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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남호 교육칼럼] 최근 도덕교사의 성교육 관련 ‘직위해제’ 파문에 대해

최근에 광주의 한 중학교 도덕교사가 성교육 자료로 활용한 단편 영화가 문제 되어 성 비위교사로 낙인찍혀 2019년 7월 24일자로 직위해제된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교육청은 이에 더해 해당 교사에 대해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

이 교사가 수업시간에 다룬 작품은 프랑스의 여성감독 엘레노르 푸리아(Eleonore Pourriat) 작 ‘억압받는 다수(10분 59초 분량)’다. 해당교사의 이름은 배이상헌이며 이후 ‘B 교사’로 지칭한다.

영화는 여성중심 사회의 극단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 주인공이 길에서 여성들에게 성폭행당하는 등의 일상 성차별을 경험한다. 이에 남성이 가부장사회를 그리워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간의 남성중심 사회의 폐단이 얼마나 컸는가를 거울처럼 비춰주면서 호소하는 것이 주 내용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결국 약자로 인식되어 온 ‘여성’을 존중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으며 나아가 남녀를 떠나 차별 없는 양성평등으로 가자는 것이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중학생들에게 보여주기에는 거칠고 당혹게 하는 장면들이 없지 않지만 주제를 파악하려는 기다림과 토론, 교사의 설명이 함께한다면 이러한 놀라움은 상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점에 차이가 있겠지만, 예술 장르이므로 작품의 주제의식이 자유와 평등의 헌법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면 교육자료로 가치는 인정된다고 할 수 있겠다. 작품성에 주목한다면 부분적인 대사와 장면을 달랑 떼어놓고 문제삼는 것은 금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또 우리는 그렇게 조각내 잘라 문제삼는 관행을 되풀이하는 것 같다.

영화 ‘억압받는 다수’의 한 장면.
영화 ‘억압받는 다수’의 한 장면.ⓒ영화 캡쳐

성 교육이 지체되어 있어

지금 현대 과학은 최첨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주 로켓에서 화석연료를 쓰면 섭씨 수 천도를 넘으면서 로켓이 타버리기 때문에 플라즈마 효과를 응용하여 온도 수 백만도까지 견디면서도 속도가 월등한 엔진을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화성 탐험에 3년이 걸릴 것이 39일 정도면 끝난다. 이것이 최근 과학계의 이야기다.

‘과학’의 세계와 성도덕 관련 ‘가치’의 세계는 성격상 다르지만 본성상 완전히 다를 수 없다. 왜냐하면 도덕은 현실 즉 사실의 세계를 해석하고 규정하며 시비선악을 판단하는 창(窓)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다. 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의 성적 가치관과 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은 답보상태이거나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는 그간 학교 성교육의 시행착오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습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01년 5월 26일 충남 서천군 비인중학교에서 미술전공 김인규 교사가 성 관련 문제 발생 열흘 만에 긴급 체포된다. 이유는 학생들에게 예술이 아니라 외설을 선보였다는 것 즉 ‘음란물 적시 및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그는 늦게 임신한 아내와 나체로 나란히 서서 부부사진을 찍어 이를 인터넷에 탑재한 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교육자료로 썼다. 법정에서는 1, 2심에서 무죄, 3심에서 일부 유죄판결이 났고 ‘벌금 500만원에 교사직은 유지한다’고 판시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교사의 교육적 의도는 한국사회를 풍미하고 있는 획일적인 미 의식을 허물고자 했다고 보여 진다. 즉 젊고 장딴지가 늘씬한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풍조, 자본주의적으로 상품화된 아름다움에 저항하자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은 처음의 당혹스러움을 극복했으나 집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일부 학부모들이 참지 못했다.

2017년 9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마광수 교수에 대한 탄압은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다만 그가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성담론을 시작했으나 살아생전에 문제작 ‘즐거운 사라’가 해금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이후에 쓴 ‘성애론’을 찬찬히 접하면 한국사회의 성적 가치관을 ‘금기’에서 ‘자유’로 옮기고자 했던 그의 노력의 진실성 여부를 읽어낼 수 있다는 점만은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미술교사의 사건으로부터 18년이 경과한 지금, 이번 B 교사 사건은 학생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 교사의 신체사진이 아닌데도 파문이 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예술작품을 현실자체와 혼동하는 것이 아닐까?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지 현실 자체는 아니지 않은가?

2002년에 MBC 16부작으로 방영된 드라마 ‘로망스’가 있었다. 고교 3학년 남학생과 국어담당 여교사의 사랑을 다룬 내용이었다. 배우 김재원이 최관우 역을, 김하늘이 김채원 역을 맡았다. 당시 이 둘의 키스장면에 참을 수 없었던 한국교총(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 제작진을 고발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물론 해외 특히 영미권에서도 성교육에 대한 학부모들의 반발은 종종 있다. 자녀의 성은 일단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독일 및 프랑스 등의 유럽권은 성교육이 좀 더 현실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정착된 경향을 보이는데 비해 영미권의 보수주의적 성향의 학부모와 단체가 이의를 제기하곤 한다. 보통 그렇듯이 성교육의 주된 내용은 언제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성적 지향과 동의 여부 등을 표현해야 하는가, 주변의 성적 취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등에 관련된다. (관련 기사:2019.5.8일자 미국 CBSNEWS. 2019.3.4일자 미주 중앙일보).

성교육에 대해 물의가 일어나는 배경에는 학부모와 보수단체 회원들이 학교를 통해 성교육을 받지 않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 교권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 문화권에서 문제발생의 빈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외지에서 알 수 있듯이 해외의 학부모들도 유사한 문제제기를 하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교육의 장에서 더 음미하고 토론하며 판단할 기회를 만들어주지 못한 책임에서 B 교사의 담당학교 교장, 그리고 광주 교육청이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교장과 해당 교육청 장학진은 민원을 서둘러 진화하기 위한 대상으로 간주하기보다 때로는 학부모와도 토론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성교육은 예술과 외설의 미묘한 경계지점을 찾아가는 탐색의 과정

이번 B 교사의 사례는 한국사회가 지금도 예술과 외설의 경계지점을 찾는데 친숙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환기시켜 주는 것 같다. 외설(음란)로 간주하면 예술적인 안목을 가질 수 없고, 그러면 예술에 담긴 고귀한 가치로서의 자유, 평등을 읽어낼 기회는 줄어든다.

따라서 성평등이라는 가치에 도달하려면 그 전 단계에서 일단 예술인가 외설인가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판단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던져주고 질문할 때 혹은 학생들 스스로 동기화되어 대화하고 토론할 때 효과가 높다. 교사의 일방 전달은 일종의 ‘교화’이지 진정한 ‘교육’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서 일부 학생이 나체와 거친 욕설, 골목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의 남성에 대한 집단 성희롱에 대해 선입견에 의해 마치 퇴폐 영상물을 보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이 선입견이 최종이 아니라 성교육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은 도덕의 편에서 외설, 폭력 자체로 규정할 것인가 아니면 자극적이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행위 그 너머에 무엇인가 있지 않을까 하고 탐색을 시작할 것인가가 결정되는 경계지점이라 할 수 있다.

교사가 기다리고, 공권력이 기다려주면 학생들은 자체의 배움의 욕망과 호기심에 의해 결국은 건전한 도덕의 인도를 받는 예술, 그 예술이 추구하는 가치를 찾아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적어도 대부분의 교사들이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기다림은 곧 아이들과 교사들에 대한 신뢰와 다르지 않다.

영화 ‘억압받는 다수’의 한 장면.
영화 ‘억압받는 다수’의 한 장면.ⓒ영화 캡쳐

성은 권력의 도구

필자가 청소년기에 모친에게 물었다. “어머니, 우리가 6형제인데 어떻게 저까지 낳으시었어요?” “네 아빠가 내게 와서 사랑해서 낳았지!” 이렇게 답하는 모친에게서 부부간의 사랑은 거의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결정권이 있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권력이 성을 어떻게 지배하고, 규제하였는지 그 잠복된 역사를 드러낸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작 ‘성의 역사’를 여기서 떠올리게 된다.

적어도 그의 관점으로 한국사회를 보면 유교의 이데올로기를 지나치기 어렵다. 유교는 종적 지배질서를 근간으로 하여 군주에서 가부장까지 연결된 권력의 망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연장자 우대 및 조상숭배라는 기제와 함께 인간사에서 중요한 성 역시 남성과 가부장의 권력을 지지하는데 빠질 수 없는 장치였다. 비단 유교만 성을 은폐함과 동시에 여성의 성을 남성의 관리대상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남녀 불평등 구조를 만든 대표적인 이념이 아니었던가?

호주제가 폐지되고 요즘 남녀의 이혼과 재혼이 원활해지는 것도 모두 도덕의 이름으로 성을 억압했던 권력의 허상을 폭로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성에 대한 권력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흐름, 권력으로부터 성을 해방시키는 흐름이 곧 미투(#Me Too)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적 결정권이 개인이 아니라 기득권에게 귀속된 사회에서 성평등을 향한 시도가 탄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구스타프 플로베르 역시 1856년 프랑스의 문학잡지 ‘레뷔 드 파리’에 ‘마담 보봐리’를 연재하고 이내 출판업자와 함께 정부에 의해 부도덕하다는 혐의로 기소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물론 후에 무죄 방면된다(위키백과 영문판:Gustave Flaubert).

B 교사의 직위해제 파문에 대해 문의를 받은 감독이 한국의 학생들에게 보내온 메일 속에서, ‘영화 속의 충격적인 장면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충격적인 정도에 비해 강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서로 싸우지 말고 차별과 싸울 것을 권고’하고 있다(2019.8.10일자 오마이뉴스). 감독에게 직접 의견을 듣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감독의 손을 떠난 작품에 대해 감독에게 질의하는 것도 또 하나의 해프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B 교사의 이번 시도는 우발적인 사건이라기 보다는 성평등을 위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읽어낸 교육적 필요의 결과로 읽혀진다. 그렇다면 성도덕을 아는 도덕교사를 신뢰하는 것이 불신에서 오는 소모적인 갈등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

만일 그에게 계속 행정 및 법적 제재를 가한다면 그것은 앞서 우리가 보였던 억압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울러 학생들은 빈발하는 성적 일탈과 범죄에 대한 대응능력을 상실함과 동시에 성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가치와 ‘사랑의 기술’에도 무지한 채로 남겨질 것이다.

신남호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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