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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바이크 타고
길 위에 사람들 바이크를 앗으려 하고 우우~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 바이크 타고
숲 속의 짐승들 시퍼렇게 불을 켜고 나를 노리네
하여 나는 불빛 따순 마을로도 가지 못하고
숲의 품에도 들 수 없네
타고 가는 시간 보다 메고 가는 길이 더 많은 이 길
그러나 이 길 두렵진 않아
눈물 흘리던 어머니 뿌리치며 떠나온 길
아~ 두려운 것은 또 두려운 것은 오던 길 돌아가 긴 줄에 서는 것
나 이 길 두렵지 않아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 지난다


위 노래는 '바위섬'이란 노래로 이름을 알린 김원중씨가 근 7년만에 낸 5집 음반 타이틀 곡 "나는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에 간다"라는 곡이다.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를 간다? 정말 가능하기나 한 걸까?

야성이 덜 빠진 사내의 눈빛은 형형했다. 그의 구렛나루 수염과 도시풍으로 정제되지 않은 말투는 '이 사내가 아직도 시베리아를 그리워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 대륙행단 한 사나이

탐험가 김현국 씨.


탐험가 김현국(42). 그는 세계 최초로 시베리아를 오토바이로 횡단한 인물이다. 그게 벌써 십년도 더 지난 96년의 일이다. 러시아 하바로브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장장 1만2000km를 국산 125cc 오토바이를 타고 횡단해버린 것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다다르다) 못 한다는 뜻이다. 그를 보며 단박에 떠오른 한자성어다. 궁금한 게 많았다. 늘 떠남을 동경하면서도 단 한 번도 늑대처럼 '도전'하며 떠나진 못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하필 시베리아였냐고, 왜 '함께'가 아니고 '혼자'였느냐고….

떠나지 않으면 만남도 없다

상처를 당해본 자만이 '떠남'이 절실해지는 모양이다. 그의 집안은 정읍에서 알아줄 정도로 부유했다. 그 넉넉한 재력으로 큰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야당 정치인을 후원했고 그를 정치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집안은 거꾸로 몰락의 길을 가파르게 탔다.

일제시대 때 대학까지 나온 아버지는 쇠락하는 집안만큼 함께 흔들리며 술에 의지했다. 가족들의 생계는 어머니의 몫이 됐다.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증오하는 벽은 높아만 갔다.

"십대 땐 '어서 집을 나가 돈 벌어서 리바이스 청바지 하나 사 입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집꼴이 너무 보기 싫었으니까. 87년 대학 들어가서 시위 현장에서 돌멩이도 던져보고 했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어요. 청년의 정열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어요, 다들 도서관에 앉아 취직공부만 했으니까…."

그는 그 안에 숨은 자신과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보고 싶었다. 군대도 1학년 1학기를 마치자마자 가버렸다. 그것도 남자로 제대로 훈련 받을 것만 같아서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제대 후 2년여 동안을 인도, 티벳, 네팔 등지를 떠돌며 살았다.

"인도에서 유럽인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십대 때부터 국경을 넘나들며 살았더라구요. 그런데 나는 네팔에서 국경을 넘을 때 빠르고 멀쩡한 큰길을 놔두고 시골길만 찾아 돌아 다녔어요. 한국에선 국경을 넘으면 간첩 취급 받았으니까요."

2년의 유랑은 그 안에 있던 두 개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자신감을 줬다. 아버지에게로 향했던 증오의 벽과 청춘을 가두고 있던 국경과 경계의 벽. 그는 몇 차례나 강조해서 말했다.

"인도에 갔기 때문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깨달은 것일 뿐이에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경계 너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 장소가 마침 인도였을 뿐이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과 진짜 하고 싶은 일, 혼자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정리가 됐다. "이력서 들고 남들과 똑같이 삼성 정문 앞에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일, 그게 그에겐 탐험이 된 것이다.

탐험가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 산악인은 많았지만 탐험가는 없었다. 경험을 축적해서 안내해줄 선배도, 정보도 없었다. 주제별로 루트를 잡고 관련 기초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바이크 타고 시베리아 대륙행단 한 사나이

탐험을 하며 찍었던 수 많은 사진들과 탐험에 대한 지도 등으로 가득한 그의 탐험문화연구소 내부.


말 그대로 탐험하듯 공부를 했다. 미술, 음악, 문학 등등. 지도를 펴놓고 탐험가들의 이동경로를 따라 가면서 해당 지역의 음악이나 문학, 미술 등을 공부한 것이다. 서서히 자신이 가야할 길이 보였고, 주제가 보였다. 그는 이동에 주목했다.

"나는 지구역사를 이동의 역사로 봅니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위한 이동으로 인해 헬레니즘 문화가 나오고 간다라미술이 나오고 그 문명이 신라 석굴암까지 영향을 미쳤거든요. 또 실크로드를 따라 수많은 상인들이 걸어서 이동하고 물자들이 이동했어요. 이동도 진화를 해서 나중엔 전화기를 통해 소리의 이동이 생기고, 디지털시대엔 인터넷 정보고속도로를 따라 가상과 현실이 같이 이동하는 시대가 됐어요."

인도와 네팔, 티벳의 국경을 놀이하듯 넘나들었던 그에게 반도는 너무 좁았다. 지도를 펼친 그의 눈에 대륙으로 가는 길이 들어왔다. 독립군 출신이었던 그의 큰아버지가 말 타고 내달렸던 길, 만주,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어쩌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눈에 유독 시베리아가 잡혀 떠나질 않았다. 안톤 체홉의 <시베리아 여행기>를 읽고 또 읽었다. 시베리아 바람이, 시베리아의 별이, 시베리아의 길이 그를 애타게 부르는 듯 했다. 그렇게 떠난지 어언 15년.

그는 다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올해 ‘디지털 실크로드 대장정’과 탐험관련 문화콘텐츠도 준비중이다. 정부 관계자들과 전국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탐험의 의미와 중요성도 알리고 있다. 탐험으로 그는 돈 한 푼 제대로 벌지 못했지만 그의 명함에는 버젓이 ‘탐험가’라고 씌어있다.

“2010년 디지털 유목민이란 주제로 교토에서 암스테르담까지 1년 4개월 동안 300명의 젊은이들과 탐험을 떠날 계획입니다. 그냥 놀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석유개발로 오염된 카스피해에서 환경캠페인을 벌이고, 중앙아시아에서 해비타트 운동을 하는 거죠. 이런 뜻있는 일을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동시중계해볼 생각입니다.”

그는 중앙아시아 국가에선 입국 수속중 강제 추방당하기도 했고, 비자 내기도 어려웠다. 고려인의 도움으로 겨우 비자를 받고, 러시아인 가이드를 앞장세워 바이칼호수까지 찾아갔다. 우랄산맥을 거쳐 흑해 인근에서 우크라이나로 달리다 교통사고로 탐험을 끝내지는 못했다.

“죽음과 두려움도 많았지만 그는 탐험의 의미를 알 수 있었습니다.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탐험이 필요한 것은 탐험이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치료를 마치고 도로 러시아로 달려가 현지에서 쌀장사를 했다. 미국쌀을 수입해다 파는 사업. 짬이 나는 대로 우크라이나, 그루지아, 키르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웬만한 중앙아시아국가는 답사를 마쳤다.

“탐험이 쉽다면 그게 탐험입니까. 탐험 경험은 훌륭한 콘텐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콘텐츠가 컴퓨터게임 등에 활용될 수도 있겠죠. 탐험은 그러고 보면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는 또 현재 탐험 체험에 관한 책을 집필 중에 있다. 그의 탐험에 대한 희망과 열정이 곧 현실로 계속 이뤄지길 인터뷰 하는 동안 내내 바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을 다시 찾아감을 물론 그의 탐험이 취업난과 '88만원 세대'에 이리 저리 치이는 안쓰러운 이 시대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많은 도전과 자극이 되길 소망하게 되었다.




< 기자 >
저작권자© 한국의 대표 진보언론 민중의소리
  • 기사입력 : 2010-03-31 11:45:12
  • 최종업데이트 : 2010-10-10 23: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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