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에 무역 제재라는 칼을 빼들었다. 야심차게 칼을 휙~ 휘둘렀는데, 어라, 뭔가 이상하다. 그 칼끝이 겨눈 곳이 한국이 아니라 자국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섰다. 규제 대상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 에칭가스 등 세 종류다. 모두 반도체나 LCD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필수 소재들이다. 일본 기업들의 세계 시장점유율이 70~90% 정도나 되는 품목들이다.
앞으로 일본 정부는 이 제품들을 한국에 수출할 때 심사를 깐깐히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무역분쟁이 벌어졌을 때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는 너희 나라가 한 짓에 기분이 상했으니 너희 나라가 파는 물건은 안 산다!”라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도 이런 것이다. 피차 상대국 제품에 고액의 관세를 물려 “너희 나라 제품은 안 산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불매운동도 마찬가지다. “당신네 기업이 하는 짓이 싫으니 우리는 당신 기업 제품을 안 사겠소”가 기본적인 보복의 방식이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는 한국 대법원이 한 짓에 기분이 상했으니 너희 나라에 물건을 팔지 않겠다”고 나섰다. 한국 물건을 안 사는 게 아니고 일본 물건을 안 팔겠다고? 참으로 희한한 경제 제재다.
아마 일본은 2010년 센카쿠 열도 문제로 중국과 분쟁을 겪었을 때 중국이 희토류 수출 중단 카드를 꺼내든 것을 참고한 듯하다. 당시 세계 희토류 시장의 97%를 장악했던 중국은 희토류 수출 중단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었고, 일본은 억류했던 중국 어선 선장을 석방하며 백기를 들었다.
하지만 희토류는 자원이지 산업 생산품이 아니다. 자원을 무기화하는 것과 산업 생산품을 무기화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자원은 묻혀있지 않으면 만들 수도 없지만, 제품은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 수 있다. 일본의 헛발질은 여기서 시작됐다.
선진국의 강점인 자유무역을 걷어찬 일본
자유무역이 선진국에 유리한 이유는 자유무역 체제 아래에서 후진국이 선진국의 산업구조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이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이유는 선진국의 싸고 품질 좋은 제품이 자유무역을 통해 거의 무제한으로 후진국 시장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소재산업에서 세계 최강대국이다. 소재란 부품이나 기계를 만들 때 사용되는 세라믹이나 금속, 고분자 물질 같은 재료들을 말한다. 이 분야에서 일본은 그야말로 넘사벽의 강자다.
한국도 소재산업에서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수 십 년 동안 노력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소재산업은 정형화된 설계와 제조로 따라잡을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장인 정신이 깃든 섬세한 예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일본은 특유의 꼼꼼함으로 수 십 년 째 절대 강자로 군림해 왔다.
한국이 소재산업에서 일본을 따라잡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자유무역이었다. 우리가 소재를 개발해도 일본 제품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일본은 자유무역을 통해 한국 소재시장에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한국 기업들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지금도 LCD 완제품 하나를 만들면 매출의 40%를 일본에 갖다 바친다. 대부분의 소재와 부품을 일본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도체나 휴대폰도 더 잘 만들고 자동차도 거의 따라잡은 데다, 한류 열풍으로 문화콘텐츠 수출도 훨씬 많이 하는데, 매년 일본과의 무역에서 엄청난 적자를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품과 소재에서 일본이 압도적 우위를 점했기 때문이다.
탈(脫)일본과 국산화의 계기
그렇다면 한국이 소재 국산화의 꿈이 없는 나라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벌써 수 십 년 동안 한국은 소재산업에서 일본을 따라잡는 꿈을 꾸고 있었다. 넘사벽 수준의 일본 제품이 자유롭게 한국 시장을 휩쓴 탓에 하고 싶어도 못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이 스스로 “한국에 소재를 팔지 않겠다”고 나섰다. 특정 산업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보호무역이 필수적인데, 일본이 먼저 한국의 보호무역을 돕겠다고 나선 꼴이다. 만약 일본 정부의 소재수출 규제가 길어진다면 한국은 소재 분야에서 탈(脫)일본과 국산화의 꿈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반도체와 LCD의 핵심 소재는 일본이 세계 시장의 70~90%를 장악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당장 대체품 찾기가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이 불편을 견딜 인내력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행히 반도체 경기가 최근 내리막이어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재고는 상당히 쌓여있다. 소재도 3개월치의 여유가 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대체 시장을 개발하면 못 견딜 일도 아니다.
게다가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는 일본의 소재산업의 기반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일본 기업들이 만드는 소재의 최대 고객이 한국 기업들이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세계 시장의 63%가 한국에서 생산된다.
일본이 이런 거대 고객에게 물건을 안 팔면 소재 만드는 기업들은 그 제품을 어디다 팔 것인가? 사태가 장기화되면 한국 기업들은 불편을 이겨나가겠지만, 일본 소재기업들은 매출처를 찾지 못해 산업 기반이 붕괴된다.
부글부글 끓는 일본 산업계
그래서 일본 정부의 이번 정책은 아둔한 자살골이다. 몇몇 친일 성향의 한국 언론들은 호들갑을 떨지만 벌써 한국 증권가에서는 일본의 자살골에 대한 냉정한 분석들이 나온다. 언론에 보도된 몇 가지 분석을 읽어보자.
장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 “90일 이상 일본 수입이 중단될 경우 반도체 생산에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지만 더 장기적으로 보면 소싱처 다변화의 계기가 될 것이다.”
김양재 KTB증권 애널리스트. “이번 조치는 일본의 자충수로 판단된다. 오히려 국내 업체 제조사 및 소재 업체가 중장기 수혜를 받을 수 있다. 국내 제조사와 소재 업계도 일본 수입 심사 기간을 견딜 재고를 보유한 상황이다 일본의 이번 조치로 우리나라 반도체 제조사가 자국산 소재 비중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동원 KB증권 애널리스트.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등은 반도체, OLED 및 전기차 분야에서 적용되는 핵심 소재 일부를 2020년부터 국산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는 해외 의존도가 컸던 한국 IT 소재의 국산화를 가속화시키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물론 “한국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이니 지나치게 한국에 낙관적인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 재계의 반응은 어떨까? NHK방송과 인터뷰를 가진 일본상공회의소 미무라 회장은 “한국은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국내에서 부품을 스스로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늘어놓았다.
<아사히신문>도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가 소재 분야에서 한국 기업의 탈일본화를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마이니치신문>도 “한국이 단기적으로는 다른 곳에서 소재를 조달하려 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 국산화를 통해 탈일본화에 나설 것이고, 결국 일본의 기술적 우위가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일본의 칼은 수 십 년 째 최강자 자리를 지켰던 일본 소재산업을 향한 자살골이 될 것이다. 물론 한국은 당분간 불편하겠지만, 얼마든지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선거에서 이겨보겠다고 자국 기업들에게 몽둥이질을 하는 아베 정부의 선택은 그야말로 한심하다.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한국 정부는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통해 소재산업의 국산화라는 대장정을 시작해야 한다.

이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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