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생각의 생각] 예술가들의 새로운 연대
대구미술관 ‘새로운 연대 New Communion’
대구미술관 ‘새로운 연대 New Communion’ⓒ대구미술관

1.
거의 100일간 휴관 상태였던 대구미술관이 ‘새로운 연대 New Communion’라는 전시 타이틀을 내걸고 지난 6월 13일 다시 문을 열었다. 모두가 시내에 있었지만 아무도 거리에 있지 않았던 2020년 2월의 대구. 그때 그곳에서 예술가들은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전시기획자는 “포스트 코로나에 인간과 사회, 자연과 환경이 어떻게 공존하고 관계를 이어갈지”를 고민했고(전시 소개글 참조), 예술가들은 자가격리 상황을 겪으면서 떠오르는 착상들을 다양한 형식의 작품으로 창작하기 시작했다(작가 인터뷰 참조). ‘새로운 연대’는 대구에서 활동하는 청장년 작가 12인이 참여하여 모두 2020년 이후의 신작을 출품함으로써 ‘코로나’라고 하는 강력한 동시대성을 우리 눈앞에 재현한다. 하나하나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여기서는 장용근과 김성수의 작품에서 떠오른 단상들을 남겨보고자 한다.

2.
장용근의 연작 ‘37.5℃’는 열화상 카메라에 잡힌 다양한 인체의 이미지들을 포착한다. 열화상(熱畫像, thermogram)은 코로나 이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이미지이고, 보았다 하더라도 영화 ‘프레데터’의 어떤 장면처럼 기이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로 기억되었던 듯하다. 하지만 요사이 우리는 화면에 나타난 우리 자신의 열화상을 알아볼 정도로 그것에 익숙해져 있다. 확실히 열화상은 새로운 일상이지만 이미 일상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일상의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하지만 열화상이 전시 벽면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다시 일상의 전면으로 튀어나와서 우리에게 어떤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전한다. 도대체 어쩌다가 열화상은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기준이 되었고, 우리는 또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판정 결과에 따라 사람을 달리 대하고 있는가? 이러한 재인식은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겪었던 대구의 충격을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이후 정착되어 가고 있는 새 정상성이 어떤 비정상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강제한다.

장용근, ‘37.5℃’ 연작, 2020, 안료잉크 출력, 144×192cm
장용근, ‘37.5℃’ 연작, 2020, 안료잉크 출력, 144×192cmⓒ양진호 제공
장용근, ‘간호사’ 연작, 2020, 안료잉크 출력, 60×40cm
장용근, ‘간호사’ 연작, 2020, 안료잉크 출력, 60×40cmⓒ양진호 제공

3.
한편 장용근의 연작 ‘간호사’는 인물 사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린다. 초상(肖像; portrait)은 인물(들)의 정체성을 담아내는 작업이기 때문에 한 인물을 다른 인물들과의 차이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이 ‘간호사’ 연작은 각 인물의 정체성이 드러나 있기는커녕 오히려 방호복, 고글, 마스크에 감추어져 있다. 방호복 위에 ‘간호사’ 스티커나 자필 서명과 같은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간호사’ 스티커는 의사와 구분하기 위한 것일 뿐이며, 자필 서명은 다른 사람의 것을 입지 않기 위해 무심코 해둔 표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작가가 이들을 어떤 덩어리진 군상 속으로 매몰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간호사들은 각각 같은 사이즈, 같은 모양의 액자 안에 익명의 존재들로 사진 속에 있지만, 전시장에서는 잘 의도된 조명들을 받으며 각각의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다. (이 아우라는 작품에서가 아니라 전시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참조). 많은 사람들이 엄지를 들어 올리며 ‘#의료진덕분에’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작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익명의 영웅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 한편에 이러한 물음이 남는다. 십분 남짓한 교대시간, 방호복을 갖춰 입기도 빠듯한 그 사이에, 간호사들은 왜 기꺼이 짬을 내어 이 기록에 동참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우리 각자의 내면에서 찾는 일이 바로 우리가 바라봄직한 새로운 정상성에 도달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김성수, ‘사람을 만나다’, 2020, 나무에 채색, 약 25cm×365점
김성수, ‘사람을 만나다’, 2020, 나무에 채색, 약 25cm×365점ⓒ양진호 제공
김성수, ‘사람을 만나다’, 2020, 나무에 채색, 약 25cm×365점
김성수, ‘사람을 만나다’, 2020, 나무에 채색, 약 25cm×365점ⓒ양진호 제공

4.
김성수의 ‘사람을 만나다’는 365개의 꼭두(인형)들을 공중에 떠있는 나무배 위에 세워둔 설치작품이다. 꼭두는 상여를 장식하는 작은 인형을 일컫는데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감염병 대유행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자가격리를 하게 된 김성수 작가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시작하여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모습을 손바닥만 한 크기의 목각인형에 재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며 지냈던 것이다(작가 인터뷰 중).

그런데 이 365일의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지 않고 모두 나무배의 바깥쪽을 보고 있다. ‘사람을 만나다’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어찌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이 한 쌍도 없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몇 바퀴를 돌아보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발을 움직이며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서있는 동안만 이들이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자 한 순간 각 사람들이 묵혀두었던 이야기가 주절주절 들려오기 시작했고 이내 전시장은 우리들의 왁자지껄한 수다판으로 바뀌었다.

이승과 저승, 실상과 허상 사이를 들락거린다는 꼭두들이 수평의 나무배 위에 수직으로 서있는 형상은 흡사 무(巫) 자와도 같아 보인다. 이것이 나만의 착각일까? 혹, 작가는 주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대구에, 아니 지구에 들이닥친 이 대재앙을 모두가 무탈히 치르고 다시 만나기를 염원했던 것은 아닐까?

5.
‘새로운 연대’에서 만난 예술가들은 모두 어떤 거창한 주제 없이 소소하게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면서 관람객에게 그저 안부를 묻는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비대면 소통이 잦아지면 잦아질수록, 대면의 만남과 소통을 더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찌 예술가들에만 국한될까? 코로나19가 우리의 공통된 경험이 되었을 때 이 그리움 또한 우리의 공통된 경험이 된 것 아닌가? 이 공통의 체험으로부터 ‘새로운 연대’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작품들은 더 이상 관람객을 만날 수 없을 듯하다. 본디 예정된 전시기간은 오는 13일까지였으나,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격상에 따라 대구미술관도 다시 임시휴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참에 감염병 대유행의 정도에 따라 가장 먼저 문을 닫곤 하는 전국의 국공립 시설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미술관에서도, 도서관에서도, 극장에서도, 아직 단 한 건의 감염 사례가 보고된 바가 없는데, 방역 대책을 더욱 강화하면서 시설들을 운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 덜컥 문부터 걸어 잠그는 것일까?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켜나가면서 예술의 ‘새로운 연대’를 시도하고 있는 군소 민간시설들이 이미 많은 안전 사례들을 입증하고 있는데, 왜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일까?

흔히들 ‘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극장이 계속 열려 있어야 한다.

양진호(철학자, 인문학교육연구소)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