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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초연 44주년 완벽한 캐스팅, 더 완벽한 무대로 돌아온 연극 ‘에쿠우스’
연극 ‘에쿠우스’
연극 ‘에쿠우스’ⓒ극단 실험극장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중에 몇 가지 놀라웠던 것이 있었다. 그때까지 <로미오와 줄리엣>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뮤지컬 <베르테르>를 회전문을 타며 볼 당시에는 심지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한 번도 안 읽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놀라운 것은 없었다. 조금 창피한 일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명쾌하게 읽었다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유명해서 안 봐도 내용을 다 안다는 답을 듣기도 했다. 맞는 말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동화책부터 시작해서 만화, 영화까지 나와 있어 굳이 대사로만 가득한 셰익스피어 원작을 읽지 않아도 누구나 이야기를 안다. 원작이 주는 감흥을 느끼고 싶거나 학문연구를 위한 것이 아니면 원작을 안 읽었다고 창피할 일도 아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당연히 읽었을 거라 착각한 것도 정도가 심했지만, 그 또한 놀랄 일이 아니다. 뒤늦게 원작을 읽어본바, 공연의 감동 절반 정도의 느낌-개인의 생각일 뿐-이었고 굳이 누가 묻지 않으면 원작을 읽었다고 어디 가서 자랑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일들은 아직도 많다. 연극 ‘에쿠우스’가 그랬다. 초연 44주년을 맞는 전설의 작품인데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내용은 수없이 회자하니 모를 수가 없었고 연극 ‘에쿠우스’를 거쳐 간 배우들을 알고 있기에 이 작품은 너무 익숙해서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아닌 착각을 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구차한 변명은 이쯤에서 줄이고 연극 '에쿠우스'는 첫 관람 날이었다. 태풍 ‘링링’이 풍속 50미터를 자랑하며 한반도를 온종일 긴장하게 했던 다음 날이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날아가고 지붕이 뜯겨 나갈 정도의 강풍이 부니 절대로 외출을 하지 말라는 재난방송을 온종일 듣다가 해방된 다음 날이기도 했다. 세상은 그대로였다. 뉴스 화면에서 보았던 쓰러진 가로수 따위는 볼 수 없었다. 거리는 지난밤 태풍의 흔적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져 버렸다.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의 분주함을 보는 순간 어제의 일은 연극 속 한 장면 같기만 했다.

연극 ‘에쿠우스’
연극 ‘에쿠우스’ⓒ나인스토리 제공

연극 ‘에쿠우스’는 지난 밤 태풍과 거짓말처럼 평온한 오늘 그 중간쯤 같았다.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찔러 법정에 선 17살 소년 알런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의 이야기는 지난밤 태풍 같았다. 일곱 마리 말과 만들어 내는 알런의 혼돈과 광기는 풍속 50미터급이었다. 지난밤 태풍의 위협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재난경고였다. 그것은 당연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위험보다 그 위험이 자신에게 닥칠 수도 있다는 것에 더 큰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와 엄숙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 아래에서 억눌린 십대 소년 알런의 모습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인 동시에 여전히 사춘기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 자신을 동시에 보는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이지만 정작 자신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또한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남편으로 무기력하게 아내는 바라보며 살고 있다. 자신이 치료해야 할 알런의 숨겨진 열정이 부럽기까지 하다. 다이사트의 이중적인 모습은 나는 아닌척하며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늘 그렇듯 무대 위의 이야기가 현실과 특히 자기 자신과 겹쳐지면 그때 두려움이 앞서게 된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우리는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연장하며 살 때가 많다. 언제 그런 고통이 있었는지, 언제 그런 고비가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더는 알런은 고통받지 않을 것이지만 그 이전의 열정 어린 알런은 아닐 것이라는. 그렇게 평균적이고 규격화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묻는 다이사트의 질문은 무기력한 우리를 향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린다.

역대 최강의 캐스트로 가장 뜨거운 컴백을 예고했던 연극 '에쿠우스'는 태풍 '링링'과 함께 말 그대로 뜨거운 컴백을 했다. 처음 관람한 까닭에 이 작품의 캐스트가 역대 최강이었다는 입발린 거짓말을 할 수는 없겠다. 단지 한 번의 관람이 준 충격이 이 정도이니 미루어 짐작해볼 뿐이다. 1975년 한국 초연에 출연한 이후로 아홉 번 ‘에쿠우스’를 제작해 온 이한승 연출이 다시 연출을 맡았다. 광기와 열정의 오묘한 조화를 연기할 알런 스트롱 역에 배우 류덕환, 오승훈, 서영주가 삼색의 알런을 연기한다. 배우 장두이, 안석환, 이석준은 정신과 다이사트에 캐스팅되었다. 극의 처음이자 끝을 이끌며 알런의 정신세계를 끌어낼 의사이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는 평범한 인간을 그려낼 세 배우의 연기가 무척 궁금하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 이상을 보여줄 연극 ‘에쿠우스’는 역시 ‘에쿠우스’였다. 잊을 뻔했는데 일곱 마리 말들의 연기는 이 작품의 백미다. 연극 ‘에쿠우스’가 ‘에쿠우스’인 원초적인 이유도 이 말들의 존재 때문이니까.

연극 ‘에쿠우스’

공연날짜:2019년 9월 7일~11월 17일
공연장소: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
공연시간:120분
관람연령:고등학생 이상 관람가(만 16세 이상)
원작:피터 쉐퍼
제작진:역 신정옥/연출 이한승
출연진:장두이, 안석환, 이석준, 류덕환, 오승훈, 서영주, 김예림A, 김예림B, 유정기, 차유정, 이양숙, 박현미, 서광일, 이은주, 노상원, 조형일, 조한결 조민호 외

이숙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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