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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엉망진창 ‘난민 신청’에 난민들 발만 동동

태풍 링링의 전초전이 시작된 지난 5일 아침 6시 30분 서울 양천구. 입구도 찾기 힘든 낡은 건물 3층 복도에 외국인 10여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필리핀, 가나, 중국, 네팔 등 국적도 생김새도 각양각색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모두 서류 뭉치를 품에 안고 있었다.

이들의 정체는 ‘국내 난민신청자’다.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입국심사 시 출·입국항에서 신청서를 제출하거나 이미 국내에 있는 외국인은 지방 출입국·외국인청에서 신청할 수 있다. 후자에 속하는 이들은 난민 신청서 제출을 위해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3층 난민과를 찾았다.

서울 양평구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3층 난민과. 오전 8시 30분에 신청 대기표를 받은 신청자들이 9시 신청 시작 전까지 기다리고 있다.
서울 양평구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3층 난민과. 오전 8시 30분에 신청 대기표를 받은 신청자들이 9시 신청 시작 전까지 기다리고 있다.ⓒ민중의소리

하루 난민 신청 수 제한
매일 새벽 6시부터 줄 서야 신청 가능
“행정 편의 위해 신청권 박탈”

7시가 넘어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자, 열리지 않은 문 앞으로 줄이 만들어졌다. 가나인 A 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평택에서 부랴부랴 왔지만, 이미 1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8시 30분 문이 열리기 전까지 신청자와 보조자를 포함해 42명이 서 있었다. 난민과 관계자는 “오늘은 그래도 적은 편”이라며 “매일 많은 신청자가 새벽부터 줄을 선다”라고 말했다.

공공기관은 9시부터 시작된다. 이들이 새벽부터 거센 비를 뚫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난민 신청은 현장 접수만 가능하고, 당일 접수 인원이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8시 30분부터 여권을 확인하고 은행 대기표와 비슷한 번호표가 배부됐다. 그러나 번호표는 오전 11시 20분 이전에 동이 났다. 이날 접수자는 약 50~60명이었다.

난민 인정 신청 대기표
난민 인정 신청 대기표ⓒ민중의소리

행정 편의를 위해 난민 신청권을 박탈한 셈이다. 황필규 변호사는 “인력과 예산의 한계로 무제한 신청받을 수는 없다”라면서도 “신청을 원활하게 소화할 수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신청자 수를 제한하는 방식은 의도와 무관하게 난민신청자의 신청권을 박탈했다. 여러 변수를 진지하게 고민했는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변호사는 “올해 초부터 접수 대기 시스템이 생겼다. 예전에는 오후에 가도 접수 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신청권 제한에 대해 “난민신청자 중 그날 접수가 안 되면 체류기한이 종료되는 상황들이 있다. 조력자가 없으면 이들을 (대기표 배부가 끝났다는 이유로) 돌려보내기도 한다. 별도의 대비책이 마련돼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난민 신청 접수 대기표 배부가 끝났음을 알리는 박스
난민 신청 접수 대기표 배부가 끝났음을 알리는 박스ⓒ민중의소리

영어 아니면 신청 힘들어
휴대전화 통역기로 대화해
“영어 잘해야 난민이냐”

9시부터 신청이 시작됐다. 딩동. 1번, 2번 접수자를 부르는 표시가 알림판에 떴다. 접수창구는 3개였지만, 이날 2개의 창구만 열렸다. 난민과 관계자는 “인원이 적을 때는 (창구를) 2개 열고, 많을 때는 3개 연다”라고 말했다.

신청 접수에서 가장 큰 난관은 ‘언어’였다. 모든 과정이 영어 중심이었다. 영어가 익숙지 않은 신청자들은 영어로 쓰인 신청서조차 작성하기 힘들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중국인 B 씨는 신청서 작성이 제일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도움받을 곳이 없어 혼자 휴대전화 사전을 찾아가며 신청서를 작성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토로했다.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난민과에 준비된 난민 지위 인정 신청 서류는 영어 형식 하나뿐이었다.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난민과에 준비된 난민 지위 인정 신청 서류는 영어 형식 하나뿐이었다.ⓒ민중의소리

영어가 유창한 신청자는 많지 않았다. 8시 30분 대기표 배부 직전 줄 서 있던 40여 명 중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이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집단을 이뤘다. 친구를 돕기 위해 온 네팔인 C 씨는 처음 본 네팔인들의 신청서까지 도맡았다. 영어에 한국어까지 할 수 있는 C 씨는 인기 스타였다.

신청 담당 공무원과 신청자와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신청 담당 공무원은 영어 의사소통만 가능했다. 영어가 미숙하거나 아랍어, 중국어 등을 사용하는 신청자의 경우 서로의 휴대전화 번역 기능을 보여주며 대화를 이어갔다. 번역이 잘못되더라도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곳곳에 붙은 아랍어 주의사항은 이 상황을 더욱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황필규 변호사는 “어느 나라든 외국인이 언어 어려움 없이 법적 서비스에 접근할 수는 없다”라면서도 “한국은 난민 협약국으로 난민신청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영어 중심으로 신청을 진행하는 건) 한국어, 영어를 잘하는 사람만 난민신청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냐. 운이 좋아서 돈이 많아서 통역을 구할 수 있는 사람만 보호받을 수 있는 거냐”라고 비판했다.

김연주 변호사는 “유엔난민기구에 문의해보니 다른 난민 심사국들은 접수 과정을 강화하고 있다. 신청서는 무조건 모국어로 작성하고, 접수 과정에서 공무원들의 세세한 도움을 받는다. 신청서를 잘 작성해야 1차 면접도 제대로 이뤄진다”라고 말했다.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3층 난민과에 붙어 있는 안내문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별관 3층 난민과에 붙어 있는 안내문ⓒ민중의소리

신청서 접수하는데 박해 사유 물어
박해 사유 비밀유지 안 돼
“최소한의 원칙도 안 지켜”

신청 접수 과정은 ‘0차 면접’이었다. 신청 접수는 신청 서류를 제출하면 끝이다. 이 과정에서 확인돼야 할 것은 필요한 서류를 모두 준비했는지 뿐이다. 하지만 접수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은 1차 면접처럼 박해 사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캐물었다. 박해 사유의 진위를 따지기도 했다. “이건 거짓말이다”,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말소리가 가장 많이 들렸다.

네팔인 C 씨는 “서류를 조건에 맞춰 준비해갔지만, 박해 사유를 영어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신청자를 돌려보낸 적이 있다”라고 털어놨다. 신청 이후 이뤄지는 1차 면접엔 법무부가 지원하는 통역 서비스가 있다. 하지만 ‘0차 면접’에서 조력자를 구하지 못한 신청자는 이 상황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황 변호사는 “신청은 접수 단계지 심사 단계가 아니다. 이름과 연락처만 확인하면 된다”라며 “신청은 박해받고 있다는 주장만으로 가능하다. 미비한 서류도 추후 제출하거나 (이후 단계인) 심사를 통해 보완하면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소송과 비교해보면 (이 상황은) 소장 접수 담당 직원이 소장 내용에 대해 틀렸다고 지적하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16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난민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난민 혐오를 반대하며 효자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16일 오후 서울 보신각 앞에서 난민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난민과 함께하는 행동의 날' 집회 참가자들이 난민 혐오를 반대하며 효자동 주민센터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김슬찬 기자

담당 공무원의 목소리는 대기석까지 새어 나왔다.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 탓에 구체적인 박해 사유 관련 대화를 모두가 듣게 됐다. 공무원의 질문을 파악하기 위해 눈과 귀를 접수대에 집중하고 있던 대기자들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박해 사유는 민감 정보에 해당한다.

난민법 제17조는 난민신청자 등의 주소·성명·나이 등 인적사항 등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황 변호사는 “난민신청자의 특정 인적사항이 사실상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공개적으로 이야기되는 상황은 제17조 취지에 직·간접적으로 위반한다”라며 “난민의 인적사항 비밀유지는 난민 보호에 있어서 최소한의 원칙이다. 난민을 보호하라고 했더니 난민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라고 질타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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