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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눈감고 즐겨도 재밌는 게임 ‘서울2033’ - 반지하게임즈 이유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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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데모고르곤이다! 윌 어떻게 할거야?”

넷플릭스 독점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원제 Stranger Things)에서 주인공인 네명의 소년들이 보드게임을 즐기는 장면이다.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극중에 등장한 보드게임은 ‘던전앤드래곤’(Dungeons & Dragons, D&D)이라 불리는 TRPG다.

D&D는 전화번호부 두께의 룰북을 가지고 ‘던전마스터’의 진행대로 3~5명의 플레이어가 던전을 모험하는 테이블게임이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던전마스터’의 해설과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방법의 전부다. 그러나 소년들은 진짜 ‘데모고르곤’을 던전에서 만난 것처럼 흥분한다. ‘던전마스터’의 생생한 진행과 잘 짜인 세계관으로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에 등장한 '데모고르곤'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에 등장한 '데모고르곤'ⓒ스틸컷

한국에서도 90년대 말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이 주목받던 시절 ‘쥬라기공원’, ‘단군의 땅’ 등 텍스트 MUD게임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MUD게임은 Multi-User Dungeon라는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D&D를 그대로 컴퓨터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던전마스터’ 역할을 맡은 컴퓨터가 글을 통해서만 게임의 상황을 알려주고, 플레이어 또한 명령어를 직접 타이핑해 플레이한다.

지금은 눈이 호강하는 화려한 그래픽을 위해 FHD, 4K 등을 논하며 하드웨어 경쟁을 하는 시대지만, 과거에도 ‘공격 성공’ 문장 하나에 열광하며 판타지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들은 있었다.

“가장 뛰어난 그래픽카드는 상상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게임의 재미는 꼭 화려한 그래픽이 필수인 것은 아니다.

화려한 그래픽이 없어도 플레이어를 흥분시키는 게임, 아예 눈을 감고도 즐길 수 있는 게임 ‘서울 2033’을 만든 ‘반지하게임즈’의 이유원 대표를 만났다.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24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24ⓒ김철수 기자

“게임의 재미가 가진 본질은 그래픽과 상관없지 않을까요?”

앱스토어와 구글플레이에 출시된 ‘서울 2033’에서 화려한 그래픽은 볼 수 없다. 문장 사이에 상황을 묘사하는 이미지가 들어있지만 게임 그래픽이라기보단 ‘삽화’에 가깝다.

핵전쟁이 벌어진 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서울 2033’은 PC통신에서 유행했던 MUD 게임을 떠올리게 한다. 게임 안에 상황은 문장을 통해서만 묘사되고 플레이어는 다양한 상황에서 행동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플레이한다.

문장으로만 게임이 진행되지만 플레이어에게 충분히 긴장감을 준다. 한 번의 선택으로 생존에 필요한 자금을 얻을 수도 있지만, 한꺼번에 체력을 잃어 게임오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자보다 영상ㆍ비주얼이 더 친숙한 요즘에 문자로만 진행되는 게임이라니 선뜻 엄두도 못 낼 기획이다.

'서울 2033'
'서울 2033'ⓒ반지하게임즈

‘서울 2033’이 제작된 배경에는 이유원 대표의 오랜 고민이 있었다. 올해 25세인 이유원 대표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간단한 플래시게임들을 만들어왔다. ‘반지하게임즈’가 결성된 것은 3년 남짓이지만, 게임 개발 경력만 따지만 10여년 경력의 개발자인 셈이다. 그런 그가 엉성한 그래픽으로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면서 얻었던 고민은 ‘게임을 재밌게 만드는 본질은 뭘까’라는 질문이었다.

“혼자 만들기 때문에 화려한 게임은 당연히 못 만드는데 어떤 게임은 재밌고, 또 어떤 게임은 그래픽이 화려해도 재미없잖아요. 이런 걸 보면서 어렸을 때부터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란 게 뭘까’라고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그의 고민의 열쇠가 된 것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백남준의 작품 ‘필름을 위한 선’은 영사기가 빈 필름을 계속해서 비추는 것을 보여준다. 이유원 대표는 이 작품을 보고서 영상이 아닌 그것을 기록하는 필름 자체로도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걸 보면서 ‘게임의 본질’ 그게 뭔지 알면 그래픽이랑 상관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저도 비주얼이 화려한 게임보다 인디게임이랑 보드게임을 좋아하니까요. 어떤 독창적인 아이디어만으로도 재미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죠.”

백남준, '필름을 위한 선'
백남준, '필름을 위한 선'ⓒ백남준아트센터 재연

비주얼적인 표현에 한계가 있는 인디개발사의 사정도 텍스트 기반의 ‘서울 2033’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못하는 것을 따라잡으려 애쓰기보다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를 추구해보자는 이유원 대표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문자로만 이뤄진 ‘서울 2033’은 의외의 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바로 시각장애인들도 즐길 수 있는 게임으로 알려진 것이다. ‘서울 2033’은 본래 시각장애인 지원 기능을 고려하지 않고 개발됐지만, 아이폰의 ‘보이스오버’ 기능을 사용해 시각장애인들이 플레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스오버’란 화면에 나오는 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이다.

이런 사정을 리뷰를 통해 알게 된 반지하게임즈는 텍스트로는 나타나지 않는 부분들을 개선해 ‘보이스오버’ 사용 시 편의성을 높였다. 그 덕분에 아예 눈을 감고도 플레이가 가능하다.

“사실은 게임의 본질이란 게 있고 그것이 그래픽이랑 상관이 없다면 시각장애인도 똑같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개발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고 포기했거든요. 그런데 ‘보이스오버’를 사용한다는 사정을 듣고 신나서 개선 작업을 했죠. 결과적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재미의 본질에 대한 실험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뿌듯하기도 했어요.”

독특한 아이디어로 유저들에게 관심은 받은 ‘서울 2033’은 구글이 주최하는 ‘인디 게임 페스티벌 2019’에서 반지하게임즈를 ‘TOP3’ 개발사로 올려놓기도 했다.

‘B급 냄새’나는 반지하게임즈의 게임들

반지하게임즈는 이름처럼 약간 반지하 냄새가 나는 B급 감성들의 게임을 주로 선보여 왔다. 중고거래 커뮤니티에서 가격 흥정을 하는 ‘중고로운 평화나라’, 허세를 부려 소개팅에 성공해야 하는 ‘허언증 소개팅’처럼 온라인커뮤니티에서 회자될 법한 일들을 게임의 소재로 삼았다. ‘서울 2033’에서도 중간중간 나오는 이벤트에 온라인커뮤니티 유저라면 웃음을 터트릴 B급 감성이 묻어있다.

“‘병맛코드’를 의도한 건 아닌데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되더라구요. (웃음) 저희 게임을 관통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의도하지는 않았어요. 저희 팀의 취향인 것 같아요. 유저들 중에서 ‘믿고 하는 반지하게임즈’라고 리뷰를 달아주시는 분들을 보면 기분이 좋더라구요. ‘반지하게임즈라고 하면 B급 감성’이라고 저희만의 특색으로 생각해주시는 것 같아 좋았죠.”

'중고로운 평화나라'와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와 '허언증 소개팅'ⓒ반지하게임즈

반지하게임즈는 이유원 대표를 비롯해 백승민 개발자, 정윤지 디자이너로 구성됐다. 모두 고등학교 친구 사이다. 이유원 대표는 로스쿨을 다니는 법학도이고 나머지 멤버도 본업이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의견을 나누고 각자 분업해 게임을 완성한다. 특이한 점은 여느 개발사가 게임 제작 전에 만드는 기획서가 반지하게임즈에는 없다.

“팀원들에게 감사한 게 저를 되게 믿어줘요. 평상시 얻는 아이디어를 바로 플래시게임으로 만들어서 애들에게 보여주는데, 반응이 좋거나 개발이 가능한 걸 골라 개발에 들어가요. 기획안은 써도 안 보더라구요. (웃음) 플래시게임으로 보여주면 만드는 입장에서도 유저가 이런 걸 느끼게 해야겠다는 걸 생각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거 같아서 소통이 편해지는 거 같아요.”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24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학교 근처 카페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9.07.24ⓒ김철수 기자

이유원 대표가 게임의 본질적인 재미를 고민하게 된 것도, 일상에서 얻는 아이디어를 게임으로 구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 플래시게임을 만든 경험 덕분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유원 대표 같은 어린 개발자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건이 있었다. 올해 초에 있었던 정부의 인디게임 규제다.

현행 ‘게임산업진흥법’에 따라 ‘등급을 받지 않은 게임’을 유통하는 것은 불법이다. 이를 어린 개발자들이 자작 게임을 공개하며 놀던 ‘주전자닷컴’ 등에 그대로 적용해 어린 개발자들의 창작물 대부분이 막혔다. 어린 시절 ‘주전자닷컴’에 게임을 올리며 창작자의 꿈을 키웠던 이유원 대표도 이번 사태를 안타까워했다.

“어린 친구들은 영리목적으로 게임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그걸 규제해서 좋은 컨텐츠 제작자로 자라날 길을 너무 봉쇄하는 거 아닌가라는 아쉬움이 들더라구요. 법학을 배우는 법학도로서나, 창작자로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죠.”

반지하게임즈는 ‘서울 2033’의 확장팩을 준비 중이다. 텍스트 기반의 다른 작품도 구상 중이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B급 감성이 묻은 차기작도 계속 만들어갈 계획이다.

“특이하고, 독특한 취향이나 감성으로 만든 게임을 찾는 분들에게는 믿고 하는 인디게임 개발사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도 어릴 때 처음 게임을 만들게 된 게 하고 싶은 게임이 없어서 만들게 된 거니까요. 그런 게임을 찾는 유저들에게는 저희가 만드는 게임이 소중할 테니까요.”

김백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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