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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외면하는 ‘큰 손’ 국민연금, 올해는 달라질까?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해 9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태일3법 입법쟁취 사업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2020.09.24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해 9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태일3법 입법쟁취 사업계획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근로기준법·노동조합법 개정,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입법을 촉구하고 있다. 2020.09.24ⓒ김철수 기자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에 주주권을 행사하는 기준에 산업재해가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산재 발생 시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14일 전문가들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투자 기업이 주주가치 훼손 문제를 일으켰을 때 회사 경영진에 책임을 묻는 등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데, 산재는 주주권 행사 대상에서 소외돼있다.

국민연금이 의결권 등 일반적인 수단 외 추가적인 주주권을 행사하는 기준에는 중점관리사안이 있다. 해당 사안이 발생하면 경영진에 사실관계와 조치 사항 등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요구한다. 개선이 없을 경우 주주총회에서 이사 해임·선임 등 안건을 낼 수 있다.

현재 운영하는 중점관리사안으로는 투자 기업에서 산재가 발생해도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

국민연금이 세계 3위, 국내 최대 규모 연기금으로서,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산재에 대해 책임 있는 주주권 활동을 펼 수 있도록 중점관리사안을 손봐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국민연금이 투자한 국내 주식 규모는 약 132조원으로, 산재 우려가 큰 전자·자동차·건설 등 제조업 비중이 상당하다. 지난해 9월 기준 삼성전자 10.9%, 현대차 11.47%, 현대건설 10.32%, 포스코 11.43% 등 주요 대기업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은 “산업안전은 중대한 사회 문제”라며 “국민연금 주주 권한을 폭넓게 해석해, 산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재해, 52개 항목 중 하나로 관리…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에 미치는 영향 미미

현행 5개의 중점관리사안에서 산재가 반영되는 사안은 ‘ESG 등급 하락’이다. 환경(E)·사회(S)·지배구조(G) 분야의 13개 이슈, 52개 항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산출되는 등급이 2단계 이상 하락하면 국민연금이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한다.

산재 관련 항목은 사회 분야에 포함된다. 산업안전 이슈에 ‘산재다발사업장’ 항목이 있다.

산재 발생이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여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산재가 여러 차례 발생해야 산재다발사업장으로 지정되고, 지정된다고 해도 수십개 평가 항목 가운데 하나로 반영될 뿐이다.

중점관리사안에서 ESG 평가 결과를 제외한 나머지 사안은 임원 보수와 배당 등으로, 산재와는 관련이 극히 적다.

산재는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만큼, ESG 평가 지표에서 중점관리사안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이상훈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실행위원(변호사)은 “수많은 평가 요소 중 하나인 산재 관련 항목을 독립적 중점관리사안으로 뽑아 지정하는 건 국민연금 책임투자를 강화하는 데 있어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산재 발생은 해당 기업 재무 건전성에도 영향을 미쳐 국민연금 투자 건전성을 위협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586개 상장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사고재해율(전체 노동자 중 재해 노동자 비중)이 1% 증가 시 1인당 영업이익은 318~343만원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평균 1인당 영업이익이 약 3,535만원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사고재해에 따른 실적 타격은 적지 않은 수준이다.

산재 발생 기업은 현행법상 각종 제재를 받아 경영 차질이 불가피하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에 사고 재발이 우려될 때 작업 중지를 명령할 수 있다. 작업 중지 해제는 기업의 해제신청서 제출과 지방노동청 심의위원회 논의 등 절차를 거친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이 통과되고 있다. 2021.01.08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이 통과되고 있다. 2021.01.08ⓒ정의철 기자/공동취재사진

국민연금 산업안전 관리, 하청사 범위 확대해 법 사각지대 메워야

중점관리사안에서 ‘산업안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도 쟁점이다. 전문가들은 산재 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와 법적 제재에 따른 투자 위험 등을 감안하면, 국민연금도 법이 규정한 중대재해를 중점관리사안에 반영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설명한다. 산안법상 중대재해는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하거나 동일한 사고로 2명 이상이 다치는 등 경우를 이른다.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에서도 중대재해를 산안법과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다.

하청사에서 발생한 산재도 중점관리사안에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청사 등 공급망에 대한 관리 강화는 원청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업 안정성 측면에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는 게 세계적 추세다.

특히 한국에서는 ‘위험의 외주화’로 하청사 노동자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로 지적된다. 중대재해법도 원청에 하청사 산재 책임을 묻고 있다. 하청사에 대한 산재 예방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원청 경영진도 처벌 대상이 된다. 원청의 산재 관리 대상에 하청사를 추가하고 관리가 미흡할 경우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하청사에서 발생한 산재는 원청 대기업에도 재무적·비재무적 영향을 미친다. 가령 하청사 공장에서 산재가 발생해 생산이 중단되면 원청은 부품을 납품받지 못하게 된다. 기업 신뢰도가 낮아지고 생산이 지연될 수 있다.

국민연금이 중점관리사안에 산재 항목을 넣는다고 해도, 지분을 가진 상장사로 괸리 대상이 국한되면 책임투자 강화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대부분의 산재가 원청 대기업 일감을 받아 사업을 영위하는 중소규모 하청사에서 발생하는데, 비상장 중소기업은 국민연금 지분 투자 대상이 아니여서 산재가 발생해도 주주권 행사 조치가 이뤄지지 않는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보면, 2019년 산재 사망자 총 2,020명 가운데 300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1,665명으로 82%를 차지했다.

나현필 국제민주연대 사무국장은 “원청 대기업에 하청사 산재 발생 책임을 묻는 건 국제적 기준”이라며 “국민연금의 투자 기업에 대한 관리는 최소한 현행법 수준은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나아가 국민연금이 중대재해법 사각지대를 메우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중대재해법은 하청사를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사업장’으로 한정했는데, 법 집행 과정에서 원하청 관계 입증이 어려워 제도가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우려가 있다.

나 사무국장은 “중대재해법은 구멍이 많은데, 국민연금은 투자 기업에게 사각지대에 놓인 산업안전 조치를 요구할 수 있다”며 “국민연금 중점관리사안은 원청 대기업의 산재 책임 의무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 연기금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국민연금은 사회와 환경 분야 중점관리사안을 신설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당초 지난해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관련 회의가 연기돼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기준 기업 규모별 재해자 및 사망자
2019년 기준 기업 규모별 재해자 및 사망자ⓒ고용노동부

조한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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