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은 2층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10일 오후 2시쯤 경북 김천시 한국도로공사(이하, 도로공사) 본사 안 스피커를 통해 이같은 방송이 들려왔다. 한국도로공사 직원들은 사무실 밖으로 나와, 1·2층 로비에 모여 앉았다. 경찰을 가운데 두고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과 한국도로공사 직원들이 앉아 있는 상황이 됐다.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지만, 톨게이트 요금수납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로공사 본사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 도로공사 직원들 상당수 역시 업무를 하지 못하고 대기 상태로 견디고 있다.
10일 오전 경북 김천시 한국도로공사 본사를 찾았다. 본사 앞에 깔린 푸른 잔디 위에는 '도공인의 행복한 일터'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있었다. 그 뒤로는 얼굴이 근심으로 가득찬 톨게이트 요금 수납노동자들 여럿이 앉아 있었다.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정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9일 농성에 들어간 요금수납원들에 대한 경찰 진압이 시작되면, 부상자가 나올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경찰이 정문 등 출입구를 봉쇄하고 있는 상황이라, 노동자들은 본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안 들어갈 테니까, 이 기자분은 들여보내주세요."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막고 있는 경찰에게 기자는 안쪽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노동자들이 몇 번이나 거듭 말한 후에야, 경찰은 몇 번의 확인 절차 끝에 기자를 본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줬다.
이날 본사 2층 로비를 점거한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1층 로비에는 도로공사 직원들이 앉아 있었다. 해당 직원들에 따르면, 요금수납원들이 더이상 건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은 도시락을 나눠먹었다. 경찰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교대하며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를 채워가며 로비를 지켰다. 한 도로공사 직원은 기자에게 "우리는 도로공사가 하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래서 저 분들의 상황을 다 알지 못한다"며 "이 사태가 빨리 해결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내려오래. 1층으로"
한 도로공사 직원이 다른 도로공사 직원에게 말했다. 오후 3시 30분쯤 2층에 모여있던 도로공사 직원들 중 일부는 1층으로 내려가 자리를 지켰다. 경영진이 도로공사 직원들을 이용해 본사에 들어오려는 요금 수납 노동자들을 막기 위한 '인간 방패'로 삼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로공사 경영진은 이날 현장에 나타나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민주일반노조에 따르면, 이강래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는 요금수납원들에겐 이날 오후 4시경 까지 대화를 위한 어떤 접촉도 없었다. 이 때문에 현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이강래 사장 등 도로공사 경영진 대신 애꿎은 직원들과 요금수납노동자들만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한국도로공사 노동자들은 IMF 위기 이전에는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눠지지 않았다.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정부 정책에 따라 비정규직화 됐다가, 다시 정규직화 되는 과정에서 이같은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정부가 정규직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도로공사 경영진 등이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가지 못한 바람에 현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달엔 대법원이 도로공사가 요금수납노동자들을 '직접 고용'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을 했음에도, 도로공사 측은 해고된 노동자 1,500명 전체가 아닌 499명만 '직접고용'하겠다는 입장이다.
9일 도로공사 이강래 사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대법원 판결에 따라 외주용역업체 소속이던 요금수납원 745명에 대해 오는 18일까지 고용의사를 확인해 직접 고용 및 자회사 전환 대상자로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도로공사는 직접고용대상자 745명 중 자회사 전환에 동의한 수납원 220명, 정년이 초과한 수납원 20명, 대법에서 파기환송 처리된 수납원은 6명을 제외하면 공사가 직접 고용해야 하는 인원은 총 499명이라고 추정했다. 오는 23일부터 정규직 전환을 시작해, 다음 달 중 현장 배치를 마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농성을 하고 있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와 내용대로 도로공사가 1500명을 직접고용하고, 이에 대해 노동자들과 대화를 충분히 한다면 풀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본사 내부를 취재하다 1층 문으로 나가려고 하자 "여기는 못 나가요"라는 직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는 '문 밖은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이 막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출입구 역시 밧줄 등으로 묶여 나갈 수 없었다. 주변을 살핀 끝에 가까스로 건물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한국도로공사 정문, 후문 주변엔 경찰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경찰들은 뒷문 출입 역시 막았다. 연대하기 위해 현장에 도착한 노동자들이 본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돌다 뒷문으로 향했다. 뒷문 밖에서 서성이던 노동자들은 안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소리라도 조금만 나면 깜짝 놀랐다. 앉아 있다가도 금세 일어나 "무슨 일이야? 다치는 거 아냐?"라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후문 앞에서 지난 5월 31일자로 용역업체와의 계약이 만료돼 해고자 신세가 된 요금수납원 이 모 씨(50)를 만났다. 그는 현재 "실업급여로 생활비를 연명하고 있다"며 "나는 가정도 내팽겨치고 계속 노숙농성중"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어제부터 여기 와 있는데, 도로공사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전날 밤 경찰과 충돌 끝에 병원에 실려간 요금 수납원들을 봤다면서, "요금 수납업무를 하면서 고객들이 욕하는 건 기본으로 들었는데, 도로공사는 더하다. 우리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 것 같아 참담하다"고 토로했다.
이날 기자와 만난 다수의 요금수납노동자들은 "우리도 여기에 오고 싶지 않았다"며 "9일 이강래 사장 기자회견 이후 너무 화가 나서 여기로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한편, 도로공사 본사 이외의 곳에서도 72일째 농성을 하며 '직접 고용'을 요구하는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있다.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서 고공농성 중인 도명화 위원장은, 민중의소리와의 통화에서 "이 자리에서 죽을 각오로 버티고 있다. 걱정도 되지만 우리가 물러설 곳도 이젠 없다. 우리 발로 걸어나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답답한 마음을 밝혔다.
오후 4시 18분, 다시 한국도로공사 건물 안에선 안내 방송이 울려퍼졌다.
"한국도로공사에서 알려드립니다. 본사 로비에 계신 요금수납원들은 현재 공사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즉시 사옥 밖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경북 김천 =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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