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같은 대상을 보아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한다. 어쩔 수 없다. 정체성의 차이는 판단과 행동의 차이로 이어진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유도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를 다른 이들이 발견했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평등하다.
뮤지션 레인보우99의 음반 ‘동두천’은 레인보우99의 여행 이야기이다. 시와, 하이미스터메모리, 황푸하 등의 싱어송라이터와 함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연극음악 창작을 겸하는 뮤지션 레인보우99는 2015년부터 즉흥 여행곡을 발표했다. 자신이 가보지 않은 지역에 가서 배회하다가 그 순간의 느낌을 즉흥음악으로 기록한 다음 발표하는 방식이다. 레인보우99는 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곡을 만들어 2016년 ‘Calendar’, 2017년 ‘Europe’, 2019년 ‘Come Back Home’ 음반을 연달아 발표했다. 그 사이 천미지와 함께 한 ‘Alphaville’, Nwit과 함께 한 ‘Telekid’ 음반을 내놓은 레인보우99는 한국대중음악계의 손꼽히는 다작 뮤지션이다. ‘동두천’ 음반은 벌써 네 번째 즉흥 여행기 음반이며, 올해 두 번째 음반이다.
가보지 않은 곳을 배회하다 그 느낌을 기록한 뮤지션 레인보우99의
주한미군의 시간 속 한국인들에게 생긴 생채기를 기록한 ‘동두천’
기존의 즉흥 여행기 음반이 여러 지역을 다니며 만든 곡을 모은 음반인데 반해, 이번 음반은 오로지 동두천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 음반의 수록곡 10곡은 모두 동두천 이야기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섹스 동맹 기지촌 정화운동’편을 우연히 본 후, 레인보우99는 동두천에 사로잡혔다. 다들 알고 있듯 경기도 동두천은 주한미군과 뗄 수 없는 지역이다. 시 면적의 42.5%를 미군기지로 제공한 지역에서 미군은 지배자 혹은 동업자에 가깝다. 그러나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신의 권력과 욕망을 일방적으로 발산했던 미군의 시간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레인보우99가 본 방송 프로그램은 그 기록이었고, 동두천에는 그 그림자가 여전하다. 레인보우99는 낙검자 수용소를 비롯한 동두천 곳곳을 다니면서 받은 인상을 음악으로 기록했다. 미군의 역사이며, 한국인의 역사이고, 한국 여성의 역사이며, 전쟁의 역사이고, 기지촌의 역사이며, 동두천 시민의 역사인 동두천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곡들이 쌓였다.
그런데 노래 없이 연주만으로 채운 음반에는 구구절절한 설명과 해설은 없다. 레인보우99는 보통의 여행기처럼 지역의 위치와 면적, 특산물과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동두천에서 살지 않은 이방인이 동두천에 이르렀을 때 목도하게 된 동두천의 역사와 지형, 공간의 공기가 자신에게 밀려들며 만드는 파장을 기록할 뿐이다. 이 파장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정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하는 사물은 제각각의 색과 빛과 존재감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다른 존재에게 엄습한다. 고유한 아우라는 숨겨지지 않고 숨길 수 없다. 당연히 대체로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 느낌은 존재의 본질과 연결된다. 물론 존재의 본질은 한 두가지로 압축할 수 없다. 동두천의 본질은 미군과 기지촌의 이야기에만 있지 않고, 2019년 현재 대한민국 수도권 변방의 도시라는 사실에 있기도 하며 또 다른 무엇에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다른 지역에 산다는 것, 동두천에 산다는 것이 삶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음반은 다름의 기록이며 같음의 기록이나 유사함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방인의 시각에서 동두천을 기록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을 행하는 주체가 레인보우99라는 이방인 뮤지션이라는 사실이다. 동두천에서 살지 않는 그는 동두천의 평이한 일상을 알지 못하고, 동두천의 일상이 지루하거나 똑같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동두천에서 사는 이들은 익숙해져 버린 과거와 현재의 흔적 역시 그에게는 새롭거나 충격적일 가능성이 높다. 첫 곡 ‘상패동’을 비롯한 많은 곡들에서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질감은 몰랐던 동두천의 과거가 남긴 강력한 아우라와 예고 없이 마주친 이방인의 충격이다. 레인보우99는 그 무거움에 압도당한 채 그 기운을 옮기는데 주력함으로써 과거가 얼마나 생생한 오늘로 살아있는지를 기록한다. 그것은 한국 사회 곳곳에 얼마나 많은 죽음과 폭력과 비극이 잠재해있는지를 기록하는 과정이며, 그 진실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레인보우99의 음악은 동두천이라는 지역에 존재하는 역사와 삶과 공간이 뿜는 이야기의 울림을 담는 기록일 뿐 아니라, 그 이야기가 자신 안에서 울리는 파장의 기록이다. 역사와 삶을 기록하는 창작자가 많지 않은 한국대중음악계에서 레인보우99는 가치의 올바름이나 미적인 가치를 앞세우지 않고 자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투과한 지역을 꾸준히 기록하는 기록자로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했다. 서울의 화려함에만 주목하고 과거 삶의 흔적이 새로운 힙과 핫의 콘텐츠로 소비되는 시대, 음악 언어의 형식적 조련과 상업적 가치에 몰두하는 시대에 레인보우99는 아티스트 본인이 주목하고 열중한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으로 들려주는데 집중함으로써 예술가는 한 사람의 자유인이며, 작품은 예술가의 본능과 우연과 삶과 인식의 복합적 결과물임을 드물게 드러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보았고, 이렇게 느꼈는데 당신은 어떠십니까?”
이번 ‘동두천’ 음반 작업을 진행하며 레인보우99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며 발견하는 동두천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앎으로 인식한 동두천까지 기록함으로써 동두천의 실체에 더욱 가깝게 다가간다. 그의 눈에 비친 동두천은 기지촌을 비롯한 폭력의 역사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상흔의 땅이기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동두천에 여전히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견디고 억누르는 분노와 슬픔과 무력감, 그리고 끈질긴 삶의 의지를 음악으로 기록하고 재현함으로써 묻는다. 나는 이것을 보았고 이렇게 느꼈는데 당신은 어떠냐고, 동두천은 이렇게 아프고 질긴 땅이며 이것이 사실이며 실제인데 당신은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 가사가 있는 노래처럼, 혹은 민중가요처럼 어떻게 하자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수록곡 10곡에서 레인보우99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솔직함과 진실함, 음악의 사운드와 멜로디 등으로 구현한 아름다움은 하나의 태도이자 답이다. 레인보우99는 자신이 만난 동두천이라는 세계 앞에서 자신을 숨기지 않고 섣불리 재단하지 않으며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그대로 옮긴다. 슬프고 화가 나고 막막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부풀리지 않는다. 대신 슬픔의 아름다움과 분노의 아름다움과 막막함의 아름다움을 재현함으로써, 그리고 그 밖의 울림 역시 그대로 기록함으로써 동두천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기타 연주뿐 아니라 건반과 미디 사운드에 현장에서 채록한 소리들까지 활용한 음악은 변화무쌍하기보다 주의 깊다. 공장 지대에 피어오르는 밤연기와 ‘턱거리 아파트’, ‘턱거리 사격장’과 ‘초소‘까지 놓치지 않는 레인보우99의 시선은 현재의 동두천을 구성하는 쓸쓸한 공기까지 밀도 높게 기록함으로써 변방의 남루하고 정처 없는 삶에 근접한다.
주목받지 못하고 소비되지도 않는 지역,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공간의 서러움이 담담하게 펼쳐지는 곡의 풍경은 처연한 다큐멘터리로 핍진하다. ’밤연기‘부터 ’초소‘로 이어지는 곡들을 들을 때 우리는 음악이 화려하고 빛나는 삶의 BGM이나 흥행기록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실재의 기록으로 의미 있으며 아름다울 수 있음을 확인한다. 지금 어떤 음악이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지키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음악을 외면하고 있는지, 아니 어떤 삶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너무나 분명하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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