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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동지’ 그 이상의 운동가, 이희호 여사의 97년
이희호 여사 영정
이희호 여사 영정ⓒ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0일 별세한 이희호 여사의 삶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김대중의 정치적 평생 동지로 일컬어지지만, 이희호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을 만나기 전부터 여성인권에 눈을 뜬, 시대를 앞서간 운동가였다.

이희호 여사는 1922년 서울에서 아버지 이용기 씨와 어머니 이순이 씨의 6남 2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의사가 된 아버지를 비롯해, 상대적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교육 혜택을 누리며 세상에 일찍 눈을 떴다. 이화여고를 거쳐 지금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여전을 나왔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 기독교 학교를 거치면서 이희호 여사는 평생 신앙인의 길을 걸었고, 여성운동을 할 때나 독재로 박해받을 때 종교는 물심양면으로 큰 힘이 되기도 했다.

이 여사는 해방 이후 서울대 사범대를 입학해 기독학생운동과 여성인권운동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전쟁 중이던 1952년 당시 여성계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이후 여성문제연구회)을 창립해 상임간사와 2대 회장 등을 역임하며 남녀차별 철폐에 본격적으로 매진했다. 당시 함께 하던 동지들로 한국 여성운동 1세대가 형성됐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이 여사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이후 1958년 YWCA 연합회 총무가 돼 여성인권 운동의 지도자로 본격 나섰다.

비록 여성운동에 뛰어들긴 했으나 삶의 궤적과 형편이 달랐던 이 여사가 김 전 대통령과 결혼을 ‘결단’한 것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1962년 결혼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이미 한 차례 결혼 후 부인과 사별해 홍일, 홍업 두 아들을 데리고 있었다. 또한 목포에서의 낙선 등 정치적 실패를 거듭하다 1961년 강원도 인제 민의원(4.19혁명 이후 민의원, 참의원 양원제 채택)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곧바로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국회의원 선서조차 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뺏긴 신세였다. 이 여사의 가족을 비롯한 주변에서 결혼을 극력 만류했으나 이 여사는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택했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중 부산 피란 시절 처음 만났는데 이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과 인품에 깊은 신뢰를 가졌다.

납치 사건 후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납치 사건 후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자료사진

박정희 군사독재를 위협할 야당 지도자로 김 전 대통령이 부상할수록 이 여사의 고난도 함께 커졌다. 1970년 대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든 김 전 대통령은 95만표 차이의 접전을 벌이며 낙선해 집권세력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으로 김 전 대통령은 생명의 위협까지 겪었다.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건졌으나 평생 다리가 불편했고, 1973년에는 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귀국 후 박정희 정권이 몰락할 때까지 가택연금과 투옥을 반복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신군부도 김대중을 최대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했고 결국 1980년 5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해 사형을 언도했다.

국내외의 거센 구명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은 김 전 대통령을 살려두게 됐고, 1985년 2.12 총선에서 김대중, 김영삼(YS)이 합작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김 전 대통령은 정치적 재기를 했다. 1987년 양김 분열로 대선에서 패배하고 1992년 대선에서도 YS에 패배하면서 김 전 대통령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이 여사는 곁을 지켰다. 끝내 1997년 대선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영광도 함께 누렸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로서 그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김대중 정치철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세력의 맞서 종교계 등 국내 양심세력은 물론 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구명운동도 이끌었다. 해외 인권운동 진영은 김대중, 이희호의 강력한 지지자가 돼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압박했다.

김 전 대통령 수감시기에는 수시로 면회는 물론 편지 왕래로 신념을 북돋웠다. 후에 두 사람의 옥중편지는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여성운동 1세대 지도자인 이 여사의 인권의식이 김 전 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교동 자택 앞에 나란히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문패가 걸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1998년 대통령소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설립됐고 이듬해 남녀차별금지법이 제정됐다. 2001년에는 여성 업무를 전담하는 최초의 정부 부처인 여성부가 신설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여사에게 여성관을 많이 배웠음을 여러 차례 고백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김 전 대통령도 서거했다. 아흔을 바라보는 고령이었으나 이 여사는 정치 퇴행과 특히 한반도 긴장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이는 평생 동지인 김대중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기도 했다. 김 전대통령 국장이 치러진 서울광장에서 이 여사는 국민과 조문객을 향해 말했다.

“제 남편은 일생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많은 오해를 받으면서도 오로지 인권과 남북의 화해, 협력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권력의 회유와 압력도 있었으나 한 번도 굴한 일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옵기는 남편이 평생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이희호 여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조문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두 손을 맞잡고 있다. 2011년 12월 27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장면.
이희호 여사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조문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 두 손을 맞잡고 있다. 2011년 12월 27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장면.ⓒ뉴스1

2000년 김 전 대통령과 평양을 방문해 6.15공동선언 탄생을 함께 경험했던 이 여사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맡아 남북화해와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해 두 차례 방북을 했다. 2011년 12월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에 맞춰 평양을 찾았고, 이 때 김정은 현 국무위원장이 이 여사의 조문을 받았다.

이 여사는 2015년 7월에는 취약계층 의료 지원을 목적으로 방북한 바도 있다. 이 때문에 북에서 이 여사 장례에 조문단을 파견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2008년 11월 1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이희호여사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출판기념회가 열린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2008년 11월 1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이희호여사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출판기념회가 열린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뉴시스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은 정치인으로서, 운동가로서, 부부로서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함께 한 세기의 역사를 헤쳐왔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인 지난 2008년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의 출판 기념회에서 언론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저는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런 면이 도움이 되지 않았겠어요? 우리 부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동행’이라는 책 제목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서로 인격을 존중하며 살았어요. 우리 집에 나란히 달린 문패처럼, 모든 것을 의논하고 동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고희철 기자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진실을 열심히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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