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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견디는 이의 고백, 새로운 싱어송라이터의 출발
천용성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
천용성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제공 = 천용성

음반 커버부터 얘기해보자. 음식을 차린 밥상 앞에 민소매를 입은 여성과 기저귀를 입은 듯한 아이가 앉아있다. 여성은 아이를 보고, 상에서 조금 떨어진 아이는 카메라를 보며 웃는다. 그 사이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문구가 그 즈음의 글꼴로 쓰여 있다. 사진 곳곳에는 노랑, 분홍, 녹색의 동그라미들이 떠 있다. 사진 아래 88 8이라는 숫자도 보인다. 사진기에 날짜를 설정해두면 그 날짜가 찍혀 나오던 시대의 흔적이다. 왠지 사진을 찍은 때가 1988년 8월이고, 아이는 음반의 주인공 천용성일 것 같다. 그리고 곁에 있는 여성은 그의 어머니일 듯하다. 음반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는 인상을 주는 커버 디자인이다.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의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의 음반 커버이다.

‘김일성이 죽던 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체감할 수 있는 노래

2012년부터 2013년까지 꾸준히 싱글을 발표해온 천용성은 2019년에야 첫 번째 정규 음반을 내놓았다. 모든 예술가들에게 마찬가지일 텐데, 데뷔작은 예술가의 원형을 담는 경우가 많다. 아티스트가 오래 껴안고 고민한 이야기, 아티스트의 뿌리 같은 이야기라서 앞으로도 계속 반복하는 이야기의 원형을 담는 경우가 흔하다. 데뷔작 이후의 작업은 첫 작업의 반복이나 심화 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김일성이 죽던 해]를 타이틀로 정했지만, 천용성의 음반은 김일성이 죽던 해의 충격과 사회적 파장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 해의 다른 사회적 사건도 노래에 없다. 11곡의 노래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지 않는다. 천용성 자신의 이야기이거나 천용성이 만든 세계의 이야기일 음반의 수록곡들은 “상처만 아물고 나면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네게 돌아갈게“라고 약속하기도 하고, ”초대받지 못한 생일에 나 혼자 즐거운 동무들의 모습들을 그리워한다“고 씁쓸한 추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먼 길을 꺼리는 토박이 택시의 손에 돈을 더 쥐여주고 가자 하며 멀리 도착한“ 경험을 노래하기도 한다. 다른 수록곡들 역시 삶의 쓸쓸함을 노래하거나, 사랑에 빠진 순간을 고백하듯 제각각의 사연으로 흩어진다. 음반의 부클릿에는 천용성 자신으로 보이는 어린이의 사진이 노래마다 빠지지 않지만, 음반의 수록곡들이 죄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수록곡의 서사가 다양하기 때문인지 수록곡들이 사용한 음악 방법론 역시 다채롭다. 기본적으로는 어쿠스틱 기타와 건반 정도의 단출한 포크/팝 편성에서 출발했을 노래들은 전통적인 포크 사운드를 고집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는 미디와 건반을 활용한다. ‘순한글’과 ‘전역을 앞두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기꾼’에서도 건반의 역할이 크고, ‘나무’에서는 베이스 연주가 주도한다. 포크와 팝 사이에 걸쳐진 음악은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비중이 높다.

특히 이 음반에서는 오래 누적된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체감할 수 있다. ‘상처’에서는 따로또같이나 윤영배를 느낄 수 있고, ‘대설주의보’에서는 브로콜리너마저를 발견할 수 있으며, ‘동물원’에서는 윤상이 다가온다. ‘순한글’에서는 윤영배의 질감과 신스 팝의 손길이 노크한다. ‘전역을 앞두고’에서는 동물원과 어떤 날이 기웃거리고, ‘사기꾼’, ‘울면서 빌었지’에서는 어떤 날이 스쳐간다. ‘사기꾼’의 끝무렵에 즉흥적으로 이어지는 드럼 연주도 흥미롭다. 라이너노트를 쓴 대중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윤상, 송홍섭, 조동익, 동물원, 브로콜리너마저를 거명했는데, 음반의 사운드에는 70년대 말부터 최근까지 여러 뮤지션들이 만든 소리의 질감들이 곳곳에 박혀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을 복제하거나 레퍼런스 하는 데서 그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음반은 표절이나 복제의 덫으로부터 자유롭다. 천용성과 프로듀서를 맡은 싱어송라이터 단편선이 과거의 유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며, 각각의 곡들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려감에도 곡 자체의 완성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는 이들마다 이 음반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다르게 꼽을 가능성이 높다. 타이틀은 ‘김일성이 죽던 해’이고, 뮤직비디오를 찍은 타이틀 곡은 ‘대설주의보’이며, ‘난 이해할 수 없었네’도 타이틀곡이지만, 나는 ‘대설주의보’에서 ‘동물원’과 ‘순한글’로 이어지는 순간에 가장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음반의 후반부에서도 음악의 밀도는 흩어지지 않는다.

천용성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
천용성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제공 = 천용성

천용성의 담담한 목소리, 다양한 레퍼런스

어쿠스틱 기타와 오보에만으로 차분한 고백을 노래하는 ‘상처’에서부터 천용성은 가사의 서사와 멜로디를 적확하게 연결한다. 여기에 배경처럼 밀어 넣은 오보에 연주는 노래의 진솔함에 우아함을 얹어준다. 조동익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음반의 타이틀곡인 ‘김일성이 죽던 해’는 “하지만 파티는 끝나고 하루 지나 건네준 선물은 친구들의 조롱과 놀림 속에 다시 내게 돌아”오는 씁쓸한 사연을 노래했다. 천용성은 이 우울한 가난과 따돌림의 추억을 어쿠스틱 기타와 건반에 퍼커션, 베이스 기타 정도의 단출한 편성으로 가볍게 노래한다. 천용성의 보컬 역시 감정을 증폭하지 않는다. 무심하다 못해 때로 무기력하게 들리는 천용성의 목소리는 소박하고 편안해서 노래 속으로 깊이 빠져들지 않게 막는다. 안타깝고 화가 날 수 있는 노래의 순간에도 담담한 목소리는 상황 자체의 안타까움과 주체의 무력감을 듣는 이에게 온전히 전달해 이 음반의 노래들이 ‘박제된 동물처럼 바닥에 누워’ 견디는 이의 고백임을 깨닫게 한다.

수록곡 대부분에서 천용성은 화를 내고 절망하거나 열망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감정을 분출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무심한 표정”, “하루를 삼키는”, “홀로 타들어가는 부러진 나무”등의 표현이 취하는 내적 인내의 태도는 “가끔씩 가끔씩 사랑한단 걸 난 이해할 수 없었네”라고 노래하는 ‘난 이해할 수 없었네’와 이어진다. ‘먼 곳에서 보낸 2년 이란 시간’을 차분하게 노래하는 ‘전역을 앞두고’, “대희야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노랫말의 ‘사기꾼’도 다르지 않다. “야 야 나무 베지 마라”고 노래하는 ‘나무’가 있고, ‘어머 어떡하지 난 사랑에 빠졌나봐’라고 노래하는 ‘순한글’, “울면서 빌었지”라고 노래하는 ‘울면서 빌었지’도 있지만, 그 순간에도 천용성의 목소리는 대부분 낮고 담담하다.

천용성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
천용성 정규 1집 '김일성이 죽던 해'ⓒ제공 = 천용성

이렇게 견디고 삭이는 태도와 하나로 모이지 않는 이야기, 다양한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한 노래는 곽푸른하늘, 도마, 비단종의 목소리까지 끌어와 남성의 서사를 여성의 서사나 다른 이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그 결과 이 음반은 천용성이라는 뮤지션이 많은 이야기를 담지했고,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에너지의 주인공임을 일러준다. 세상은 빨리빨리 완성하고 얼른 성공하라 재촉하지만, 음악마저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이제 천용성은 자신이 펼쳐 놓은 이야기와 견디는 태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 단편선과 퍼스트 에이드가 함께 만든 사운드 안팎을 어슬렁거리며 자신의 음악을 조련하면 된다. 우리는 이 음반을 들으며 천용성이 들려줄 다른 음악을 기다리자.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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