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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화 칼럼] 기적이 무력해지는 사회에서 행복해지기
행복한 라짜로
행복한 라짜로ⓒ제작사 제공

두 개의 세계 속 소외된 인물

영화는 두 개의 세계로- 두 개의 공간과 시간대- 구성된다. 장소는 시골마을 ‘인비올리타’와 도시이다. 영화의 첫 번째 이야기는 인비올리타 마을에서 시작되는데, 마을은 담배농장의 지주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학교, 관청과의 어떤 연결도 없고, 출생신고도 되어있지 않다. 지주에 의해서 이주도 금지되고, 부당하게 노동착취를 당하면서 산다. 밖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주민들은 인비올리타 밖의 지역도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비올리타 마을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1980년대에 일어난 실화라고 한다.

인비올리타라는 곳이 우연히 경찰에 의해 발견된 뒤, 주민들은 도시로 이주한다. 그런데 도시는 이들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영화의 두 번째 이야기는 십수 년이 흐른 후 도시 생활이다. 도시는 인비올리타 사람들이 정착하기에는 너무 힘든 공간이며, 이 도시의 높이 치솟은 건물들은 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세트장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이들은 좀도둑, 주변인으로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인비올리타나 도시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렇게 영화는 자본주의 속에서 소외된 계급의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는 사회비판적 시선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화를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연결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의 핵심적 인물은 ‘라짜로’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없다. 청년 라짜로는 일만 할 뿐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되지 않고, 식사에도 초대되지 않았다. 라짜로는 인비올리타 마을의 마을 노예와 같다. 인비올리타 주민들은 지주로부터 착취를 받았지만, 그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또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짜로는 악의 구조에서 가장 밑바닥에 속한 인간이다.

그런데 라짜로는 도시로 이주할 때 함께 하지 못했다. 도시로 이동할 때 그는 절벽에서 실족하여 떨어진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은 라짜로를 찾지도 않고 떠났다. 라짜로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십수 년이 지난 후이다. 그런데 그는 전혀 나이를 들지 않고 예전과 같다. 행복한 라짜로는 성경의 요한복음 속 ‘라자로’처럼 되살아났다.

시간의 경과를 눈치채지 못한 라짜로는 도시로 가고, 도시에서 마을의 사람들과 재회한다. 나이도 들지 않은 라짜로를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은 ‘안토니아’라는 주민뿐이다. 그런데 그가 부활, 기적의 현현이라고 믿는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다. 라짜로의 부활이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환영받지 못한다. 라짜로조차 자신이 기적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그가 기억하는 삶, 전과 같은 존재로 살아갈 뿐이다.

행복한 라짜로
행복한 라짜로ⓒ제작사 제공

행복한 라짜로가 되기 위하여

영화 제목 ‘행복한 라짜로(Happy as Lazzaro)’는 역설적이다. 라짜로는 계속 웃고 있다. 그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불만이 없는 선한 얼굴을 하고 있다. 마치 얼굴이 미소의 마스크를 쓴 것 같다. ‘행복한’ 이란 형용사가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그는 정말 행복했을까하고 물어보고 싶다. 마을 주민들은 그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은 적이 없다. 그저 현재의 상태에 리짜로는 만족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러면 라짜로는 무엇을 원했을까?

라짜로는 자신이 되살려지는 기적보다는 ‘행복한 라짜로’가 되는 기적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기적은 작은 공동체로부터 오는 작은 친절이었을 것이다. 라짜로가 커피를 대접하려 해도 마을사람들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시에 와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형제라고 불렀던 지주의 아들을 만나지만 어떤 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만남은 극히 짧게 끝나고, 라짜로가 원하는 작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끝나고도 관객들은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들이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자신들이 인비올리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음을 자각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고통, 욕망만이 워낙 커서, 주변의 라짜로를 각각의 내부로 들일만 한 공간이 없는 삶. 자신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들을 포용할 만한 여유가 없는 삶. 우리의 삶은 얼마나 옹졸하고 치사한지, 무심한지 돌아보게 하지 않았을까.

또 관객을 처참한 기분에 들게 하는 것은, 각각이 라짜로 생을 살고 있다는 동병상련의 감정 때문일지 모른다. 메아리 없는 소외를 느끼며 살아가는 라짜로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을 수 있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라짜로와 같은 인생의 부활은 또 다른 잉여인간이 부활로 반갑지 못한 의미가 되어 버렸다. 절망 속에서도 매일매일 기적처럼 살아가는 수많은 라짜로가 있다. 그들이 행하는 노동은 자신이 아닌 자본의 기적이 되고 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라짜로는 도시에서 도시의 부랑자처럼 죽는다. 그 죽음은 인비올리타 사람의 미래일 수 있다. 영화는 라짜로가 부활하는 현장에 있었던 늑대가 도시를 홀로 걸어가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홀로 의연히 걸어가는 늑대는 외로워 보이지만 기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애정을 갈구하며 희생하는 라짜로보다 늑대처럼 의연할 수는 없었을까. 라짜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기적이 저렇지 않았을까. 의연히 걸어가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 현 사회의 톱니바퀴 속으로 끼어들기 위하여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라짜로의 부활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세상을 넘는 새로운 세상을 꿈꿀 때 의미가 있었다. 전과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 현재를 넘는 사회를 향해 의연하게 걸어가기 위해서 라짜로는 부활했어야 했다. 소외되지 않는 주체로서, 행복한 라짜로가 많은 세상을 만드는 기적은 어떤 모양일까.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기적을 만든다고 한다. 현재 어떤 믿음으로 살아가는지 생각할 시간이다.

김애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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