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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일류대학 졸업장보다 값진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 수료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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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꾸물문화학교 수료증
꾸물꾸물문화학교 수료증ⓒ꾸물꾸물문화학교

프랑스어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박의 마크, 범상치 않은 교장의 사인까지. 일류대학 졸업장 부럽지 않은 이 수료증의 정체는 ‘꾸물꾸물문화학교(Cumool Cumool Culture School) 동네예술대학’ 수료증이다. 이 대학의 1년 과정을 모두 마치면 꾸물꾸물문화학교 교장이 직접 이 수료증을 수여한다. 비용은 무료다.

대학 이름에서 오는 소박함에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대학 교육과정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그렇지가 않다. 학생부터 청년, 어르신들까지 이 학교 수업을 접한 이들은 푹 빠져든다. 정식 교육기관도 아닌데, 초등학교 때부터 다니기 시작해 성인이 되어서도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성인 중에선 3년 동안 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어르신도 있다. 또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수시로 학교 교장을 찾는다. 군대에 가서도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교장에게 연락한다.

교장은 학생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모두 세세하게 알고 있다. “△△이는 원래 체육선생님이 꿈이었어요. 근데, 사진수업을 들으면서 관심을 보이더니, 푹 빠지더라고요. 고3 올라갈 때쯤, 얘 진로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기도 했어요. 부모님도 동네예술대학을 나와서 잘 알았죠…”, “○○이는 어렸을 때부터 뮤지컬 등 어머니가 이것저것 많은 걸 배우게 했어요. 다만, 한 가지를 오랫동안 하진 못했죠. 그런데 얘가 애들과 노는 것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했어요. 리더십도 있고, 학교 회장도 하고. 이 친구 대학 갈 때도 어떤 진로를 택할지 함께 고민…”

학교 교장의 학생들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르다. 학교 교장은 “근처 학교 학생회장들이 이 학교 출신에서 나오는가 하면, 대학에 가서도 선배들이 이 친구들에게 기획 일을 배운다”며 아이들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꾸물꾸물문화학교가 설립된 지는 곧 10주년이 된다. 보통의 애정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까 싶다. 이쯤 되면, 학교 교장이란 사람과 교육 내용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 학교를 이렇게 애틋하게 운영하는 것일까?

윤종필 꾸물꾸물문화학교 교장
윤종필 꾸물꾸물문화학교 교장ⓒ윤종필 교장

꾸물꾸물문화학교 교장

지난 20일 인천광역시 중구 중앙동에 위치한 꾸물꾸물문화학교를 찾았다.

1호선 종착역인 인천역에 내려서 차이나타운과 고즈넉한 근현대건물들을 따라 20여분 걷자, 4층짜리 건물 1층에 독특한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얼룩무늬 지렁이 한 마리가 꾸물꾸물 기어가는 모습의 이미지와 학교 이름이 새겨진 간판이다. 학교 입구엔 미술재료(진흙, 판화지 등)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문을 열자, 한 남성이 마중 나왔다. 윤종필 커뮤니티 아티스트였다.

꾸물꾸물문화학교를 운영하고 있어 ‘교장’ 또는 ‘선생님’이라고도 불리지만, 각종 문화예술교육을 기획하기 때문에 문화기획자 또는 문화예술교육기획자로도 불린다. 또 중앙대에서 예비교사를 상대로 문화예술 관련 강의를 하고, 인하대·대진대 문화예술교육원에서 문화예술교육사 2급 자격증 강의를 맡고 있어, ‘교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수많은 호칭으로 불리는 그지만, 정작 본인은 본인을 ‘커뮤니티 아티스트’라고 규정하고 있다.

‘커뮤니티 아티스트’라는 생소한 직업군의 그가 하는 일이란, (공동체 문화를 상실한) 사람들에게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그 속에서 삶의 활력과 예술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이다.

주민들이 공동 판화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주민들이 공동 판화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꾸물꾸물문화학교

각 구청장 방에 걸릴 마을주민들의 걸작..“이런 게 창조경제”

요즘 그가 주력하고 있는 일은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과 미추홀학산문화원에서 진행하는 ‘대형 공동 판화작업’이다. 이는 동네 주민들과 함께 그들이 살아온 동네를 목판화로 그리는 작업이다.

윤종필 교장은 한국에서 조형예술과를 나왔지만, 판화를 복수전공 하다시피 하여, 프랑스 유학 시절 대학에서 강의를 맡을 정도로 판화에도 전문적이다. 이런 능력을 활용해 2017년부터 그는 판화수업을 받고 싶은 주민들을 상대로 개인 판화작업을 지도해 주고, 수업을 받는 주민들과 함께 각 구별 동네를 그리는 공동 판화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꾸물꾸물문화학교에서도 주민들이 직접 조각칼로 깎아낸 판화작업들을 엿볼 수 있었다. 작업실 복도 한쪽 벽면엔 인천 중구를 상징할 수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과 홍예문, 공자상, 답동성당 등이 새겨진 커다란 공동작품(개항장 연대기)이 세워져 있었고, 작업실 벽면에도 부평구를 배경으로 한 공동작업이 놓여 있었다. 전자는 이미 완성된 작품이었고, 후자는 미완성 된 작품으로 매주 일요일마다 주민들이 작업실을 찾아 작업 중인 따끈따끈한 신작이었다. 작품에선 부평구를 상징하는 강제징용 노동자상과 부평깡시장, GM 자동차의 전신 새한자동차 공장 등이 조각칼로 파낸 강렬하고 거친 선들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 동상과 홍예문 등 인천 중구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그려넣은 대형 공동판화 작품.
맥아더 장군 동상과 홍예문 등 인천 중구를 상징하는 상징물을 그려넣은 대형 공동판화 작품.ⓒ꾸물꾸물문화학교
윤종필 교장은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에서 커뮤니티 판화 수업을 통해 주민들과 대형 공동판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윤종필 교장은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에서 커뮤니티 판화 수업을 통해 주민들과 대형 공동판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꾸물꾸물문화학교

어림잡아도 길이는 성인 키를 훌쩍 넘었고, 높이도 허리만큼 높았다. 매우 숙련된 판화가도 작업을 완성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대형 작품’이었다. 10여명 정도의 주민들 달라붙어서 함께하기에 가능한 작업이었다.

목판화는 보통 완성까지 오랜 시간 중노동이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일단 완성하면 도장처럼 계속해서 찍어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에 완성된 작품은 작업에 참여한 주민들의 수만큼 찍어서 나눠 갖는다고 한다. 다만, 작품이 워낙 커서 종이에 찍어내는 작업도 여럿이 함께 달려들어야만 한다고. 해당 작품을 찍어낼 만한 프레스기기가 없어, 직접 주민들이 프레스기기가 되어 발로 찍어낸다고 그는 설명했다.

완성된 작품은 인천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행사나 축제, 프로그램의 마지막 과정인 과제전 등을 통해 전시된다. 윤 교장은 “처음엔 중구를 찍었고, 다음엔 인천을 모티브로 하나 찍고, 올해는 부평구를 찍으려고 한다. 우리(주민)들끼리 농담으로, 이렇게 구별로 다 찍어서 각 구청장 방에 팔아보자는 얘기도 한다. 이런 게 ‘창조경제’ 아닐까 싶다”며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낄낄)로 웃었다.

비슷한 콘셉트로 윤 교장은 미추홀학산문화원에서 미추홀구 주민들과 함께 ‘동네, 살아지다’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살다’와 ‘사라지다’의 중의적인 표현으로 사용한 ‘동네, 살아지다’는 재개발로 사라지는 미추홀구 지역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를 위해 윤 교장은 사진작가를 초청해 주민들과 함께 사라질 건물과 마을의 풍경을 아카이빙(archiving, 특정 기간 필요한 기록을 파일로 저장 매체에 보관해 두는 일)했다. 이를 소재로, 주민들과 대형 공동판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주민들은 수십 년을 살아온(사라질) 마을을 이웃들과 함께 목판에 새겨 기념하고 소장한다.

물론,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대학엔 판화수업만 있는 게 아니다. 교장이 직접 가르치는 수업이 판화이고, 이 외에도 필름사진기로 사진을 찍고 암실에서 직접 인화해 보는 흑백사진 수업(이기본 작가), 직접 흙으로 일상 속의 다양한 소품과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보는 생활도예 수업(이반디 작가), 드로잉과 회화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일상을 그려나가는 일상드로잉 수업(안다혜 작가), 명화와 함께 우리들 삶의 현안을 확인하고 나만의 명화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명화의사회사 수업(공주형 미술평론가) 등이 매주 금·토·일 열린다.

수강생 중에는 부부가 함께 수업을 들으러 오는 이들도 있고, 멀리 1시간이 넘는 계양에서 매주 수업을 놓치지 않고 참가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5개 수업을 모두 듣는 이도 있다.

‘공동체’와 ‘삶’을 되찾아가는 이들
예술을 통해 지역과 소통하는 아이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게 되는 것일까?

꾸물꾸물문화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매주 진행한 수업내용들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이 기록들을 살피다 보면 수업을 듣는 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고 대화하는 모습, 전시회를 기념해서 함께 사진을 찍은 모습 등을 볼 수 있는데, 오랫동안 함께 한 이웃처럼 가까워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수업을 진행하는 작가들과 학생들의 모습도 꽤 가까워 보인다.

사실 주민들과 지역의 예술가가 만날 수 있는 자리는 그리 많지가 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주민들은 예술가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조차 없다. 꾸물꾸물문화학교의 첫 번째 역할은 분절된 이들이 모일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주민들은 어려운 예술가들을 응원하는 작은 후원자가 되기도 하고, 생일날 함께 미역국을 끓여먹는 이웃이 되기도 한다. 그럼, 예술가는 외롭게 불태웠던 창작 혼을 주민들과 함께 나누며 삶의 또 다른 활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시너지 효과 외에도 꾸물꾸물문화학교가 걸어온 길을 보면, 기존의 학교나 교육시스템이 채워줄 수 없는 문화예술교육을 수행하기도 한다.

한 예로, 윤 교장이 꾸물꾸물문화학교를 만들기 이전 단계로 진행했던 ‘홍예문 프로젝트’가 그렇다. 윤 교장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주로 영화감독·미술작가·사진작가·디자이너와 어린 학생들과 함께 ‘마을을 노상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마을의 지형지물을 보고 직접 대형 지도를 만들어 보고, 마을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 스토리가 있는 사진 및 영화를 찍거나, 할머니들이 수다를 떠는 공간에 설치할 벤츠를 디자인해보는 식으로 프로젝트가 전개됐다.

이 프로젝트를 하려면, 우선 아이들이 직접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절차부터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했다. 자신을 소개할 수 있는 이력서를 쓰게 하고, 이를 작게 프린트하여 명함으로 만들어준 뒤, 사람들을 만날 때 명함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해주는 방식이다. (물론, 어린 학생의 이력서가 완벽할 순 없다. ‘나는 떡꼬치를 좋아합니다’ 등의 문구도 등장한다고)

“한 학생이 주위의 어른을 만나러 가는 일종의 사회적 활동입니다. 사회적 관계망을 트는 문제인 거죠. 단순히 어린이의 학습활동으로 볼 게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거기엔 예의가 필요하기도 하고,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냥 왔는데요’라면서 물어보는 것 보다, ‘저는 누구입니다’ 소개를 하고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죠. 문화예술교육이란 것은 이런 절차와 형식을 교육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놀랍다.

홍예문 프로젝트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이 직접 디자인 한 벤츠들.
홍예문 프로젝트에 참여한 초등학생들이 직접 디자인 한 벤츠들.ⓒ윤종필 교장 제공

아이들은 동네를 거닐다가 할머니들이 길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곤, 그곳에 벤츠를 하나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뒤, 디자이너와 함께 다양한 벤츠 디자인을 해본다. 그 결과, 파라솔이 달린 ‘자동차 벤치’, 범죄 발생을 예방하는 ‘방범 벤치’, 팝아트적인 ‘핫도그 벤치’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윤 교장은 이 중 하나 정도를 구현시켜주고 싶어서 구청 공무원과 협의를 해 봤지만, 아쉽게도 잘 안됐다는 후문)

또 인천 중구 용동에 있는 한국 최초의 미학자 ‘고유섭 생가터’와 일제 강점기에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했던 ‘권번 자리’, 근처 유명한 칼국수 집 등의 사연을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각색하여 스토리가 있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홍예문 프로젝트에 참가한 아이들의 결과물이다. 아이들은 한국 최초 미학자 고유섭의 이야기를 각색해 스토리가 있는 사진작업 결과물을 내놓았다.
홍예문 프로젝트에 참가한 아이들의 결과물이다. 아이들은 한국 최초 미학자 고유섭의 이야기를 각색해 스토리가 있는 사진작업 결과물을 내놓았다.ⓒ윤종필 교장 제공

“당시 기생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연예인과 비슷한 개념이었죠. 이런 역사적인 배경지식을 공유하고, 고유섭은 어떻게 미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 얘기를 나눕니다. 그러면, 애들에게서 잡다한 얘기가 나와요. ‘어렸을 적부터 연예인을 봤으니, 그런 것에 대한 끼가 발달하지 않았을까’하는 거죠. 스토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고유섭이 성장하면서 당시 기생과 연애를 했을 수도 있다’면서. (사진을 가리키며) 이게 사귀는 장면이에요. (웃음)”

아이들은 이렇게 근처 보건소 앞에 있는 꽃 화분을 들고, 고유섭이 기생에게 꽃을 선물하는 사진을 찍고, 근처 오래된 칼국수 집에서 데이트하는 장면 등을 찍었다. “‘우리 동네에 이런 인물과 권번이 있었다’와 ‘우리 동네는 칼국수가 유명해’ 정도만 알아도, 이런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이렇게 홍예문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어린 학생들은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꾸물꾸물문화학교를 다니며,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한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과 함께 버려진 담벼락에 픽셀아트를 남기거나, 영화감독과 함께 ‘스마트 워리어’라는 블랙코미디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한다. 갈고닦은 목공 실력으로 버려진 유휴지에서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대지미술 작가 뺨치는 작품을 내놓는다. 또 가을 ‘추’(秋)자에 힘쓸 ‘노’(努)자를 이용해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추노) 이름과 똑같은 가을운동회를 기획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얻게 되는 기획력과 상상력은 학생들의 대학 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12월 3일 열린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 과제전 '호모 크리에이터 시대'(Homo Creator Era)에서 수업을 모두 이수한 학생들이 수료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3일 열린 꾸물꾸물문화학교 동네예술대학 과제전 '호모 크리에이터 시대'(Homo Creator Era)에서 수업을 모두 이수한 학생들이 수료증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꾸물꾸물문화학교

주민-주민-예술가 사이에 두터운 관계 형성

꾸물꾸물문화학교가 세워진 뒤에는 성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생겨났다. ‘생활의 발견’이 대표적이다.

‘생활의 발견’에선 주민들이 학예사가 되어 결혼사진이나 첫사랑·결혼 이야기를 모아보기도 하고, 민속박물관 학예사들이 하는 것처럼 멤버 중 한 사람의 집을 방문해 살림살이를 조사해보는 일도 한다.

“누군가의 집에서 1번, 2번, 3번, 4번 벽으로 나눠놓고 각각의 벽에 있는 물건들을 조사해보면, 놀랍게도 그 살림살이가 그려집니다. 예를 들어, 안방에 TV와 장이 있고 그 뒤쪽에 무좀약이 있다고 치면, 그 무좀약이 놓인 위치만으로 다양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거죠. 서랍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는 건 자주 사용한다는 것이고, TV 뒤에 살짝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눈에 띄기는 싫은 심리가 반영된 것이죠.”, “물건 중 새로 구매한 게 아니라 부모와 가족 간 주고받은 게 많다면, 우애가 깊다고도 볼 수도 있죠.”

이런 활동을 함께 하다 보면, 몰랐던 자신과 가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 서로를 알아가기 때문에 몰랐던 이웃끼리도 관계가 두터워지고, 지역의 예술가와 주민들 간에도 신뢰가 쌓인다.

“문화예술 활동을 경험해 보지 못한 분들은 어려울 수 있어요. 그래서 처음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을 많이 해요. 특히 ‘남편이 자꾸 넌 오늘 가서 무얼 발견했냐’고 물어본다고 하죠. 근데 ‘자기도 무얼 발견했는지 모르겠’데. (장난기 가득한 웃음) 그게 첫해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었죠. 두 번째 해에도 잘 몰라요. 그런데 첫해 전시가 끝난 뒤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따라 가보면 먼가 된다’는 신뢰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윤 교장이 유학 시절, 진행했던 핑크아트프로젝트 패션쇼의 한 장면. 가장 왼쪽에 핑크 정장을 입고 있는 장발의 남성이 학생 시절 윤 교장이다.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이 제레미와 줄리앙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이가 전임교수다.
윤 교장이 유학 시절, 진행했던 핑크아트프로젝트 패션쇼의 한 장면. 가장 왼쪽에 핑크 정장을 입고 있는 장발의 남성이 학생 시절 윤 교장이다.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이 제레미와 줄리앙이고, 가장 오른쪽에 있는 이가 전임교수다.ⓒ윤종필 교장 제공

“나의 부족함에서 시작된 일”
‘그룹 3J’와 교수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들

사실 이런 그의 활동들은 프랑스 유학 시절 겪은 경험들이 토대가 됐다.

국내에서 한 예술대학의 조형예술과 학부를 졸업한 그는 98년경 프랑스 유학행을 결심했다. 언어조차 서툴렀던 그는 학생들 사이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했는데,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학교 교수의 도움 덕분”이라고 말했다.

유학 시절, 그는 주로 1년 단위 프로젝트형 아트 작업을 많이 했다. 그렇다보니, 주로 동료들의 협력과 도움이 많이 필요로 했다. 다행히도 그의 옆엔 항상 제레미와 줄리앙이란 친구들이 있었다. ‘종’필이, ‘제’레미, ‘줄’리앙의 앞 글자를 따서 이 셋의 모임을 ‘그룹 3J’(Groupe 3J)라고 불렀다고.

셋은 윤 교장이 우연찮은 계기로 이들에게 실크스크린 및 판화기법을 알려주면서 친해지게 됐다고 한다.

두 친구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한번은 윤 교장이 ‘핑크아트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각종 핑크색 옷을 디자인하여 패션쇼를 벌인 적이 있다. 이때 이 친구들의 인맥이 총 동원되기도 했고, 본인들의 개인 작업처럼 성심성의 것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도 했다.

무엇보다 전임교수의 역할이 컸다. 나이 지긋이 든 전임교수는 윤 교장이 디자인한 쫄쫄이 핑크색 티셔츠를 입고 기꺼이 핑크아트프로젝트 패션쇼 모델로 서주었다. 또 윤 교장의 패션쇼 및 전시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직접 학생들과 함께 무대를 설치하는 스태프를 자처했고, 무대감독이 되기도 했다. 한국에선 교수가 학생의 작업을 이런 식으로 돕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시 만난 전임교수는 이같이 탈권위적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윤 교장 입장에선 매우 고마우면서도 난감한 상황이 발생키도 했다.

“패션쇼에서 ‘사운드 작업’이 필요해서 그런 작업을 하는 친구에게 이 일을 맡겼어요. 그랬더니, 우리 교수님이 그 친구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패션쇼를 하는 건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니, 소리 때문에 망칠 수 있겠냐, 내가 소리를 한 번 들어봤으면 좋겠다’라고요. 보통 이러면, 한국에선 학생들이 ‘예예’하기 마련인데, 여긴 달라요. ‘그걸 네가 왜 들으려 하냐, 내가 알아서 한다, 종필이가 내게 맡길 일이다, 내가 네 과제를 하는 게 아니지 않냐’라며 둘이 나를 놓고 싸우는데, (아우) 난감했어요. 고맙긴 한데…”

이렇게 참여한 동료 학생 중에는 뒤풀이하라고 금일봉을 내놓는 이도 있었다. 윤 교장은 이런 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이조차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 돈으로 맥주와 와인 등을 구매하고선 그곳에 핑크라벨을 만들어 붙여 뒤풀이 파티 때 사용한 것이다.

“거창한 예술로 만들겠다는 것보단, 놀이였죠. 어떻게 하면 이들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까 하는. 처음엔 말도 잘 안 통하고 그랬는데, 어울려주고 동조해주고 참여해주고 그런 것들이 정말 고맙고 좋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마 작품 크레디트(credit)에 그 친구들을 스폰서로 넣기도 했어요.”

그의 ‘핑크아트프로젝트’ 도록 맨 뒤엔 당시 참여했던 학생들과 교수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서로 돕던 일들이 공동의 작업이 되고, 커다란 1년 단위 프로젝트로 완성이 됐던 것이다.

“결국엔 나의 부족함에서 시작된 것 같아요. 먼가를 해야 하는데, 혼자선 힘들고, 각자 장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해내는 과정을 겪어 보면서, 점차 여럿이 함께하는 ‘프로젝트 아트’를 하게 된 거죠.”

이렇게 시작된 그의 활동은 귀국하고 나서도 이어졌다. 2005년 8월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공공미술프로젝트와 문화예술교육에 관심을 기울이며 경기도 안양과 안산, 인천 등지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대표적인 활동이 단원고 학생들과 함께한 ‘국경없는마을 RPG’, 인천에서의 ‘우리동네고고씽 RPG’ 등이다. 다만, 유학 시절 프로젝트와 달라진 게 있다면, 이런 활동에 ‘공동체 문화’, ‘이주민 문제’, ‘문화예술교육’ 등 사회적인 영역이 결부됐다는 점이다.

커뮤니티 판화 수업 중인 윤종필 교장
커뮤니티 판화 수업 중인 윤종필 교장ⓒ기타

“먹고 살기 위한 일은 아니죠”

윤 교장의 이런 활동들은 개인의 수익과는 관련이 없는 일들이다. 꾸물꾸물문화학교 수업도 따로 수업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수익이 생길 수 없는 구조다. 재료비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들의 강사료 등의 운영비는 각종 공모사업을 통해 얻은 기금으로 충당했다. 또 개인이 대학 강의와 각종 문화사업에 조언하는 전문위원 등으로 참여하면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기금을 사용하는 일이기에, 번거롭고 엄격해야 하는 일도 많다. 그래서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변수에 항상 긴장하게 되고, 미리 조율할 수 없는 상황으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때문에 그는 건강을 많이 잃기도 했다.

그렇게 그가 한국에서 활동해 온 지 어느덧 14년이 지났고, 꾸물꾸물문화학교는 10년이 다 되어간다.

“먹고 살려는 이유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내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에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만한 보람도 있었던 것 같고요. 아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동네에선 ‘윤종필’이라고 하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정도는 알게 됐어요. 또 여기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제자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이날 인터뷰 말미, 그의 꾸물꾸물문화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 대한 추억과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초등학교 때부터 활동한 그 친구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제게 고민 상담을 많이 해요. 어머니에겐 얘기 못 하겠고, 제게 하고 싶다며 여자 친구와 헤어진 이야기를 토로하곤 합니다. 얼마 전 미대에 들어간 친구도 있는데, ◇◇◇고를 다닐 때부터 제가 연애상담을 다 해줬어요…(생략)…”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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