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여성 그리고 연극⑦]번역가 함유선 “유산, 낙태, 청소년 임신...사람들이 쉬쉬하는 이야기들 꺼내놓고 싶다”
함유선 영미문학 번역가가 11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한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11
함유선 영미문학 번역가가 11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한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11ⓒ김철수 기자

돌로레스:나에겐 작은 사람이 있어. 내 안에 작은 사람으로 자라날 뭔가가 있어.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어. -Jen Silverman ‘Sill’ 중에서/함유선 번역-

지난 4월 11일 많은 사람들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숨죽여 기다렸다. 이날 헌법재판소는 낙태한 여성이나 낙태 시술을 한 의료진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며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을 개정하라는 취지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당시 낙태죄 폐지 소식에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고 낙태죄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대 목소리도 높았다. 여전히 두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동시대 화두는 낙태 문제만이 아니다. 점점 임신 여성의 연령대가 높아지고 있는 만큼 유산에 대한 관심도 높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 정치, 사회, 문화 분야는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 어떤 장르보다 동시대의 문제를 가장 빠르게 수용하여 예술적인 언어로 담아내는 분야가 공연계라지만, 여전히 공연계 내에서도 낙태나 유산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메마른 분위기 속에서 얼마 전 유산을 소재로 한 연극 ‘너에게’가 상연됐고 막을 내렸다. 제2회 페미니즘연극제 참가작이었던 연극 ‘너에게’의 원작 ‘Still’을 번역한 것은 함유선 번역가였다.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번역학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SPOKEN’에서 활약 중인 함유선 번역가는 한국에 잘 소개되지 않은 해외 작품들을 발굴해 국내 연극계에 소개하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 공연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여성의 주거 문제, 여성 청소년 이야기, 낙태와 유산 문제 등을 발굴 중이다. 그가 바라보는 주제는 여기에 한정되지 않고 점차 확장되고 있다. 그는 “첫 작품 ‘오마르-내가 결국 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모두 여성 이야기”라며 “공연으로 제작되지 않아서 소개는 못 했지만 그런 해외 작품이 집에 더 많이 있다”고 말했다.

함유선 번역가에게 해외 희곡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우리나라 공연계를 바라보니 여성 서사가 부족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 여성 서사의 부족함을 메우고 있는 그에게서 연극 ‘너에게’를 포함한 다양한 해외 작품에 대해 들어보고 싶었다. 그가 어떤 해외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해 왔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들어보기 위해 종로구 율곡로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함유선 영미문학 번역가가 11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한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11
함유선 영미문학 번역가가 11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한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11ⓒ김철수 기자

유산과 낙태...
중심 주제로 한 작품들 국내에 별로 없어

함유선 번역가는 연극 ‘너에게’가 무대에 오르는 4일 동안 계속 극장을 찾았다. 무대에 오르는 희곡을 번역했다고 해서 해당 번역가가 공연 기간 내내 극장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번역한 말들이 무대에 피어오르는 현장을 끝까지 모니터링 하며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힘이 들었다. 힘들었다는 말이 고통스러웠다는 말이 아니라 에너지가 들었다는 소리다. 제가 참여하는 작품이 거의 그렇지만 등장인물이 곤경에 처한다. 이번 작품은 유산이라는 한 축이 크게 담당한다. 주인공 모건 대사 중에 ‘자연재해’라는 말이 있는데 유산은 마치 자연재해처럼 예측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연극을 보는 게 힘이 들었지만, 애초에 제가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한 이유도 인물 면면에 애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인물이 힘들어하다가 그것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켜봐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것은 힘들지만, 힘든 이야기라고 해서 고개 돌리지 않고 가상의 인물이지만 지켜봐 주고 싶었다.”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대표 포털 사이트에서 원작자 ‘Jen Silverman’(젠 실버먼)의 이름이나 작품을 한글로 검색하게 될 경우,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낙태나 유산에 대한 한국 연극, 혹은 해외 작품을 검색해 봐도 검색이 쉽지 않다. 예민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해외 작품이나 한국 작품이 얼마나 소개가 덜 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글에서 영문으로 ‘Jen Silverman’을 번역해야 자세한 정보가 제공되는데 외국어를 능통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접근하기 쉽지 않다.

‘너에게’를 소개하게 된 배경에 대해 함유선 번역가는 “유산을 주제로 한 이야기는 작품 중간에 곁다리로 지나갈 순 있어도, 중심 주제로 한 이야기는 국내에 많이 없다”며 “‘너에게’는 일단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좋은 작품을 보면서 저 혼자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저는 대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결말까지 통틀어 봤을 때, 작품이 강렬하게 와닿아야 번역을 하는 편이다. 웬만큼 미지근하게 좋아서는 안 하게 된다. 이 인물이 다 좋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다는 생각이 들어야 작품을 ‘킵’ 해두고 대본을 사서 보거나 한다. ‘너에게’는 그게 좋았다. 사산아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것이 신선하고 재밌었다. 또 여성 캐릭터 3명에 대한 공감도 많이 됐다. 10대, 30대, 40대 등 여러 연령대의 여성들이 나오는데 사회 계층적으로 전혀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동떨어진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기반을 둬서 다시 살게 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해외 작품 ‘너에게’는
굉장히 보편적인 이야기

함유선 번역가는 ‘너에게’를 맨 처음 원문으로 읽었을 때 눈물을 쏟으며 읽었다고 했다. 그렇게 빠져들 듯 읽은 후, 두 번째 세 번째 읽을 땐 객관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며 번역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해외 작품인 만큼, 해외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기에 한국 독자와 정서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생길 것 같았다.

이에 대해 함유선 번역가는 “가령, 인종 문제나 마약 할 때 상태를 설명하는 부분은 우리나라와 외국의 정서가 완전 다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맥락이 굉장히 까다롭긴 하다”며 “하지만 ‘너에게’의 경우 그렇게 사회·문화적 맥락상으로 고민할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너에게’는 굉장히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당연히 슬프고, 그런 아이를 받은 조산사도 괴롭다. 그리고 아이를 임신한 10대가 ‘아이를 지워버릴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작품은 사회·문화적 맥락상으로 고민을 한 것보다, 작품 자체가 시적이고 운율도 맞아야 하는 독특한 언어로 쓰여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더 고민했다. 특히 이틀 전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산아 콘스탄티노플의 언어가 고민이 됐다. 극 중 주인공들의 말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 감정가랄까? 원작자가 전달하려고 했던 감정이 무엇일지 파악하고 전달하려고 했다.”

함유선 번역가가 번역한 작품 중, 제작되어 무대에 오른 작품은 연극 ‘오마르-내가 결국 될 수 있는 것’(이하 오마르), ‘너에게’, ‘베서니, 집’, ‘마른 대지’ 등이 있다. ‘오마르-내가 결국 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작품들은 모두 여성의 서사를 담고 있다. 해당 작품들은 국내외에서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열기가 뜨거웠던 2016~2019년 상연됐다. 함유선 번역가는 ‘오마르’ 이후 여성의 서사가 담긴 작품을 발굴하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오마르’가 2018년에 무대에 올랐지만, 사실 ‘오마르’는 2014년 겨울에 낭독 공연된 작품이다. 저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그것을 번역한 뒤 연극 하는 분들을 조금씩 알게 됐다. 그때 배우들이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작품이 별로 없다’고 말씀하셨다. 제가 처음 선택한 작품도 남자만 7명이 나오고 여자는 딱 1명이 나온다. 저는 그전까지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생각이 별로 없었다. 여자가 맡을 수 있는 배역이 별로 없고,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도 별로 없고, 게다가 나이 들수록 남자 배우들은 좋은 배역이 많아지는데 여자 배우들은 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보니까 정말 그렇더라.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기왕이면 더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더 나오고 여자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작품을 찾아서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연극 ‘너에게’
연극 ‘너에게’ⓒ제2회 페미니즘연극제

청소년 임신, 유산, 낙태...지금 현재 존재하는 일
결국 살아남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고파

지난해 2월경 공연계 내 미투 운동을 시작으로 연극계 내에서도 젠더 감수성에 대한 논의나 여성 서사가 담긴 작품을 발굴하는 작업이 왕성해졌다. 연극 ‘묵적지수’처럼 젠더 프리 캐스팅에 대한 시도도 있었다. 불과 1~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미투 운동이나 페미니즘 운동이 더 빨리, 더 폭발적으로, 더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예의를 차리지 않고 거리낌이 없고 도발적이며 좀 더 날 것의 이야기가 많은 미국 희곡을 개인적으로 더 찾아보게 된다”고 밝힌 함유선 번역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미국 희곡 분위기에 대해서 언급했다.

“제가 처음 찾아보면서 놀란 것은 미국 희곡이 우리나라 희곡에 비해서 폭력과 섹스에 대한 허용치가 굉장히 넓다는 것이었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말들이나 욕설이 그렇다. 청소년 낙태를 담은 ‘마른 대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미국 희곡 전체 분위기인 것 같다. 그것이 전반적인 분위기고 미국 희곡의 최근 경향은 트럼프다(웃음). 트럼프가 당선된 후 희곡 쪽에서 인종 문제가 폭발적으로 등장했다. 수상작들만 봐도 모두 인종, 인종, 인종 문제였다. 정말 온갖 종류의 인종 문제가 나와서 트럼프가 남긴 거대한 발자취를 보는 느낌이었다.”

해외 작품이 한국으로 소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최전방’에서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번역가다. 원작자의 철학과 세계관을 번역가가 어떻게 흡수하느냐에 따라서 완역된 결과물은 달라질 수 있다.

“제가 좋다고 생각하는 번역은 원문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번역이다. 원문이 가진 감정적인 가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감, 발음할 때 느낌 등 그런 것들도 모두 글의 일부인데 그런 느낌들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지, 번역문에서 얼마나 비슷하게 재현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업계에선 그것을 ‘장악한다’고 하는데 희곡의 경우 극작가들은 토씨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굉장히 고밀도의 분석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여성 캐릭터의 역할과 여성의 이야기는 남성 이야기의 부수적인 역할로만 존재해 왔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만 봐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다. 여성의 서사도 마찬가지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발굴이 덜 됐을 뿐이다. 관심을 덜 가졌을 뿐이다. 앞으로 함유선 번역가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다.

“사람들이 끔찍하게 여기거나, 해결이 안 됐거나, 불편해서 바깥으로 꺼내놓길 거부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저는 그런 것을 바깥으로 꺼내놓는 것을 좋아한다.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들이다. 청소년 성생활, 청소년 임신, 낙태, 모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야기를 안 할까?’ 하는 생각이 있다. ‘너에게’도 유산 이야기인데 이것을 한국에 소개할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사람들이 차마 말하지 않으려는, 봉인된, 쉬쉬하는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고 저는 결국 사람들이 살아남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매체에서도 게이나 레즈비언이 다뤄지면 죽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죽어서 아름답게 포장되거나 배드엔딩이다. 왜 이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안 나오나 싶다. 저는 살아가는 소수자이자, 가부장제나 어떤 규격들에 맞지 않지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분명 살아가는 사람도 이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 ‘이것 봐라, 이 사람들도 살지 않느냐. 우리도 같이 살자’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마지막으로 함유선 번역가는 “저는 개인적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 문화예술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그들이 가상 인물이라고 해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용기를 얻는다”며 “이제 제가 번역을 하고 소개해 줌으로써 갚는다고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여성 연극인들은 '미투' 이후 여러 동지들을 만나게 됐고 거기서 힘을 얻었다고 했다. 이러한 여성 연극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궁금해졌다. 1960년대에 비해 여성 작가와 여성 연출가의 수가 늘어났고 다루는 주제의 폭도 확장됐다. 오늘날 여성 연극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어떤 형식으로 풀어내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시리게 아팠던 점에선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바라보고, 뜨겁게 열정적인 점에선 여성과 연극의 가능성을 관찰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김세운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