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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남은 전태일 살던 집 지키려는 사람들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에서 '전태일 기념관 개관식'을 마친 뒤 시민들이 전시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자료사진)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에서 '전태일 기념관 개관식'을 마친 뒤 시민들이 전시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자료사진)ⓒ민중의소리

분신 항거 이틀 전인 1970년 11월 11일, 전태일 열사는 짝사랑했던 소녀(김예옥)를 만나러 대구로 향했다. 그 자리에서 전태일은 그녀를 향해 무거운 고백을 한다.

“내가 죽어야만 해결된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면서 전태일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평화시장 노동자의 아픔을 이야기했다. 하루 14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도 밥 한 끼 먹지 못한 노동자가 많았다. 사용자는 업무량이 많을 때 ‘잠 안 오는 주사’까지 맞춰가며 얼마간 밤샘 노동을 시켰다. 그렇게 일해서 번 일당은 커피 한 잔 값(당시 50원)에 해당하는 적은 임금이었다.

한참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당한 노동착취에 대해 이야기하던 전태일은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이후, 전태일은 말한 바를 지키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전태일은 왜 ‘대구’까지 와서 이러한 중대한 고백을 했을까. 전태일의 고향은 대구다. 그리고 전태일은 대구를 ‘가장 행복했던 곳’으로 꼽을 만큼 각별히 아꼈다. 전태일이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던 분신 항거 뜻을 대구에 찾아와 밝힌 이유다.

하지만 현재 대구에는 전태일에 대한 흔적을 찾기 힘들다. 전태일이 다녔던 학교, 집터 등 그 어떤 곳에도 표지석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대구 시민들이 전태일의 고향이 대구라는 점도 언론보도를 통해 근래 알게 됐을 정도다.

이에 문제의식을 느낀 대구 시민들이 직접 나섰다. 최근 대구 시민들이 주축이 된 ‘전태일의 친구들’은 전태일의 생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던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명덕초등학교) 시절의 집터를 보존하고, 대구에 전태일기념관을 세우는 등의 계획을 세웠다. 이에 대해 김채원 전태일의 친구들 상임이사는 “‘전태일 열사 50주기’인 내년(2020년)에는 전태일의 영혼이 고향 대구로 돌아와 안식을 취할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전태일의 친구들’ 탄생하기까지
도시개발사업으로 전태일 생거지 일부 훼손되기도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대구에서 탄생하기까지 밑바탕에는 전태일 자취를 찾아 떠난 ‘기행’이 있었다. 전태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구 시민 30여 명은 ‘전태일 열사 45주기’인 지난 2015년 ‘대구시민문화제’를 열고 전태일의 자취를 찾아 동생 전태삼 씨와 함께 기행을 떠났다. 이 때 전태삼 씨는 기행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전태일이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 번지에 위치한 집을 소개했다.

전태일 열사의 생거지.
전태일 열사의 생거지.ⓒ제공 = 전태일의 친구들

전태일이 살았던 이 동네는 가내 봉제업을 하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았다. 이 마을의 한 집에 살게 된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의 권유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인해 전태일은 낮에는 재단사 아버지의 일을 돕고, 밤에는 수업을 들으며 공부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지만 전태일은 공부를 잘해서 학급 실장을 맡기도 했다. 전태일은 일기를 통해 당시를 이렇게 표현했다. “50분 수업 시간은 너무 짧은 것 같다.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있는 것 같다”

이 시절에 짝사랑했던 소녀 김예옥도, 전태일이 깊이 의지했던 친구들도 만났다. 훗날 22살의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의 투쟁이 곤혹스러웠던 때, 대구에 있는 친구 원섭이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왜 펜을 잡게 되는지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속이 답답하고 무엇인가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심정이기에 쓰고 있는 것 같구나 (중략) 그 많은 먼지 속에서 하루 14시간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너무나 애처롭네”

전태일은 친구 원섭이에게 이 편지를 보내진 않았다. 하지만,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전태일은 고향 대구 남산동을 떠올리며 다시 의지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런 당부도 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노동자를 위해 분신 항거 한 전태일에게 고향 대구는, 남산동 생거지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전태삼 씨와 기행에 나선 대구 시민 30여 명.
전태삼 씨와 기행에 나선 대구 시민 30여 명.ⓒ제공 = 전태일의 친구들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기행 참가자들은 전태일의 생거지를 보존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이에 대해 김 이사는 “기행을 하면서 대구에 전태일 열사의 생거지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모두가 반가워했고, 이 집의 의미를 보존했으면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구 시민들의 뜻을 모아가던 중 뜻하지 않은 위기가 발생했다. 2017년 당시 대구시 중구청에서는 도시재생사업을 실시했고, 이로 인해 전태일 생거지 담장이 허물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실을 안 전태삼 씨는 허물어진 담장을 보고, 애통해했다.

기행에 참여했던 이들에게도 당시 일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 이사는 “그곳은 개인의 소유지라서, (구청에) 전태일 열사의 생거지라고 허물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우리는 전태일 열사의 생거지가 훼손되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하자고 다짐했다”라고 말했다. 생거지 담장이 허물어진 사건을 계기로 기행 참가자들은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차츰 뜻을 모아, 2018년 12월 ‘전태일·조영래 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이하 준비위)를 결성했다.

이들은 전태일 열사의 생거지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소유주와 매입에 대해 논의도 마쳤다. 우연히도 현재 소유주는 선친부터 현재까지 약 60여 년간 이 집에 살았던 인물이다. 전태일보다 2살 어린, 집 소유주는 ‘어린 전태일’을 가깝게 느꼈다. 그래서였을까. 현 소유주는 전태일 생거지에 대한 의미를 공감하며 시민 기금 조성까지 수 년째 기다리고 있다.

전태일의 친구들 창립총회.
전태일의 친구들 창립총회.ⓒ제공 = 전태일의 친구들

“시민의 뜻으로 기념관 세울 것”

‘준비위’는 전태일 생거지 매입을 위해 ‘시민 기금’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올해 12월까지 생거지를 매입자금 5억을 조성하고, ‘전태일 열사 50주기’인 다음 해에는 전태일기념관 착공식을 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준비위는 공식적인 시민 기금 마련을 위해 법인 설립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올해 3월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창립을 마쳤고, 지난 1일부터 시민 기금 모금에 돌입했다. 현재(6월 11일 기준) 시민 기금으로 모인 돈은 7천여만 원이다.

물론, 전태일의 친구들이 기금 조성을 마냥 기다린 것은 아니다. 전태일의 친구들은 시민 기금 마련을 위해 시민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다양한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이들은 대구에서 전태일의 자취를 찾는 기행, <전태일 평전 읽기>, 소감문 공모대회 등을 통해 시민 기금 조성을 독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대구에서 전태일과 인연을 맺은 이들의 기억을 모아, 전태일을 기록하는 작업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김 이사는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전태일 열사의 선생님이었던 분이 아직 생존해 있다”라며 “생존해 있는 분들의 구술을 통해 전태일 열사의 삶을 기록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라고 밝혔다. 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의 교사들은 대부분 대학생으로, 전태일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특히 전태일을 가르쳤던 선생님은 팔순으로, 현재 대구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청옥고등공민학교시절, 전태일 열사의 선생님.
청옥고등공민학교시절, 전태일 열사의 선생님.ⓒ제공 = 전태일의 친구들

김 이사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청년, 청소년, 시민들에게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알리는 사업을 할 예정”이라며 “저희의 뜻에 동참하는 시민들은 시민 기금 조성에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린다”라고 당부했다.

장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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