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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생각] ‘광주대단지사업’과 땅장사 정부의 탄생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 모습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당시 모습ⓒ성남시

1.
당시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천호동에서 출발하여 삼십 리 황톳길을 따라가다가 남한산성 남쪽 산하를 오목하게 파고든 곳. 검단산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단대리, 상대원리, 수진리, 탄리 일대를 오늘날 사람들은 성남시(城南市)라고 부른다.

1960년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농촌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대폭 증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동력 하나 믿고 별다른 밑천 없이 이주한 사람들은 서울에 집을 구할 여력이 없었고, 밑천이 있었다 하더라도 시내 생활 기반시설, 특히 주택은 크게 부족한 현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청계천, 영등포, 용산 등 국공유지에는 무허가 건물을 마구잡이로 짓고 살았고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이른바 ‘판자촌’은 박정희 정권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하위주체들이 직접 자신의
열악한 생존 조건을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도시 빈민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광주대단지사건’을
우리는 ‘8·10 광주대단지항거’로 기억한다.

1968년 서울시는 이 무허가 건물들을 철거하고 시외로 철거민들을 대거 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광주군 중부면 일대 350만여 평에 신도시를 개발해서 50만 명의 이주민이 자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공업단지와 생활기반 시설을 조성하겠다는, 이 사업의 공식 명칭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지구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 일명 ‘광주대단지사업’이다.

1969년 봄 예정대로 택지조성을 위한 땅 고르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정지 작업이 두 달 정도 진행되었을 때부터 철거민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주택을 짓는 것은 고사하고 길마저 제대로 닦이지 않은 상황에서 150여 명의 철거민이 트럭에 실려 수진리(현 수진동) 야산 중턱, 가수용지(假收容地)라고 부르는 천막촌으로 이주되었다. 아니, 이주가 아니라 ‘수용’이었다. 한 천막 속에 2~4가구가 배치되었으며 장롱이나 찬장 등이 가족 단위 수용소 생활을 간신히 유지시켜주는 칸막이였다. 철거민들은 많은 경우 전 재산을 털어서 분양권을 구매하고 천막에 입주했지만 그래도 신도시의 삶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었다.

1971년 8월 이 가수용지에 유입된 인구는 25,267세대 124,356명에 달했다(출처:국가기록원). 수도, 전기, 전화, 도로, 심지어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거 환경은 생지옥에 가까웠고 공단 설립은 깜깜 무소식이었기 때문에 철거민들의 생활과 생계는 거의 막장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서울시가 분양대금을 일시금으로 납부하라고 철거민들에게 통보하자 주민들은 8월 9일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8월 10일 성남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불을 질렀다. 이어서 성남지서를 파괴하고 버스 8대를 탈취하여 대오를 형성하였다. 최소 3만, 최대 6만에 이르는 주민들이 시위대에 동참했으니 사실상 1가구 1항거를 한 셈이다.

박정희 정권이 시위대의 요구조건을 수용한다는 조건으로 소요사태는 진정되었지만 시위 과정에서 검거된 주민 21인은 징역 2년 이하를 선고 받고 실형을 살았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 하위주체들이 직접 자신의 열악한 생존 조건을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도시 빈민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광주대단지사건’을 우리는 ‘8·10 광주대단지항거’로 기억한다.

2.
「국토와 민중」(1983)을 통해 ‘국토인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 지평을 열면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했던 작가 박태순(朴泰洵, 1942~2019)은 이미 70년대 초반 도시 빈민의 삶을 취재하여 르포 형식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크게 주목 받은 바 있다. ‘문학은 눈이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의 시선이 광주대단지사건이 놓쳤을 리가 없다.

8·10 항거가 마무리된 직후
박태순은 광주단지 현장답사를 마치고
‘특별 르포타지. 광주단지 4박5일’을
발표한다(‘월간 중앙’ 1971년 10월호).
이 보고서에는 광주대단지사건 관련
공식 문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다.

8·10 항거가 마무리된 직후 박태순은 광주단지 현장답사를 마치고 ‘특별 르포타지. 광주단지 4박5일’을 발표한다(‘월간 중앙’ 1971년 10월호). 이 보고서에는 광주대단지사건 관련 공식 문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다. 간행된 지 50년이 다 되어 지금은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이 되었으므로,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가능한 한 많은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8·10 항거가 마무리된 직후 박태순은 광주단지 현장답사를 마치고 ‘특별 르포타지. 광주단지 4박5일’을 발표한다(‘월간 중앙’ 1971년 10월호). 이 보고서에는 광주대단지사건 관련 공식 문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다.
8·10 항거가 마무리된 직후 박태순은 광주단지 현장답사를 마치고 ‘특별 르포타지. 광주단지 4박5일’을 발표한다(‘월간 중앙’ 1971년 10월호). 이 보고서에는 광주대단지사건 관련 공식 문서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다.ⓒ기타

박태순은 “II. 광주단지의 모순된 형성과정”에서 철거민들의 이야기와 치열한 생존경쟁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노량진 철로변이 철거되면서 2백60세대와 함께 이주한 사람들, 동대문시장에서 노점 좌판을 운영하다가 이주한 사람들, 미군 철수 후 황폐화된 기지촌(파주, 문산, 용주골, 잠피리, 포천 등지)에서 옮겨온 1천2백 세대의 사람들……. 서울시는 “무작정 ‘천명만 모이면 서로 뜯어먹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의 방식으로 철거민들을 몰아서 이곳에 ‘버리다 시피’ 모여 살도록 했던 것이다. 따라서 ‘버림 받은’ 사람들이 살아내기 위해서는 격심한 생존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265쪽)

철거민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좌우한 것은 이른바 ‘딱지’라는 것이었다. 철거민들은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우선은 거주구역만 정해주는 분양증을 사서 단지로 들어오는데, 이것은 ‘무딱지’라고 불린다. 무딱지 소유자는 추첨을 통해 구체적인 지번이 적힌 입주증을 받는데, 이것이 바로 ‘딱지’이다. “추첨하는 날이 되면 철거민보다도 복덕방과 깡패들이 더 극성을 부리며 몰려든다. […] 깡패들은 이미 몇 개의 파로 나뉘어 군림한다. ‘서울역파’, ‘용산파’, ‘용두동파’, ‘청계천파’ 등이 그것이다. […] 좋은 땅을 추첨한 철거민이 나타나면 군말 없이 달려들어 ‘딱지’를 빼앗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냥 내빼는 것이다. […] 패거리 중의 다른 자들이 철거민을 인도하여 자기네 소굴로 데리고 간다.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흥정을 붙이고 온갖 공갈과 협박을 다 놓는다. 말을 안들으면 ‘딱지’를 찢어버리겠다고 엄포도 놓고 주먹을 휘둘러대기도 한다. 무력하고 허약한 철거민으로서는 눈물을 머금고 이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267~8쪽)

실제로 광주단지는 비참함에도
‘토지 붐’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매스콤은 광주단지의 비참함에는
오로지 눈을 돌리고
서울 시청에서 새나오는
화려한 계획백서에만
관심을 보여왔다.

평당 시세로 따져보면 5백원에서 2천원 정도 했기 때문에 “5백만원 정도를 가지고 들어온 땅장사들이 농간을 부리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부동산 열풍이 매스컴을 타고 전설처럼 유포되었고 3년 후 시세는 평당 5만원에서 10만원까지 올랐다. 급한 살림살이에 딱지를 팔거나 강제로 빼앗긴 사람들은 딱지를 다시 살 수 없었고, 결국 또다시 외곽으로 밀려나 산등성이의 이른바 ‘바락’(막사)에서 생활을 하거나 아니면 빈손으로 떠나야 했다. “연일 신문에 보도가 되고 세인의 관심을 호화롭게 집중시킨 것도 또한 ‘토지 붐’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광주단지는 비참함에도 ‘토지 붐’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매스콤은 광주단지의 비참함에는 오로지 눈을 돌리고 서울 시청에서 새나오는 화려한 계획백서에만 관심을 보여왔다.”(266쪽)

단지 내에는 철거민들의 분양지 이외에 기왕에 택지로 등기가 되어있던 사유지(私有地), 원주민들의 농지를 서울시에서 사들여 택지로 전환한 뒤 면적의 80%를 떼고 되돌려준 환지(還紙), 목이 좋은 땅을 분양하지 않고 유보해두었다가 서울시가 직접 공개 입찰 형식으로 팔았던 유보지(留保地) 등이 있었는데, 이 모든 종류의 땅에서 투기 열풍이 불었다.

특히 유보지는 서울시가 한번에 80~100평의 필지를 팔았기 때문에 누군가 “한 필지를 불하받기 위해서는 3백만 원 정도의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광주단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땅인 것이다. 유보지를 사는 사람들은 광주 주민이 아니다. 대개 서울특별시에 고대광실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큰돈을 쌓아놓고 투기장사를 벌이는 사람들이 사는 땅이 유보지이다. […] 서울시청에서 유보지를 입찰할 때면 반드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물론 광주단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일종의 브로커임에 틀림없다. […] 현직 검사의 동생, 모 세무서장의 조카, 모 기관의 정보원, 돈 많은 과부의 남첩, 모 고리대금회사의 직원들, 물주들을 찾아가 ‘유보지를 입찰하면 틀림없이 돈을 번다’고 하여 자본을 끌어대고 있는 복덕방 사람들이다. […] 현재 유보지 중에서 최고가격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단대리에 있는 종합시장의 부지로서, 평당 20만 9천원이다.”(271쪽)

3.
8·10 항거는 봉기를 시작한 지 6시간 만에 박정희 정권이 전격적으로 요구조건을 수용했기 때문에 많은 경우 박정희 정부에 대한 철거민의 승리라고 회자되면서 ‘성공적’인 봉기로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앞서 기술한 단지 내의 미시적 상황을 도외시하고 단지 내 몇몇 사람들이 받은 보상에만 주목한 결과이다.

항거 당시 광주단지는 입주권소유자(전매입주자)와 ‘딱지’마저 잃고 단지 외곽으로 떠밀려난 대다수의 철거민 사이의 계층 분리가 심화되어 있었다. 3만 명이 넘는 철거민이 동참하지 않았다면 소수의 전매입주자들은 봉기 자체를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고 일어났다 하더라도 대정부 협상력은 미비했을 것이다. 항거 중에 검거 되어 실형을 받았던 21명이 형을 살고 있는 동안 예의 소수만이 보상과 이익을 독점했고, 철거민들의 삶은 항거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과연 성공한 봉기인가?

광주대단지로 조성된 1970년대 성남 모습
광주대단지로 조성된 1970년대 성남 모습ⓒ성남시

‘광주대단지사건’은 ‘8·10 광주대단지항거’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하며 항거 중에 구속되었던 21명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한다. 성공한 봉기인지 아닌지는 그때 다시 논해도 좋을 것이다.

4.
1968년 외국인이 관광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하자 박정희는 도시 미관을 명분으로 서울 시내 판자촌 철거를 명하자,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그의 별명 대로 ‘불도자’ 같이 철거를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민들을 시외 불모지에 내다 버렸다. 박정희 정권은 ‘선입주 후건축’이라는 기가 막힌(?) 사업방식을 고안했고 부동산 투기에서 얻은 재원으로 택지를 조성하는 땅장사 정부를 탄생시켰다.

군부에 의해 버려진 ‘71년 광주’
또한 신군부에 의해
억압당했던 ‘80년 광주’가
끌어안아야 할
현대사의 한 아픔이 아닐까.

땅장사 정부는 한국사회의 하위주체들에게 경제적 피해를 주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항거 관련 구속자 대부분은 8·10 항거 이후의 철거민들의 삶을 그린 작가 윤흥길의 어느 소설처럼 사회참여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울분을 키워가며 이른바 ‘운동권’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게 되었다. 구술 자료에 따르면, 구속자들 가운데 몇몇은 “80년 광주시민들이야말로 방화와 파괴를 일삼은 진짜 폭도”인데 정말 먹고 살기 어려워서 나섰던 자신들은 희생자가 되었고 광주항쟁 관련자들은 보상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분노한 것으로 전해지며,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의 접근 자체를 원치 않았다고 한다.(임미리,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의 재해석」 262~3쪽.) 그들은 그렇게 보수화되어 갔고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군부에 의해 버려진 ‘71년 광주’ 또한 신군부에 의해 억압당했던 ‘80년 광주’가 끌어안아야 할 현대사의 한 아픔이 아닐까.

양진호(철학자, 인문학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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