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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화 칼럼] 1994년 은희가 2019년 은희를 만나면

각자의 10대를 향한 여행

내가 성인이 된 후, 식탁에서 어머니와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종류가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사춘기의 특징, 심리적·정서적 불안 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걸 보시던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 애들은 사춘기가 없었지.” 나는 어머니 말에 피식 웃었다. 어머니는 내가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웃는 즐거운 청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굴러가는 낙엽만 봐도 우울해지는 나이가 된 후 내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면, 그때에도 굴러가는 낙엽을 보고 웃지만은 않았다. 울기도 했다. 그때에도 희로애락이 있었다. 그러면서 빨리 어른이 되길 희망했었다. 무엇이 그런 희망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언제 어른이 되는 것일까?

영화 ‘벌새’는 힘겨운 10대로의 여행에 관객을 초대한다. 그 여행 속에서 자신의 가여운 10대를 만나서 위로해주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지나간 감정을 되새김질하면서 그 감정의 정체를 물어보게 한다. 그 정체를 찾는 과정에 영화 ‘보이후드’가 있다.

영화 벌새
영화 벌새ⓒ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은희 그리고 메이슨

1994년 은희는 평범한 가족의 중2다. 집안의 경제적 조건도 무난하다. 으레 그러려니 하는 정상가족의 모습과 닮아있다. 가족 내 폭력의 일상화까지 일반적 정상가족의 범주에 속한다. 작고 여린 마음의 은희에게 가족은 위로와 위안 대신에 상처를 준다. 영화에서 이들 가족의 특징을 잘 설명하는 장면은 식사시간이다. 식탁에 가족 모두 둘러앉지만, 가족 각각의 표정은 밝지 않다. 일방적 질서를 확인하는 자리가 된다. 아버지의 일방적 훈시가 지배한다. 이러한 정황은 학교에서도 지속된다. 성적으로 우열을 나누고, 이 우열을 기준으로 차별과 인격적 모욕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은희는 학급 내 교우 관계도 쉽지 않다.

은희는 자신의 꿈인 만화가가 되기 위해 만화를 끊임없이 그린다. 그녀는 성실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 그녀의 노력은 인정되지 않고 그녀에게 학교, 가족 어디에서도 만화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는다. “내 생도 언젠가는 빛이 날까요?” 이런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은 작은 주변 장소이다. 학원수업시간이 은희가 숨을 돌릴 수 있는 때이다.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학원 친구와 자신의 불안을 이해하는 학원선생이 있다.

‘벌새’가 1994년의 은희를 주목한다면, 영화 ‘보이후드’는 주인공인 메이슨을 긴 시간을 열어놓고 지켜본다. 메이슨의 부모는 이혼했다. 자립, 사회적 성취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와 사회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는 듯한 히피적 정신세계를 가진 아빠가 있다. 메이슨의 실질적 법적 보호자인 엄마는 재혼과 이혼을 반복한다. 아빠와는 종종 만나는 관계인데, 부자 관계는 친구와 같다.

메이슨은 양쪽 부모를 오가며 다른 가족, 다른 환경의 사람들과 생활한다. 엄마의 사정으로 학교를 전학하고 이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학교생활에 특별한 사건이나 어려움은 없다. 메이슨은 10대 후반에 사진가로서의 직업적 희망도 가지게 되고, 이를 가족 모두가 응원한다.

영화 보이후드
영화 보이후드ⓒ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 코리아

그래도 상처는 남는다

은희와 메이슨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내성적인 성품에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하다. 그런데 롤러코스터같은 삶을 사는 부모를 가진 10대 메이슨이 정상가족 속 은희만큼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소위 콩가루 집안의 메이슨이 은희보다 왜 덜 불행해보일까? 그 차이는 일상적 폭력의 유무이다.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불모지 같은 가족에 은희는 더 많이 속해있다. 메이슨은 양부의 알콜성 폭력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엄마는 폭력으로부터 그를 구원해낸다. 그러나 은희의 경우는 다르다. 오빠의 폭력에 대하여 부모는 형제간 상호 싸움으로 인식하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벌새에서 학교씬은 짧지만 그 속에서 은희가 느꼈을 불안과 분열을 감지할 수 있다. 메이슨은 학교생활은 어떤가. 메이슨이 다니는 학교에서 일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특별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영화 벌새의 장면에 쉽게 감정이입이 된 편향된 평가일 수도 있다. 한국인이라면 어느 사회질서보다 치열한 경쟁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학교가 주는 고통의 DNA을 갖고 있으니.

은희와 그 많은 10대는 빨리 성인이 되고 싶었다. 롤 모델이 되는 어른이 있어서 그들을 따라하고 싶어서라기보다, 무력한 현재의 시기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내재화시키는 학교와 집의 공간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 나이가 들면 자신을 옥죄이던 어른과 화해할 수 있는가? 부모를 이해하게 되면, 자신이 부모가 되면 어른이 된다고 말하는 어른이 많다. 부모 자신도, 어른들도 외롭고 불안한 존재였음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자녀들은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는 실제적으로 나이로도 성인이 되는 때이다. 결국 타자로서 어른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어른이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게 되는 때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른 자신은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부모와 어른을 이해하면 어린 시절의 상처는 사라질까? 그 상처를 만든 환경을 객관화하고, 이해하는 것이 상처 치유에 분명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그 때의 상처가 없어지지 않는다.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마음 한 곁, 저 밑에 숨어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기 연민 시간이 많아진다. 상처가 만든 영향의 하나이다.

이렇게 자신도 충분히 지각하지 못한 상처를 품은 1994년의 은희가 2019년 은희를 만난다면 어떤 이야기와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1994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아니 더 악화된 환경에서 중2를 보내고 있는 은희에게 학원선생처럼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아니면 94년에 만난 어른과 같은 태도로 그들을 만나고 있을까.

김애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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