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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빌딩숲만 가득한 도시에는 대나무숲도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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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45%가 만성 울분에 차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반격하지 못하는 억울함이 만연한 사회다. 억울함을 무력하게 쌓아두면 병이 된다. 말하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다.

응어리진 감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시간만 흘려보내는 수동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해소하기 위해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음악에 기대고, 글을 쓰고 말을 하고 눈물을 흘린다.

이재현 씨(36)는 그 중 ‘말하기’에 힘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모든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연결되지 않은 타인으로서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경청’한다. 말하는 건 듣는 이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재현 씨는 기꺼이 듣는 사람을 자처한다. 이것이 그의 능력이다.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김철수 기자

빠른 고민 15분에 5천 원
긴 고민 1시간에 2만 원

“저도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 있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안녕히’와 같은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지인에게 이야기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을 수도 있고요. 필요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안녕히’는 부담 없는 가격과 시간이 특징이다. 빠른 고민 이야기는 5천 원을 내면 15분을 이야기 할 수 있다. 재현 씨의 현명한 조언이나 고견을 듣기 위해 지불하는 건 아니다. 그의 ‘경청’을 사는 거다. 재현 씨는 그저 고개 끄덕이며 듣다 ‘진단’이 아닌 ‘공감’을 내민다.

“기존 심리상담센터 가격은 한 시간에 거의 10만 원에 육박하더라고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아동・청소년은 선택지에 넣을 수조차 없는 노릇이죠.”

전래동화의 주인공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대나무숲에서 외쳤다면, 요즘 사람들은 ‘대나무숲’이라는 익명 온라인 페이지에 애환을 털어놓곤 한다. 직장 동료에게도,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하물며 스스로에게도 솔직하게 터놓기 힘든 이야기가 있을 때 익명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간편한 수단이 된다.

나에게도 솔직하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일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재현 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꼭 또 다른 ‘나’가 말해주는 느낌이다. 재현 씨는 친구의 입장, 엄마의 입장, 선생님의 입장도 아닌 또 다른 ‘나’로서 자리한다. 고민을 털어놓다 보면 낯선 얼굴의 재현 씨를 놀랍게도 거울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가 나에게 위로받는 생소한 순간을 체험하게끔 돕는다.

“문제에 대한 해결이나 치료 같은 부분은 제 영역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내담자를 위로해야지’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담자가 하는 이야기는 들어보면 모두 힘든 일이거든요. 그러면 절로 공감이 되죠. 마음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게 이끌어주는 편이에요. 이 공간은 저에게도 그런 공간이니까요.”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김철수 기자

내담자 중 심리상담센터를 거쳐온 사람도 있다. 그들이 입 모아 말했던 ‘안녕히’의 장점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과정이 충분하다’라는 것이다.

“‘센터나 병원에 가면 검사를 몇 시간씩 하는 등 부담이 따르는데 그런 것이 없어 좋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아직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검사에 대한 비용적,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 같아요.”

나의 편에서, 나의 입장에서 나와 함께 생각해줄 사람이 생각보다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는 걸 느낄 때 그들은 상담소를 찾는다.

“내담자는 일이나 사람에 의해 억울한 상태인데, 내담자가 상처받은 일에 직접적으로 대처하거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그렇지 못한 환경이 너무 많거든요.”

주 고객층은 20대 후반 직장인이다. 울분으로 가득 찬 2030 세대에게 ‘들어주는 시간’은 대단한 방법이 필요하진 않지만, 사실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요. 이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이런 곳은 꼭 필요해요. 말할 곳 없거나 곤란한 이야깃거리를 들고 오면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같이 생각해줄 사람도요.”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김철수 기자

비전공자라는 이유로 우려의 시선도
중요한 건 지식의 활용보다 ‘경청’이다

재현 씨는 행정학 전공자다. 체육 대학 진학을 꿈꿨으나 최초 진학은 공과 대학이었고, 결국 행정학으로 전과해 졸업했다. 취업을 위해 입사한 여성 속옷 회사의 상품 기획팀에서 6년을 일하며 그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울분’이 쌓여갔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쏟는 회사에서 보람을 느끼지도, 주체적이지도 않았어요. 매출이 좋아도 성취감이 전혀 없었죠. 6년쯤 일했을 때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한 번쯤은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특유의 다정한 심성과 배려로 사람들의 고민을 곧잘 들어줬다. 그들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낄 땐 만족감도 높았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나름의 방법으로 타인을 돕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전공자가 아닌 탓에 국가공인 자격증은 취득하지 못했다. 최소한의 전문 지식을 갖추고 증명하기 위해 사설 자격증인 심리상담사 1급을 땄다. 처음엔 이런 지식적 요건과 관련해 걱정도 많았다.

“아무리 잘한다고 한들 사람들은 ‘전공자가 아닌데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있거든요. 또 고민을 말하러 오는 분들이 제가 가진 지식보다 조금 더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상태일 수도 있고요.”

“물론 제 취지는 전문적으로 상담할 수 있는 병원과 여러 차별성을 두는 거지만, 이런 고민을 배제할 순 없었어요. 그런데 오시는 분들도 ‘안녕히’의 취지를 이해하셔서 이곳이 고민을 해결해주는 장소라고 생각하진 않으시더라고요.”

심리학 전공자의 관점에서 이 공간이 충분히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상담소’를 차렸다는 오해와 편견을 깨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부분은 깨고 싶어요. 그분들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어요. 마음이 힘든 분들 중에서는 이런 것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매일 다른 내담자가 상담소를 방문한다. 그들과 재현 씨는 성별과 나이, 환경도 다르다. 이 다름을 뛰어넘고 공감할 수 있던 건 타고난 성정 덕이기도 하지만 ‘쉽게 다가가선 안 된다’라는 철칙에 있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야지’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안 돼요. 요컨대, 가장 어린 내담자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생각한 것만큼 그분들이 어린 생각이나 고민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에요. 고민과 내용이 성인과 비슷할 때가 많고, 저 역시 이 정도의 수준에 맞춰야지 하다가도 들어보면 사뭇 진지해지죠.”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김철수 기자

친근한 공간 위해 소품샵・명화 뽑기 등
진단 대신 취미・기호부터… 구경도 좋아요

재현 씨는 상담소가 친근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세심히 신경 썼다. 예약 시 딱딱한 검사지 대신 좋아하는 음식, 노래, 영화, 향기, 등을 적을 수 있게 해뒀다. 좋아하는 곡을 적어두면 그 곡을 상담소에 틀어두고 맞이한다. 5평 남짓한 이 공간만큼은 내담자의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있게 애쓴다.

응원 문구가 담긴 마스킹 테이프, 직접 만든 블루투스 이어폰 케이스 등을 진열하고 파는 작은 소품샵도 함께 운영한다. 이 역시 상담소가 ‘문제가 있어서 오는 곳’이 아닌, 오며 가며 편하게 들리고 구경할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는 재현 씨의 노력이다.

“소품샵을 비롯해 명화 카드 뽑기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도 친숙하고 재미있게 진행해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거예요. 벽이 낮아지도록.”

상담소가 자체 개발한 명화 카드 프로그램은 눈여겨볼 만하다. 재현 씨는 그림이 주는 편안함과 긍정감이 내담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명화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명화가 보이지 않게 카드 여러 장을 뒤집어 놓고 내담자에게 한 장을 고르게 한다. 신기한 점은 내담자의 상태에 맞게 상담자가 제시해주는 게 아닌, 내담자가 스스로 뽑게 한다는 점이다. 상담이지만 마치 타로 같다.

“그림마다 극복, 기대, 행복, 집중 등 키워드가 있어요. 내담자가 직접 키워드를 뽑으면 그분의 고민과 맞추어 설명해 드리죠. 그림으로 명확히 그 사람의 고민을 해결한다는 의미보다는요, 이런 키워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챙겨야 할 요소들이거든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본인 의지로 뽑고 설명을 들으면서 더 깊게 새길 수 있어요.”

“또 한 가지 이유는, 부담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예요. 타로의 방법에서 따온 게 맞아요. 운명을 점쳐보는 느낌이잖아요. 그런 것에 흥미를 많이 가지시더라고요. 이것만 하는 분들도 있어서 프로그램을 따로 빼놨어요.”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
14일 서울 성북구 ‘고민 들어주는 곳, 안녕히’ 이재현씨가 상담소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0.01.14ⓒ김철수 기자

“큰일 없어도 편하게 들릴 수 있길”
쉽고 부담 없는 하나의 선택지로서 ‘안녕히’를 꿈꾸다

재현 씨의 상담소는 해열제 같다. 병원에 가기엔 애매하거나 혹은 그것마저도 귀찮을 때 쉽게 먹을 수 있는 오렌지 맛 해열제를 닮았다. 재현 씨 역시 상담소가 그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곳이 하나의 쉬운 선택지가 됐으면 해요. 사실 아직은 그 인식을 잡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한국과는 달리 외국에서는 상담이 일상적이거든요. 굳이 이렇게 차려놓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문화예요. 한국은 아직 ‘내가 상담소에 다녀왔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걱정하잖아요. 큰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게 제 목표예요.”

그는 마지막으로 ‘누군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든 마음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조금 더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바랐고, 이런 변화가 모여 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대단한 해결책을 드리는 건 아니지만 조금이나마 편안하고 후련해졌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가능한 일이에요. 이야기하고, 누군가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다는 것. 이건 정말 가능한 일이에요. 그걸 많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말하러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허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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