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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엄마의 그림일기] 엄마는 ‘수다’가 아니라 ‘책모임’에서 힘을 얻는다

홍천에 오고 1년 반정도를 별다른 모임 없이 지냈다. 첫 봄에 딸기농사를 지었는데 조용한 하우스 안에서 새소리 들으며 종일 일하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 걸지 않고 말을 안 해도 되고. 어색하면서도 좋은 이런 감정은 뭘까? 홍천 오기 전 매일 오전 오후로 여성단체 동아리 모임을 준비하고 운영하면서 동분서주하던 일이 엊그제 같다. 늘 사람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일들로 복작복작 살다가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과 침묵, 늘 밖을 보다가 반대로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딸기 줄기를 자르며 성남에서 살았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 좋았던 일, 서운했던 일, 화났던 일 등등, 한번에 밀려오기도 하고 차근차근 생각나기도 한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좀 더 책임감 있게, 좀 더 진지하게 할 걸.’
‘그 언니는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도 열심히 했는데 참 서운하다. 왜 그렇게 마음을 못 알아줄까’
‘내가 좀 더 인정머리 있게 할 걸. 째째하게 그런 거 가지고 토라져가지고’

줄기를 잘라내며 밀려오는 생각들이 하나씩 뽑히고 다듬어지기 시작한다. 때로는 하나의 생각이 일주일씩 나를 붙들고 있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이 동그랗게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사람과의 여러 가지 일들이 같이 생각나고. 그런 생각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한번쯤 깊이 돌아보고 또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

새 책 냄새는 항상 설레인다
새 책 냄새는 항상 설레인다ⓒ필자 제공

여성단체 일을 하며 바쁘게 살 때는 생태 독서 모임, 젖먹이 엄마들과 함께 하는 육아책 모임, 엄마들이 하는 역사책 모임, 동화 읽는 엄마모임 등 종류도 다른 책모임을 네다섯 개를 하기도 했다. 책모임별로 여러 여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힘들기도 했지만 그 재미가 참 쏠쏠했다. 다양한 역사와 삶의 방식과 철학을 가진 ‘사람책’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늘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오는 지혜가 가끔 생각난다. 도서관 앞에 벗어놓은 그의 신발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한결같이 하얀 운동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적도 있다. 그는 늘 모임 전에 시간에 맞춰 왔고 늘 책읽기를 완수해 왔다. 늘 바르고 정돈된 모습으로 우리를 만났다. 훌륭할 것 없는 일상의 모습이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의 지혜에게 배운 것이 많다. 변화무쌍한 삶을 한결같게 살아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배우는 기쁨 같은 것이 있다.

책모임에 때때로 집에서 맛있는 것을 들고 와 회원들을 기쁘게 하는 은희 언니도 생각난다. 배고픈 결식아줌마 시절에 언니가 해준 부침개, 고구마, 빵 등을 잘 먹었는데... 그냥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면서 재료를 꺼내어 무엇인가 만들기 시작했을 설렘을 같이 먹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의 세포 안에 잘 간직되어 있다. 사람에 대해 조금 더 마음을 쓰는 것의 기쁨과 감동을 배웠다.

사실 책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우리가 이런 모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고 좋은 언니도 있었다.

“그냥 수다 떠는 것 보다 훨씬 보람 있고 좋잖아. 책모임을 하기 전에는 잘 몰랐는데 주제를 가지고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깊이 있고 좋은지 알게 됐어. 이제 친구들과 그냥 수다 떠는 건 뭔가 재미도 없고 좀 시시하게 느껴진달까?”

책모임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
책모임이 주는 소소한 즐거움ⓒ필자 제공

그래, 나에게 필요한건 책모임이었어! 돌아돌아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다. 홍천의 맘카페에 슬쩍 글하나 써본다. “저랑 인문학 빡독(빡세게 독서)하실 분... 독서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3명 모이면 시작합니다.”

사실 빡독이라 쓴 것은 책을 좋아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이 오길 바라서였는데 신기하게도 연락이 온다. 이런 모임이 절실했고, 외로웠고, 강제로 책을 읽고 싶고, 무엇인가라도 시작하고 싶었다는 사람들에게.

드디어 독서 모임 첫날,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가가 뜻이 맞는 동지를 만나는 일이 이런 기분일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만난 홍천에서의 첫 독서모임.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책이 될까? 그들은 나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 줄까?

박지선 마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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