가 6만여명의 조합원이 활동하는 전국교원노동조합을 법적으로 복원시키지 않아 여기서 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진보교육감들 및 변호사들과 함께하면 어려움은 덜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더 이상 노동조건과 권리에 대해 맹목인 상태로 아이들을 자본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또 자본의 논리에 대한 이해 없이 자본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특권학교폐지 및 일반학교살리기 운동본부 등 사회단체가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준화교육을 해치는 특목고와 자사고 해지를 촉구하고 있다.
특권학교폐지 및 일반학교살리기 운동본부 등 사회단체가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평준화교육을 해치는 특목고와 자사고 해지를 촉구하고 있다.ⓒ정의철 기자

그리고 정부는 차근차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가운데, 자본주의가 교육을 수단화하는 그 지배력을 차단하기 위해 공적 복지를 통해 학생들이 처한 문화적 차이, 교과 능력의 차이를 좁혀야 할 것 같다. 공공성(公共性)이 강화되지 않으면 언제나 사적 욕망이 활개 친다. 이것이 인간의 속성인지 모른다.

일례로 이란, 카자흐스탄 등 이슬람권을 중심으로 하면서 미국, 태국 등의 사례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초중등 교육의 투자를 늘렸더니 수입불평등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대학교육이 확대될수록 오히려 수입불평등이 확대되었다. 하지만 대학교육비를 국가가 전담할수록 불평등이 다시 줄어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Abolfazl Shahabadi 외, 이슬람권에서 수입불평등에 미치는 교육의 효과. The effect of education on income inequality in selected Islamic countries, 2018). 이를 보면 학비의 개인 의존도가 높은 영미권 보다 북서유럽의 대학이 평등에 접근해 있음도 이해가 된다.

아이들이 목수를 원하면 목수로 커가도록 교육과정을 배열해 주고, 정부는 이들이 대기업 중견간부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게 대우받으며 살 수 있는 경제적 재분배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영화 속의 운전수 송강호와 IT 기업 사장 이선균이 다시 화려한 원색의 인디언 복장을 하고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어 춤추며 놀 수 있을 것이다.

신남호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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