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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고민을 보내주세요”, 손편지 답장을 붙이는 익명의 우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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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 우울감 등 조금은 극단적인 감정이 일상의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변화한 현대인에게 ‘털어놓기’란 쉽지 않은 행동이다. SNS를 통해 지인들의 그럴싸한 일상을 넘겨보고 있을 때면 어쩐지 나만 번듯하지 못한 것 같은 변변찮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다.

마음 한쪽에 응어리진 불편함을 누군가에게 털어 보이고 싶지만, 막상 표현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입은 안 떨어지고, 머리는 더 곪아간다. 누구에게 이 갑갑함을 드러내 공감을 구하고 싶다가도 “말해 뭐해”, “다들 피곤할 텐데”, “나도 이러다 말겠지” 등 다양한 속사정으로 최대한 말을 아낀다. 끙끙거리는 현대인에게 ‘털어놓을 곳’이 필요한 이유다.

거리에 설치된 ‘온기 우편함’
거리에 설치된 ‘온기 우편함’ⓒ온기제작소

“내 이야기를 들어줄 곳이 있다는 것”

지난 2017년 2월 추운 겨울, 조현식 소장은 삼청동 골목에 나무 우체통을 하나 놓았다. 비영리단체 ‘온기제작소’의 시작이었다.

대학생 시절 이름난 베스트셀러였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은 게 동기가 됐다. 난데없이 도착한 익명의 편지에 머리를 맞대 적은 답장이 눈앞에 번뜩였다. 이름을 감춘 편지에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하나의 고민에 마음을 마주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혼자 감당해야 할 짐이 조금은 덜어지는 느낌이었다.

현식 씨는 책을 읽은 뒤 “우리 사회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꼭 필요하다”고도 느꼈다. 외로운 사회를 위로하는 좋은 방법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현식 씨는 “내가 느끼는 외로움을 타인도 느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매일 비슷한 패턴의 일상에서 한 번쯤 밀려오는 허무함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전보다는 덜 외로워진, 타인을 도울 심적 여유가 있었던 당시의 현식 씨가 그렇게 온기제작소를 만들었다.

길에서 우연히 우체통을 발견한 뒤, 옆에 놓인 메모지 한 장을 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편지를 적는 사람이 있다. 미리 적은 편지를 온기제작소 사무실로 바로 보내는 사람도 있다.

현식 씨는 ‘편지를 쓰는 것’부터 위로의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의지가 된다. 아직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이미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잠깐 멈춰서 편지를 쓰는 동안 나를 돌이키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됐다고 전한 사람이 있다”고 현식 씨는 말했다. 진심이 통했고, 현식 씨는 그렇게 사람들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거리의 우편함’을 하나씩 늘려갔다.

비영리단체 ‘온기제작소’ 조현식 소장
비영리단체 ‘온기제작소’ 조현식 소장ⓒ온기

그동안 그는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을 함께 하고, 어머님들께 한글을 알려드리고, 루게릭병 환우들을 돕는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해왔다.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았던 그가 직접 방식을 구상하고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든 것은 ‘온기제작소’가 처음이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았다. 고민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늘어갔고, 직접 답장을 보내고 싶다며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우편함은 서울에만 벌써 10개가 설치됐다. 노량진동, 신림동, 삼청동을 비롯해 덕수궁 돌담길 옆, 광화문 인근, 호스피스 병동 등 곳곳에 놓였다. 장소 하나하나에 모두 의미가 깊다.

현식 씨는 “우체통을 설치할 때 비용이 들다 보니 장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노량진, 신림의 경우 고시 공부를 하는 분들이 많아 (우체통이) 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직장인이 많은 광화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덕수궁의 경우 사람들이 주변 돌담길을 걷다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레 편지를 쓰게 되지 않을까 싶어 우체통을 놓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제가 먼저 제안해 호스피스 병동에도 우체통을 두었다. 저희 할머니께서 호스피스에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그때부터 호스피스에 위로가 될 수 있는, 도움이 되는 활동을 언젠가 꼭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분께서 직접 한 자 한자 적어 편지를 보내시기도 하고, 가족께서 적어 보내시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도 우편함을 놓고 싶어 문의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현식 씨는 “온기제작소를 운영하며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각 지역마다 허가 방식이 다르고 까다로워 지방에는 아직 우편함을 설치하지 못했다. 서울시는 비영리 목적으로 설치물을 거리에 세웠을 때 비영리라는 것이 증명되면 어디든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경우 법적 절차가 다소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온기우편함에 쌓인 편지를 모두 찾으면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일명 ‘온기우체부’라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답장을 적는다.
온기우편함에 쌓인 편지를 모두 찾으면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일명 ‘온기우체부’라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답장을 적는다.ⓒ온기제작소

고민편지 가장 많이 보내는 연령층은 ‘2030’
활동 공간 마련하기 어려워 ‘카페·옥탑방’에서 시작
답장 쓸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것”

‘온기제작소’는 매주 목요일 서울 곳곳의 우편함을 돌며 편지를 찾는다. 봄, 가을에 특히 편지가 많이 온다. 10곳 우체통을 모두 돌면 양손 가득, 두둑하게 편지가 쌓인다. 일주일에 평균 70개의 편지가 도착한다. 지금까지 온기제작소에 도착한 편지는 6천 7백여 개에 달한다.

편지를 모두 찾으면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일명 ‘온기우체부’라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답장을 적는다.

처음에는 자체적인 공간을 만들 여건이 되지 않아 카페에 모여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월세가 저렴한 장소를 찾다가 서울 종로구 동묘역 인근의 옥탑방에 사무실을 마련했고, 이후 성동구 왕십리를 거쳐 지금은 광진구 군자동으로 이사했다.

편지는 ‘20~30대’ 연령층으로부터 가장 많이 온다. 현식 씨는 “20~30대의 편지가 60%를 차지하고, 그중에서도 여성의 비율이 80%”라고 말했다.

그는 “20~30대의 편지는 취업과 진로에 관련된 내용이 70%를 차지한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힘든 일, 막상 일을 시작하면서 닥친 고민들, 이직과 퇴사에 대한 고민 등 이야기가 담겨있다”고 했다.

또한 “무기력과 우울함을 토로하는 편지가 10%, 위로와 응원을 원하는 편지가 10% 정도 된다. 그밖에 연애에 대한 고민이 있고, 40대로부터는 결혼과 육아에 대한 고민이 많이 도착한다. 초등학생 이하 학생들에게서도 고민 편지가 도착한다”고 말했다.

답장을 보내는 지역도 다양했다. 현식 씨는 “답장을 받는 주소가 해외로 적힌 편지도 한 달에 1~2번씩 온다”고 했다. ‘다니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꿈을 찾는 과정 중 한국에 온 여행자’, ‘그냥 막연히 떠나온 사람’ 등 사연도 각양각색이다.

온기제작소가 가장 멀리 부친 편지는 미국으로 도착하는 편지였다. 일반 우편 요금(5g 초과 25g까지, 380원)의 약 2배 가격에 달하는 우표를 꼼꼼히 붙여 우체통에 넣으면 편지가 안전하게 전달된다.

편지를 적어 ‘온기 우편함’에 넣는 시민들
편지를 적어 ‘온기 우편함’에 넣는 시민들ⓒ온기제작소

편지를 보내는 사람만큼, 답장을 적는 ‘온기우체부’의 성향도 다양하다. 현식 씨는 답장을 적는 법에 대해 “내용, 분량 등 방식은 자원봉사자 각자의 방식을 존중한다”고 했다. 다만, ‘꼭 지켜야 하는 2가지 규칙’을 강조했다.

“첫째, 고민에 대한 ‘정답’을 답장에 명시하지 않는다. 정해진 답을 바라고 고민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위로와 공감 자체가 필요한 분들이 대부분이기에 답장을 통해 고민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둘째, 편지를 보낸 사람이 최대한 느낄 수 있도록, 위로와 공감의 마음을 표현한다.”

현식 씨는 “주로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로 답장을 많이 쓰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위로를 받는 것 같다. 답장을 쓰는 사람도 편지를 쓰며 천천히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되는 부분이 있다. 자원봉사자들끼리도 함께 모여 답장을 어떻게 쓸지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고민 또한 자연스레 털어놓게 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답장을 쓸 때는 평균 40분에서 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내용에 대한 고민이 길어져 그날 마무리하지 못한 답장은 집에 가져간 뒤 다음 활동 때 가져오는 온기우체부도 있다.

이렇게 다 적은 답장은 우표를 붙여 잘 봉한 뒤 매주 월요일 빨간 우체통에 넣는다. 이제 ‘잘 도착할 일’만 남았다.

온기제작소는 자원봉사자들이 적은 답장을 모아 우표를 붙여 매주 월요일 빨간 우체통에 넣는다.
온기제작소는 자원봉사자들이 적은 답장을 모아 우표를 붙여 매주 월요일 빨간 우체통에 넣는다.ⓒ온기제작소

현식 씨를 포함해 마음 맞는 두 명이 함께 시작한 온기제작소가 이제는 어느덧 10명의 운영진을 두고, 거쳐 간 자원봉사자만 100명이 넘는 단체로 성장했다. 온기제작소에 고민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은 사람이 “자원봉사자로 함께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한국우편산업진흥원, 우정사업본부로부터 운영에 쓰이는 소정의 지원도 받고 있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캠페인 일환으로 기업 임직원들이 일반 시민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거나, 직접 고민 편지를 쓰면 온기우체부들이 답장을 전하는 활동도 하고 있다.

현식 씨는 온기제작소 활동이 수익을 창출하는 사업이 아니기에 운영이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비에 쉽게 젖는 나무 우편함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돼 새로 제작하고, 주기적으로 바꿔주고, 편지지를 직접 제작하는 등 세세하게 손이 가는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도 ‘가능한’, ‘최대한 오래’ 온기제작소를 운영하고 싶다는 것이 현식 씨의 꿈이다. 그는 “‘온기제작소’ 활동의 핵심은 진심 어린 편지를 쓰는 거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분께 답장을 전하고 싶다”며 “그게 우리 단체의 목표이자 존재 이유”라고 강조했다.

현식 씨는 “앞으로 전국에 우편함을 더 많이 늘리고 싶다. 우편함을 놓지 못하더라도, 전국에서 편지를 보내주시기만 한다면 온기제작소를 평생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현식 씨는 “저희는 언제나 답장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분이 편지를 써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온기제작소 주소
-서울시 광진구 군자동 358-2 1층 온기우편함-

김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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