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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엄마의 그림일기] 엄마 뱃살 사용법

결혼 전에도 날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40대 중반에 이르니 뱃살이 슬슬 나온다. 아이 둘을 낳기도 했고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하루에 천 걸음도 못 걷는 관계로 어느새 놀랄 만큼 무럭무럭 자란 뱃살이 살짝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예전에 입던 청셔츠는 단추가 잠기다가 배 부분에서 끼어서 영 볼품없어 보이기도 하고, 운전할 때는 가끔 배에 물놀이 튜브를 끼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예전에 만났던 중년의 언니들이 한여름에도 꼭 조끼를 입고 있어서 “더운데 왜 여름옷을 두 겹이나 입어요?”라고 해맑은 질문을 했던 30대 시절을 뒤로하고 여름 반팔 티셔츠 위로 튀어나오는 군살을 가릴만한 뭐 입을 거 없나 찾는 배 나온 아줌마가 된 것이다.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어도 예쁠 때는 이제 지나갔나 생각하면 서글프다.

다행히 최근 뱃살의 쓸모를 발견했다.

어느새 아들의 얼굴이 딱 내 배까지 닿을 만큼 자라서 “엄마는 폭신폭신해!”하며 나를 끌어안고 내 배에 얼굴 묻기를 좋아한다. 해찬이를 그렇게 안고 있으면 아이 친구들이 한 번씩 와서 똑같이 얼굴을 묻고 나를 안아주고 간다.

우리 옆집에 엄마가 안 계신 해찬이 친구 하은이도 “이모 저도 해찬이처럼 똑같이 해주세요! 꼭 안아주세요” 하며 내 배에 얼굴 묻기를 좋아한다.

해찬이, 하은이, 보름이
해찬이, 하은이, 보름이ⓒ박지선

하은이네는 아빠랑 언니랑 셋이 사는데 이사 와서 보니 밤마다 12시 넘어서까지 언니랑 피 터지게 싸운다. “에휴~ 저 집은 삐삐네 집이네”하며 그냥 넘어갈 때도 있고 조그만 애가 서럽게 울고 있으면 가서 참견하기도 한다. 아빠는 숲에서 벌목하는 일을 다니는데 일을 마치면 또 대리운전을 하러 가서 밤 2시나 되어서 들어오시는 것 같다. 6학년 언니랑 3학년 동생이랑 날이면 날마다 싸움질이다. 한날은 아들이 숙제를 하다가 “엄마! 하은이는 매일 숙제를 안 해 와서 선생님한테 혼나” 한다.

“그래? 어떻게 혼이 나는데?” 물었더니 “수업시간에 밖으로 나가 서 있어”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을 듣고 나는 내가 나가서 서 있어야 하는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을 느꼈다. 나가서 서 있게 한다고 다음날 숙제를 잘 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친구들은 다 앉아서 수업을 듣는 한 시간 동안이나 서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니. 다리 아픈 건 둘째 치고 아이가 허구헌 날 뒤로 나가 서 있으면서 겪을 낙인과 소외와 외로움이 한 번에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옆집에 사는 한 너를 뒤로 가서 서 있게 하지는 않겠어!”라는 옆집 아줌마의 사명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이웃이 슬픈데 나는 기쁠 수 있겠는가.

숙제는 다름 아닌 일기 쓰기. 그 뒤로 시간 될 때마다 저녁에 불러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일기 쓸 거리를 생각하고, 그림책도 읽어주고. 여름엔 머리도 감기고, 한동안은 이가 생겨서 무릎에 눕히고 이랑 서캐도 박멸하고.... (이와 서캐 박멸은 생각보다 성취감이 높은 일이다) 다행히 하은이는 우리 집에 오는 것도 좋아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아했다. 신기하게도 한 달, 두 달, 몇 달 사이에 일기 쓰기 실력도 아주 많이 늘어서 때로는 글로 나를 감동시키기도 한다. 숙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땐 나를 끌어안고 배에 얼굴을 묻으며 “이모! 안아주세요!”

천일홍
천일홍ⓒ박지선

어떤 날은 우리 집이 아이들의 숙제방이 된다. 외국에서 시집온 엄마들이 아이들 숙제 지도를 할 수 없는 경우 전화가 온다. “이모 숙제하러 가도 돼요?”

바닷속에 사는 생물을 조사해서 ‘간추려 쓰기’가 숙제였는데 조사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 내용을 또 간추리라니 얼마나 어려운가. 베트남에서 온 한 엄마는 그냥 보내기가 미안했는지 아이를 통해 과자를 들려 보냈다. 재밌게 숙제하고 간식도 먹고 헤어질 땐 폭신하게 배에 얼굴을 묻고 포옹 한 번씩 하고.

엄마의 뱃살은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하라고 신이 주신 선물이다. 내 아이뿐 아니라 동네 아이들을 꼬옥 안아주라고. 실컷 안아주다가 점차 아이가 크는 속도에 맞춰 나도 뱃살 튜브에서 벗어나게 될 일을 고대한다.

박지선 마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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