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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호 교육칼럼] 한국 공교육의 내부 모순(하)

21세기 AI가 장착된 로봇이 인간의 삶 곳곳으로 파고 들어오는 이 시대에 우리의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얼마나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고 있을까? 이런 질문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교육의 내부는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유로운 상상력과 탐구 분위기는 교사들의 자유재량이 얼마나 되는가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 교사들 일상의 특성:타율성

먼저 인천 학익고 한성찬 교사가 묘사하는 현실을 본다.

인천 학익고 한성찬 교사가 묘사하는 학교 풍경
인천 학익고 한성찬 교사가 묘사하는 학교 풍경ⓒ2019 학교민주시민교육 국제포럼, 2019.6.22일, 서울시립대학교, 68~69쪽

문제는 위의 사례가 학교현장에서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지필평가를 줄이고 내신과 비교과활동을 좀 더 풍부하게 하려는 교사의 고심은 교장의 한마디에 좌절된다. 교사와 교장 모두 교과의 특성과 입시를 의식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지만 생략된다. 교장은, 학생들 곁에서 학생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교사들의 판단에 맡김으로써 민주적 권위가 싹튼다는 사실에 맹목이다. 이때 흔히 교장들 자신도 교사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권위주의를 한층 강화하는 쪽으로 영향을 준다.

핀란드에서는 1956년 국가교육위원회와 사회민주당이 주도하여 ‘학교프로그램위원회’를 만드는데 여기서 당시 영국과 미국이 우선적 가치로 간주했던 ‘교육기회의 평등’에 주목하고 이를 중심주제로 채택한다. 핀란드에서 범정부적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959년까지 무려 200회에 걸쳐 논의를 이어간다(FL, 23).

그리고 그 결과물이 9년제 공립 종합학교 페루스코울루(Peurskoulu)다. 여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교사들이다. 왜냐하면 이 개혁안이 300개 학교에 걸쳐 무려 1000명의 교사들이 행한 경험적 연구에 기초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FL, 22).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교육개혁의 실천적 모범국으로 불려지지 않으면서도 지금껏 세계적으로 가장 풍성한 교육연구 결과물을 냄으로써 핀란드에 제일 큰 영향을 준 나라다(FL, 167~170).

핀란드는 일찍이 북유럽의 평등지향적 사회적 가치의 연장선에서 교육을 시장원리에 내맡기지 않고 교육의 공공성(형평성)을 지켜내는데 힘을 쏟았다. 고부담 시험이 자리 잡지 못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일제고사가 있다 해도 3~4년에 한 번, 1~2개 학년에서 10% 표집검사에 그침으로써 저부담 시험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마땅히 핀란드에서는 외부에서 부과하는 표준화된 교수요목이나 교육과정을 얼마나 잘 이행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다. 대신 교사들의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 교실수업의 다양성과 실험정신, 교내의 형성 및 총괄평가의 권한을 제약 없이 허용한다(FL, 93~98).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자율성이 전문성 계발의 계기로 작용했다.

교사들의 역량이 발휘될 거의 무제약적인 환경은 600년 스웨덴의 지배와 100년 러시아 지배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1950~60년대 말레이시아나 페루에 맞먹고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 한참 뒤처져 있던 시민들의 학력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FL, 99~101). 이 지점에서 일례로, 같은 맥락에서 한국 교사들의 축적된 역량과 가능성을 신뢰한다면 국제 바칼로레아 IB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의 정당성은 상실된다.

핀란드에서는 유급제가 학생에 대해 부정적 자아개념 및 학교 중퇴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등 폐단이 많아 종합학교 개혁 때 이를 대거 축소했다. 그리고 다양한 성향과 능력의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아 서로 도우며 다양한 가치와 기능을 배우도록 ‘기회의 평등’을 보장했다.

이 혼합된 학급은 핀란드 교사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상당한 과제요 도전이었다. 이에 교사들은 지역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교실수업의 다양한 국면에서 써먹을 수업 상의 대응력을 활발하게 축적해 나갔다. 핀란드 학교의 성격을 ‘전문적 학습공동체’로 규정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FL, 91). 핀란드의 상황은 가히 ‘협력하기 위해 경쟁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반면 한국의 학교는 지시와 복종의 구도에 의해 움직이는 일종의 ‘두목과 부하의 관계에 의존하는 사회(clientelism)’라는 의구심이 스친다.

일단 핀란드는 다름을 차등이 아니라 차이로 간주하면서 ‘차이를 즐긴다’ 인상을 받는다. 이는 곧 포용과 조화의 가치를 중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2013년경 핀란드 헬싱키의 종합학교에서 이민자 자녀가 10%를 넘었는데 이 때문에 귀에 들리는 외국어만 무려 40개가 넘을 정도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FL, 96).

한국에서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이런 조화와 협동의 기제 속에서 혜택을 받고 있을까? 우리는 핀란드를 통해서 상이한 학생들의 차이를 녹여 각자 배움의 목표지점에 도달케 하는 ‘용광로’로서의 교육력을 목격하게 된다. 이 힘은 곧 교사의 역량에서 오며 이 역량은 다시 교사 자율성에서 출발한다.

학생들의 자기표현이 불가능한 학교현실

이번에는 학교에서 차지하는 학생들의 위상과 관련하여 한성찬 교사의 일상의 소묘를 한번 더 본다.

인천 학익고 한성찬 교사가 묘사하는 학교 풍경
인천 학익고 한성찬 교사가 묘사하는 학교 풍경ⓒ위 포럼자료, 69쪽

한국의 중등학교도 이렇게 규정할 수 있다. 학교는 다양한 장치로 수업, 생활규정, 교문지도, 특강, 유교적 가치관, 학교 구성원의 상호작용 등을 통해 철학자 미셀 푸코가 말한 규범에 따라 ‘순종적인 신체(docile body)’를 생성한다. 이때 학생을 획일화하고 규격화하려는 ‘의도’를 지닌 특정 ‘권력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촘촘한 권력망이 사회 전체를 통과하는데 학교 또한 예외가 아니다.

권력망의 효과로 학교 구성원은 절대적인 주체양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여기서 벗어난 주체양식은 비정상적이고 일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Foucault, 1980). (대안학교 자녀들의 부모와 면담하며 연구한) 연구자들은 다양한 계기를 통해 주체양식의 부당함, 더 나아가 폭력성을 인식하게 된다(엄수정, 제도권 학교를 떠나 대안학교를 선택한 부모들: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 이론에 근거한 내러티브 연구, 교육정치학연구 제 26집 제 1호, 2019.3., 196쪽).

간섭이 일상화된 한국의 학교현실은 학생들로 하여금 불만과 반항심리를 자극하고, 이는 다시 학교중퇴 혹은 교권침해와 같은 일탈로 연결될 수 있다. 게다가 권위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비민주적인 교장승진제도는 학생자치와 같은 민주적 생활양식은 튕겨내야 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른바 ‘표현문화’가 아니라 ‘침묵문화’가 교사에 이어 학생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있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이러하니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전통적으로 핀란드도 지식암기 수업, 연령에 의한 학년 구분, 고정되고 획일화된 수업 커리큘럼, 교실중심 수업이 주를 이뤘으나 수업방법 및 교육과정 편성의 유연성 및 개방성을 보장하고 학생 대 교사, 교사 대 교사의 풍부한 상호작용을 허용하면서 과감하게 개혁했다. 결과적으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변했다(FL, 33).

일례로 핀란드의 직업계 고교에서도 중퇴율이 더 많은 편이었는데 수업설계 즉 실습중심의 워크샵에 학생들을 직접 참여시켰다. 그 결과 학생들의 흥미와 성취 욕망이 배가되면서 중퇴율도 줄어들었다(FL, p.38. 참고 기사:2015.3.30일자 허핑턴포스트). 배움의 욕구가 채워지면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첫 반응은 얼굴에 미소가 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성적으로 균형이 잡혀간다. 한국은 인성교육을 별도의 시간과 커리큘럼을 짜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낭비다.

독일의 경우, 지역별 편차가 크긴 하지만 2015년에 하우푸트슐레(독일의 직업계 중등학교) 학생들 47.000~50,000명가량이 중퇴를 했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 역시 학교와 지역의 청소년 복지 및 취업담당 관청이 더 긴밀히 협조할 것을 주문하는데 가장 먼저 할 일이 교사와 스쿨폴리스가 학생들의 고민에 접근하여 자기를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2017.7.5일자 알게마이네자이퉁. 2017.7.4일자 슈피겔. 두 신문이 거의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음). 핀란드의 중학교에서 학생당 매주 2시간씩 상담시간이 할애되는 것도 한국과는 작은 차이가 아니다(FL, 33). 진로, 교과, 교우관계의 고민이 촘촘하게 상담의 그물망에 걸리는 셈이다.

학생 개인의 행복을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공교육과 관련하여 송경오(조선대 교수) 및 정지선(홍콩대학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홍콩, 일본 등은 교육주체의 형성이 부재한 공교육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민의에 기반한 공교육의 이념과 가치가 부재했고, 따라서 국가주도의 과도한 성장에 의존한 공교육의 발전을 추진해왔다(심성보, 2004). 특히 한국은 지나친 교육 관료주의 체제(이돈희, 1993)가 학교교육에서 다양성과 이질성을 유연하게 조화시켜 나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학생의 자유와 교사의 자율성을 가로막아 교육의 획일화를 초래했다’(공교육 개혁방향의 국제비교분석, 교육행정학연구, 2011, 29권 4호, 533쪽).

이어서 위 두 교수는 공교육 개혁의 방향으로 ‘교육의 형평성, 성과의 책무성, 학생 개인의 행복보장이라는 트라이앵글 전략’을 추천한다(위 논문, 534쪽). 이 중 교육의 형평성(공평성)과 학생 개인의 행복에 대한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거창한 전략이나 구호가 아니라 “아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행위는 복잡미묘한 과정이기 때문에 양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상식을 말하는 나라, 그것도 정부당국과 학부모가 말하는 나라가 바로 핀란드다(FL,126).

핀란드인들의 이 말에서 한국교육의 내부 모순이 좀 더 명확해진다. 그래서 한국이 주로 잘못한 것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평가가 쉽지 않은 것이 교육인데 시험과 평가를 과신했다는 것, 정부가 큰 틀에서만 기획하고 대부분 지역과 교사들에게 결정권을 넘겨야 했는데 통일성과 표준화라는 명목하에 세부규정까지 간섭, 통제하며 민주행정을 어겼다는 것, 무기경쟁에 맞먹는 입시경쟁에 친숙해진 학부모와 사교육업자들이 과도한 개입을 삼가야 했는데 그렇게 했으며 특히 사립과 사교육이 공교육을 잠식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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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호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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