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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무대 위로, 연극 ‘휴먼 푸가’
연극 ‘휴먼 푸가’  전막 공연
연극 ‘휴먼 푸가’ 전막 공연ⓒ이승희

습관처럼 돌린 채널은 홈쇼핑에서 멈췄다. 언제부턴가 속 시끄러운 뉴스 대신 아무 생각할 필요없는 홈쇼핑 채널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날은 채널을 돌리자마자 갑자기 울려퍼진 팡파레에 흠칫 놀랐다.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나도 모르게 새해가 밝기라도 한걸까? 아니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는데 나만 모르고 살고 있었나?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다행이 홈쇼핑 자막에는 ‘드디어 입동이 밝았습니다’란 문구가 박혀 있었다. 날씨가 추워졌으니 지금 파는 옷을 사야한다는 무언의 판매전략이었겠지만. 어쨌거나 입동은 이름값을 하며 영하에 가까운 추위를 몰고 왔다.

집으로 돌아와 입동 추위로 하루 내 웅크린 몸을 채 풀기도 전에 뉴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는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내가 광주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난 몰라.” 살며 수백 번은 들어봤을 그 음성이었다. 말끝을 눌러 발음하는 그 특유의 음성은 하루 내 추위에 짓눌렸던 온몸의 신경을 건드렸다. 고령에 알츠하이머까지 걸려서 법정 증언을 할 수 없다던 전두환 전대통령이 골프장 나들이 중이었던 가보다. 그때 그의 뒤를 추적한 정의당 한 의원(정의당 부대표)이 인터뷰 요청을 한 모양이다. 그의 음성은 일츠하이머라 하기엔 참 명료한 발투였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더더군다나. 그는 그 의원과 10여분간 실랑이를 했다. 골프채와 손으로 폭력을 행사했고 자신은 광주와 아무 상관이 없다며 무척 당당했다.

그 불쾌한 음성이 하루종일 귓전을 맴돌던 입동 다음날, 무대에서 만난 광주는 아팠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는 아팠다.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연극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왔지만 하필 그 전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말이다. 연극 '소년 푸가'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귓가를 맴도는 '그 목소리'와 겹쳐지며 명치끝을 눌렀다. '퍽퍽' 소리를 내며 무대 위 배우가 자신의 명치를 칠 때마다 같이 내 명치가 진동하는 듯했다.

무대 위 배우들은 증언자들이었다. 광주에서 죽어간 원혼들의 증언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으로 옮겨간다. 이후 광주의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증언들은 광주와 다른듯 닮은 모습으로 계속되는 권력의 폭력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일정한 이야기의 구조가 있지 않음에도 8명의 배우들이 토해내는 증언의 조각들은 퍼즐처럼 큰 그림을 만들어낸다. 너무 직설적이고 세밀한 묘사는 소설 속에서도 엄청난 집중을 하게 만들었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을 통해 재전달되는 증언들은 소설과 또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더 아프고 더 고통스럽다. 객석을 무대 위로 끌어 올려 무대와 객석의 경계선을 허문 탓일까.

남산예술센터 '휴먼 푸가' 전막공연
남산예술센터 '휴먼 푸가' 전막공연ⓒ이승희

연극 ‘휴먼 푸가’는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인물의 감정과 심리를 전달한다. 백여 개는 되보이는 투명하고 맑은 유리병들이 고문실의 날선 고통을 투영하고 끝없이 긴 흰 천은 광주에서 자식을 잃은 엄마의 한만큼 끊임없이 개켜지다 태산처럼 쌓여간다. 죽은 이들의 뼛가루를 닮은 고운 밀가루는 배우들의 몸을 통해 환영이 되어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 몸으로 표현되는 움직임들은, 푸가(fuga, 동시에 진행하는 선율들이 하나의 주제를 모방하고 그것들을 합쳐져서 만든 성악곡이나 기악곡을 뜻한다)처럼 같은 듯 다른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 낯선 움직임들이 이해되는 것은 그런 이유일지 모른다.

“누가 나를 죽였지?”, “왜 죽인 거지?” 이유도 모른 채 광주에서 죽어 간 혼들이 묻는다. 무대 위 그 질문들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대답을 해줘야 할 책임자이자 당사자인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자신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질긴 목숨은 유유히 골프장을 빠져 나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고령의 ‘그’는 그 질문에 답을 해줘야 한다. 적어도 죽기 전에. 그래야 소년이 올 수 있고, 더이상 절박한 그 질문들이 허공에 흩어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연극 ‘휴먼 푸가’

공연날짜:2019년 11월 6일-11월17일
공연장소:남산예술센터
공연시간:110분
관람연령:중학생이상
원작:한강 「소년이 온다」
제작진:연출 배요섭/드라마터그 이단비/미술 이주야/음악 김재훈/조명 강정희/조명 오퍼 정연종/사운드 남상봉/조연출 김리우/기술감독 김요찬/무대감독 김동영/무대제작 백정집/사진 이승희/영상 최용석
출연진:공병준, 김도완, 김재훈, 박선희, 배소현, 양종욱, 최수진, 황혜란

이숙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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