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리뷰] 똑똑하고 현명하고 내조 잘하고 인물 좋은, 신화 속 여자는 없다, 연극 ‘정씨여자’
연극 ‘정씨여자’
연극 ‘정씨여자’ⓒ대학로 단막극장

하도 오래전 기억이라 아무리 짜 맞춰 보려 해도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결혼을 빨리해서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지. 어쨌거나 24살에 당시로도 무척 일찍 결혼했고, 무척 일찍 첫아이를 낳았다. 당시 꿈은 열심히 돈 벌고 남편 버는 돈 허투루 쓰지 않고 이끼며 살리라. 매일 남편 옷을 코디하고 아침밥은 꼭 챙겨 먹이리라. 아이들도 반듯하게 가르쳐 성공시키리라. 자식과 가족에게 헌신하며 살아온 우리 시대 어머니 모습처럼 그렇게. 하지만 금세 ‘현타’가 찾아왔다.

내 이름은 사라지고 ‘○○ 엄마’가 새 이름표가 되었다. 하고 싶었던 일들을 생각조차 할 시간도 없이 하루해가 저물었다. 꿈처럼 그려왔던 모든 것들은 온전히 내 노동과 에너지로 24시간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돌려야 돌아가는 오르골 상자와 같았다.

“엄마가 애들 안돌보고 나가서 놀면 안돼잖아.”
“남편 밥도 안챙겨주고 나왔어?”
“애들 잘못되는건 다 엄마탓이야.”
여자들조차 자신에게 주문처럼 대뇌이며 늘 미안함과 죄의식 속에 사는 것이
“내가 멍청한 걸까? 똑똑한 걸까?”
정씨여자(정여이)의 혼잣말이 송곳처럼 가슴에 와 박히는 것은 나만은 아닐거다.

1420년 때는 조선, 정씨 가문의 여자 ‘정씨여자’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작고 작은 단막극장 안에 고운 자태를 드러낸 그녀는 ‘정씨여자’다. 이름이 있을테지만(그나마 양반집 여식이라 이름이 있는 것이다) 여자는 쭉 ‘정씨여자’이다. 글 읽는 일이나 할 줄 알았지 먹고 사는 능력은 없는 몰락한 두 양반 김 삼과 주 오는 돈을 벌기로 마음먹는다. 양반 체면이 있는지라 사람 없는 한적한 길에서 술을 팔기로 한 두 사람은 아름답고 현명하여 남편을 출세시킨 이웃 마을 ‘정씨여자’ 이야기를 시작한다.

집안 좋고 돈 많은 양반집 딸 ‘정씨여자’의 방에 가난한 양반 최제수가 몰래 들어선다. 친구들에게 떠밀려 그녀를 보쌈하기 위해서다. ‘정씨여자’는 가난하지만 심지 굳고 선한 최제수에게 혼인을 약속한다. ‘정씨여자’는 혼례식 날, 신랑이 바뀐 것을 알게 된다. 욕심 많은 최제수의 숙부가 최제수를 가두고 자신의 아들과 ‘정씨여자’를 혼례시키려 한 것이다. 부모의 만류와 숙부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정씨여자’는 최제수와 혼인을 한다.

이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된다. 최제수는 과거에 급제하고 정씨여자는 예쁜 딸아이를 낳는다. 두 사람은 남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정씨여자가 병으로 일찍 죽게 된다. 그녀는 일찍 죽었으나 남편을 성공시킨 현명하고 지혜로운 여자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매우 성공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여자가 본받고 싶고 모든 남자가 부인으로 맞고 싶은 최고의 신부감인 셈이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들어 온 훌륭한 여성의 이야기와 닮았다. 그렇다면 ‘정씨여자’ 본인도 이 이야기에 동의할까. 연극은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조신하지 않으며 현모양처가 아니다. 정씨여자 정연이는 자신의 생각과 뜻이 분명하다. 자신이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기 원하며 여자는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는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그녀도 시대를 거스르며 살기가 힘에 겨웠으리라. 정씨여자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여자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된다.

여자아이는 분홍색 옷, 남자아이는 푸른색 옷이란 공식이 사라진 지 오래다. 여자아이는 인형놀이, 남자아이는 로봇놀이란 공식도 요즘 엄마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드라마나 영화 속 여자들은 당돌하며 독립적이다. 사회에서는 성공한 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이제 남녀차별은 사라지고 여자도 사회 구성원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까? 교복 치마를 거부하고 교복 바지를 입고 브래지어를 벗고 외출하는 딸 아이가 살아갈 시대에는 ‘정씨여자’ 신화는 사라질까?

아주 작은 소극장 무대를 요모조모 활용한 연출력이 눈에 띈다. 엽전 한냥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팔아먹는 두 양반 남자들이 빚어내는 해학은 이 작은 공연의 커다란 미덕이다. 멀티맨처럼 남자와 여자를 오가는 변신을 찰떡처럼 소화하는 배우 최석준과 신광현의 연기력도 엄지척이다. 인형 모자, 인형 칼 같은 미니어쳐 소품들은 소극장만이 보여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모든 것이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극단 작은 곰>의 질문은 오랜만에 ‘연극다움’을 느끼게 한다.

연극 ‘정씨여자’

공연날짜:2020년 10월 14일~10월 22일
공연장소:대학로 단막극장(서울 종로구 동숭동)
공연시간:평일 19시 30분/주말 및 공휴일 16시
러닝타임:90분
관람연령:만 9세 이상
원작:반무섭
각색, 연출:안성현
무대, 의상:극단 작은 곰
조명:이호원
소품:김지현(여우비 여우별)
출연진:최석준, 신광현, 오연재, 박지원, 김성국, 이동환, 강한솔

단막극장에서 펼쳐지는 단막연극축제

<제1회 일편단심 페스티벌>
극단 화살표(10월 4일-10월 11일)리투아니아/지옥에서 보낸 한철
극단 작은 곰(10월 14일-10월 22일)정씨여자
스튜디오 말리(10월 27일-11월 1일)더 할 나위 없이/입체단막낭독
프로젝트 두줄(11월 4일-11월 11일)구멍이 보인다/손이 온다
극단 썰(11월 14일-11월 21일)4piece
씨어터 오 컴퍼니(11월 24일-12월 1일)self-portrait/그녀를 소개합니다
극단 달을 만드는 씨앗(12월 4일-12월 11일)유치뽕짝
극단 비행술(12월 14일-12월 20일)우주의 밖
극단 종이로 만든 배(12월 24일-12월 31일)콘트라베이스와 플룻

이숙정 객원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