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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석의 정의로운 에너지] 위험은 행정구역을 가리지 않는다

방폐장에서 더 가깝지만 의견을 내지 못한 울산 북구 주민들

2005년 경주, 군산, 영덕, 포항 등 4개 지역에서 중저준위 핵폐기장 선정을 위한 주민투표가 열렸다. 부안 핵폐기장 건설이 실패한 이후, 당시 노무현 정부는 중저준위 핵폐기장 선정을 위해 주민투표 시행을 결정했다. 이렇게 시작한 핵폐기장 주민투표는 불법·탈법 선거로 악명이 높았다. 각 지역마다 이장, 통반장뿐만 아니라, 공무원들이 적극적으로 핵폐기장 유치에 나섰다. 각 지역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식사나 기념품을 제공하거나 핵발전소 견학을 면목으로 관광을 시켜주는 일이 계속되었다. 또한 등기우편을 이용한 사전주민투표 신청서를 대신 작성하거나 통장, 반장들이 사전 투표용지를 모으러 다니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2005년 주민투표의 경우, 이런 허점 이외에도 쟁점화되지 못한 이슈가 있었다. 바로 주민투표의 범위와 관련한 문제였다. 당시 주민투표는 핵폐기장이 위치하는 기초지자체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핵폐기장 인근 지자체 주민들에게는 아예 투표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저준위 핵폐기장으로 선정된 경주의 경우, 핵폐기장 부지와 시내 지역이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핵폐기장은 경주 시내에서 떨어진 옛날 월성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월성군은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경주시와 통합되어 사라진 행정구역이지만, 경주시와 舊 월성군 사이에는 높은 산이 있고 거리 또한 멀어서 시내 주민들과는 심리적 거리가 있다. 흔히 ‘동경주 지역’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주민의 숫자는 시내 주민에 비해 적다. 따라서 주민투표에서 동경주 지역 주민들의 의견보다는 숫자가 많은 시내 주민들의 의견이 더 크게 작용할 수 밖에 없다. 반면 핵폐기장 부지와 울산광역시 북구는 8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 난 국도를 따라가면 경주 시내를 가는 것보다 울산 북구로 가는 것이 더 가깝기 때문에 이들 지역을 오가며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경주에서만 중저준위핵폐기장 건설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이 적절할까? 단지 경주시에 산다는 이유로 20km 떨어진 시내 주민의 의견은 받으면서 울산시에 산다는 이유로 8km 떨어진 울산 북구 주민들의 의견은 무시해도 될까? 이런 문제들이 2005년 주민투표 이전에 제기되었으나, 투표과정의 불법·탈법 논란이 더 크게 제기되면서 쟁점이 되지 못했다. 결국 경주에 중저준위 핵폐기장이 건설되었다.

지난 2005년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경주핵폐기장 주민투표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운데가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당시 반핵국민행동 사무국장)
지난 2005년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경주핵폐기장 주민투표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운데가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당시 반핵국민행동 사무국장)ⓒ뉴시스

임시저장고, 지역의견 수렴 범위를 둘러싼 논쟁

그간 핵폐기장을 둘러싼 논쟁은 주로 “지역주민들의 의견에 반해 계획을 추진하는 정부의 문제”로 요약되었다 1980년대부터 추진된 우리나라 핵폐기장은 모두 정부의 일방적인 계획 추진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차례 지역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우리 사회 민주화정도 또한 높아지면서 이제 “지역주민들의 반대를 무시한 핵폐기장 추진”은 더 이상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지역주민들이 건설여부를 결정한다면, 누가 지역주민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최근 고준위방폐물 관리정책 재검토를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는 기존 박근혜 정부가 수립한 고준위방폐물 관리계획을 재검토할 계획을 갖고 있다. 에너지정책 변화로 발생할 고준위핵폐기물의 양이 달라졌고, 2013년 진행된 사용후핵연료 공론화에 허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국민을 대상으로 중간저장이나 최종처분 같은 고준위방폐물 관리계획 전반의 내용을 논의하고, 핵발전소 부지안에 저장중인 임시저장고 증설 문제는 해당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물어 증설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핵발전소의 위치가 문제가 된다. 전남 영광에 위치한 영광(한빛) 핵발전소는 전북 고창군과 맞붙어 있고, 부산 기장군의 고리 핵발전소도 울산 울주군과 맞붙어 있다. 시군 경계와 떨어져 있는 경북 경주시의 월성 핵발전소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내권보다 인근에 있는 울산 북구가 더 가깝다. 따라서 임시저장고 증설 여부를 해당 지자체 주민들에게 물을 경우, 핵발전소 인근에 거주하지만 배제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

고준위핵폐기물 임시저장고의 수명은 통상 50년이다. 핵발전소의 수명이 30~60년임을 고려할 때 임시저장고는 핵발전소만큼 오랫동안 운영된다. 임시저장고는 핵발전소 폐로 이후에도 계속 운영되기 때문에 중간저장이나 최종처분 부지를 찾지 못할 경우, 임시저장고가 사실상 핵폐기장으로 변할 가능성도 많다. 즉 현재 해체 준비를 하고 있는 고리 1호기의 경우 핵발전소 가동은 멈췄지만, 2020년대 중반 임시저장고가 건설될 경우 최대 2070년대까지 고준위핵폐기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고리 1호기는 폐쇄되지만, 고준위핵폐기물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계속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서울 중구 명동 한국YWCA회관 앞에서 '정의로운 에너지전환, 시민의 힘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제200차 탈핵 불의날 캠페인에서 참가자들이 핵발전소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서울 중구 명동 한국YWCA회관 앞에서 '정의로운 에너지전환, 시민의 힘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제200차 탈핵 불의날 캠페인에서 참가자들이 핵발전소 반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뉴시스

행정구역에 얽매이지 않고 폭넓은 의견 수렴 필요

인구 밀집도가 다른 대도시 주민과 농어촌 지역 주민의 안전이나 권리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모두 소중하게 지켜야할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국민이라면,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단지 살고 있는 행정구역이 다르다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차별이자 불평등이다.

물론 핵발전소와 핵폐기장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일수록 이들 시설에 의한 영향을 작을 수 밖에 없다. 또한 행정구역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입는 피해도 있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의 문제가 발생하면 소재지의 농수산물이 적게 팔린다든지 관광객이 줄어드는 등 피해가 더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면에서 의견 수렴을 할 때, 핵시설 소재 지자체가 갖고 있는 특성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인근 지역 주민들의 권리를 제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는 주로 행정구역 구획을 중심으로 제한되어 왔다.

그러나 행정구역은 인위적으로 설정한 ‘가상의 선’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험은 결코 행정 구역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지역주민들의 권리와 선택 역시 행정구역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핵시설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에 동의 한다면, 이제 누구의 의견을 어떻게 모을 것인가라는 더 구체적인 고민을 진행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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