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만민보] 현직 역사 교사의 국경을 넘나드는 ‘진짜 평화만들기’
없음

학창시절 역사교과서는 암기해야 할 숙제 더미였다. 얼마나 잘 외웠느냐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다. 심지어 이른바 '평균'을 깎아 먹지 않기 위해서는 만점을 받아야 본전인 과목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정복의 연대를 달달 외우고, 교과서에 묘사된 전쟁영웅의 일대기는 TV 드라마에서 각색된 내용과 비교하며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근현대사 교과서는 고난의 역경을 딛고 대단한 도약을 거둔 작은 나라의 성공스토리였다. 그 완벽한 기승전결 역시 달달 외워야 했다. 무엇이 빠졌는지는 학습의 대상이 아니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던 그 역사는 누구의 기억이었을까.

이 질문에 전쟁과 폭력에 기반한 '국가의 기억'이라고 답하는 일선 교육현장의 역사 교사가 있다. 조정아 일산동고등학교 교사는 학생들로 하여금 국가중심의 관점으로 교육되는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생각이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평화감수성'을 역사교육의 핵심 요소로 설명한다. 국적을 떠나 평화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면서 자신과 주변의 환경을 성찰하고, 평화를 삶의 최우선 가치로 여겨 평화를 만드는 일에 일상적으로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육현장이 꼭 학교일 필요는 없다.

평화교육이란

조정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청소년위원장(일산동고등학교 교사)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정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청소년위원장(일산동고등학교 교사)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평화란 무엇일까. 결론이 날 수가 없는 거잖아요. 평화를 지향한다는 건 답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평화교육'은 시작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국가중심의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그러한 고민에 대해 토론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죠."

조정아 교사는 학교 교실 외에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이하 아시아연대)에서 청소년위원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연대는 국내외 교과서의 역사왜곡을 바로잡고, 20세기 침략과 저항의 역사에 대한 아시아 공동의 역사인식을 만들기 위해 2001년 4월 시민사회단체와 학자, 교사 등이 모여 결성한 조직이다.

아시아연대의 활동은 2001년 일본 우익의 침략적 관점을 반영한 '후소샤 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형성된 동아시아 역사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토대로 시작됐다. 특히 한국과 일본 내 양심적 시민사회의 연대를 통해 평화교육을 진행하는 청소년 캠프를 진행했으며, 이후 중국에서도 결합해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가 만들어졌다. 일명 '평화캠프'로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벌써 올해로 18회를 맞는다.

"평화캠프는 내용면에서 국가에서 가르치지 않는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을 목표로 해요. 한·중·일 모두 근현대사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있거든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드러낸 뒤 나타나는 인식의 차이를 인정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세 나라 학생들이 부르는 표현과 관점,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학생들도 자기 나라에서 배운대로 인식하고 얘기를 하거든요. 그들은 토론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차이를 확인하고 그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죠.

2002년 서울 근현대사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으로 처음 시작된 평화캠프는 해마다 한·중·일 세 나라에서 번갈아가며 열린다. 각 나라당 40명씩 총 120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데, 통상 중2~고3 연령대다. 조 교사는 한국 충남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주제로 진행된 2014년(13회) 캠프부터 참여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캠프가 한·중·일 학생들에게 특정 사건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인식의 차이점을 인식하면서 평화 지향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피스메이커' 만들기

지난 2017년 7월 서울에서 진행된 ‘서울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길을 걷다’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난 2017년 7월 서울에서 진행된 ‘서울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길을 걷다’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지난 2018년 8월 중국 장춘에서 진행된 ‘장춘에서 생각하는 역사와 평화’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난 2018년 8월 중국 장춘에서 진행된 ‘장춘에서 생각하는 역사와 평화’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캠프의 내용은 먼 과거의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2017년 평화와 민주주의의 길을 걷다'라는 주제로 열린 캠프에서는 그해 정권을 바꾼 촛불항쟁이 벌어진 광화문광장 답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조 교사는 당시 일본과 중국 학생들 사이에서 '정말 놀랍고 감동적'이라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고 떠올렸다. 특히 용산 전쟁기념관 '낯설게 보기'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의 반응은 흥미롭다.

"전시실 여기저기 적힌 글 중 '평화로울 때 전쟁을 대비하라'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나는 사실 이 말에 반대한다. 평화로울 때는 평화를 마음껏 만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화로울 때 전쟁을 준비해 언제든 싸울 수 있게 되는 것은 결국 평화를 끝내는 데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벽면에 적힌 문장 하나까지 꼼꼼하고 낯설게 보려고 노력해보니 여기가 정녕 내가 자주 왔던 전쟁기념관이 맞나 싶었고 색달랐다." - 2017년 캠프 한국 학생대표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서 ‘낯설게 보기’라는 활동을 했다. 처음에 이 활동을 할 땐 매우 어색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전쟁에 대한 나의 관점들은 이미 고정되어 있었는데 내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는 게 매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씩 천천히 내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으로 역사를 보니 매우 신기했다." - 고등학교 1학년 학생

조 교사는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최근 전쟁기념관 한국전쟁 전시의 문제점을 짚는 한 토론회에 참석해 평화캠프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다.

"역사 교사로서 평화교육을 어떻게 잘할 수 있을까 항상 고민이 되죠. '평화'라는 게 추상적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한·중·일 학생들의 만남이 축적되면서 나중에는 이 학생들이 커서 각자 '피스메이커'(Peace Maker) 역할을 자기 나라에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씨앗을 뿌리는 일이죠."

실제 조 교사는 최근 정말 뿌듯한 경험을 했다. 제1회 캠프에 참여한 한 학생이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한 뒤 일본에서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를 제기하는 시민단체 활동가가 된 것이다. 그 학생은 2016년 일본 홋카이도 강제징용 피해 현장에서 캠프를 진행할 때 조력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 교사를 비롯한 아시아연대는 참여 학생들의 삶에서 시작해 한 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오는 활동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평화의 능력' 길러주는 교육하기

지난 2016년 8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진행된 서울에서 진행된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배우고 미래를 만들자’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난 2016년 8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진행된 서울에서 진행된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배우고 미래를 만들자’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지난 2016년 8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진행된 서울에서 진행된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배우고 미래를 만들자’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
지난 2016년 8월 일본 홋카이도에서 진행된 서울에서 진행된 ‘홋카이도의 역사와 문화에서 배우고 미래를 만들자’ 한·중·일 청소년 역사체험캠프ⓒ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올해는 일본에서 '동아시아의 화해와 핵 없는 세계로의 길'을 주제로 캠프가 진행되는데, 내년엔 한국전쟁 70주년을 주제로 판문점에서 하고 싶어요.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고 진정한 동아시아 평화를 얘기하자는 거죠. 가능하면 개성까지도 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평화체제로 나아가는 데 큰 전환점이 되는 행사가 될 수도 있잖아요. 언젠가 한·중·일 뿐만 아니라 북한, 재일조선인, 대만 학생들도 다같이 모여야 진짜 '동아시아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조 교사와 아시아연대가 흘린 땀방울은 어느새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시아연대가 주도하고 한·중·일의 학자 및 시민단체가 참여해 3국을 순회하는 '동아시아 역사인식 공유를 위한 국제연대활동'은 평화주의 확산을 위한 국제연대의 또 다른 모범으로 평가를 받는다. 지난 2005년 한·중·일이 참여한 최초의 동아시아 역사교재 '미래를 여는 역사'를 출간한 데 이어 꾸준한 출판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서울시교육청의 후원도 받고 있다.

"역사의 서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국가나 학자들만의 몫이 아니기 때문에, 시민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에서 우리의 활동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서부터 평화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하는 거죠.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대화하는 과정에서 차이점을 인식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온 사람들의 만남 자체를 계속 유지하도록 하는 게 정말 필요한 역할인 것 같아요."

조 교사가 활동을 진행하면서, 교실에서 수업하는 모습도 이전과는 달라졌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도 교과서를 잘 요약한 뒤 도식화해서 지식을 잘 전달하고 습득하는 것만이 교사의 훌륭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교과서의 내용이 역사의 전부라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가 왜 역사를 가르치나' 하는 고민이 들었고, 활동을 통해서 자신도 좁은 인식 속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이제 그는 학생들에게 '평화의 능력'을 길러주는 것, 평화의 관점에서 전쟁과 갈등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는 방법을 일상적으로 고민한다.

"개인이 공부를 잘해서 앞서나가는 것과, 공동으로 형성해가는 지식은 그 방향성부터 달라요.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모두가 평화를 누리면서 같이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도록 하는 데 교육의 필요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식이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고민하게끔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조정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청소년위원장(일산동고등학교 교사)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조정아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청소년위원장(일산동고등학교 교사)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신종훈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