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을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무대 위 재엽을 보며 내 지난 시간들도 떠올랐다. 그 또한 관객 모두 그랬을 것이다. 무대 위 아버지와 재엽이 유영하며 살아온 시간들을 지켜보며 우리의 삶이 역사였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연극은 개인의 삶과 우리 근현대사를 씨실 날실 엮듯 절묘하게 엮어냈다. 160분의 시간은 아버지의 일대기인 1부와 2부 아들의 일대기로 나누어진다. 일제 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의 일대기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지나 200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 아들의 일대기로 이어진다.
무대 위에 등장한 재엽은 재엽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재엽 아버지 이야기는 아버지의 수천권 책이 기증된 경북대학교 도서관 개인문고실 ‘태용문고’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운명처럼 ‘태용문고’와 마주보고 있는 ‘박정희 특수자료’ 책장을 사이에 둔 채.
아버지 김태용은 1930년 일본 대판시(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고 김태용은 가족들과 한국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태용은 1961년 최초 대한민국 공무원이 되고 장준하 선생을 만나 평생을 잊지 못할 강연을 듣게 된다. 그것도 잠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다. 아버지 태용은 고향 경북 구미에서 박정희를 처음 만나고 다시 광주 포병학교에서 다시 만난 뒤, 세번째 박정희를 군사쿠데타에서 보게 된다. 영어 교사로 평범한 삶을 살아온 아버지의 삶은 격변하는 한국사의 전 가운데를 지나오고 있었다. 가족과 살아내는 것이 중요했던 그 시절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태용은 한국 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아버지 태용은 큰아들 재진에게 이야기한다.
재진아 너는 꼭 사람 많은 곳에 서야 한다.
어디가 맞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탈없이 살려면 중간에 서란 말이다.
앞도 뒤도 말고 딱 중간 말이다.
너무 튀지말란 뜻이야.
조용히 튀지 않게 사는 법을 가르쳤던 아버지 태용이지만 대구 한복판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유세 현장을 찾는다. 전교조에 가입한 학교 선생님들이 해직을 당하게 되자 시위에 참석할 것인지 말지를 고민하는 재엽에게 아버지는 선생님이 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고 나직이 말한다. 아버지의 일대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장해가는 두 아들 재진과 재엽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전두환 정권시절, 학교 친구들의 분신자살을 목격하게 된 형 재진과 5.18특별법 제정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게 된 재엽 모두 고단했던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 태용도 아들 재진과 재엽도 모두 평범한 삶을 산 평범한 사람들이다. 결코 평범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내는 것은 늘 힘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다. 얼핏보면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개개인의 삶은 늘 치열하고 고단하다. 고령에 암투병을 한 아버지는 재엽에게 한가지 고백을 한다. 한국전쟁 당시 육군장교로 임관하기 직전 뜻하지 않게 탈영을 하게 된 것과 그로 인해 전쟁 당시 태영은 전쟁터가 아닌 집에 있었던 사실을 말이다. 태영은 그것을 평생 말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대기 위해서였다고. 평생 수많은 권력자들이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 태용은 죽음에 가까워서야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했음을 알게 된다.
연극은 아버지의 일대기를 아들이 제3자의 시선으로 전해준다. 때론 어린 태용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가 다시 너른 재엽의 시선으로 이어지고 어린 재진이 이야기를 끌어가다 다시 성인이 된 재진이 어린 재엽과 손을 잡기도 한다. 어른 재엽에서 어린 재엽에게 시점이 이동해가며 평면적인 시간의 흐름은 입체적으로 바뀐다. 한 사람이 어른에서 아이로 혹은 다른 인물로 바뀌는 설정은 한 인물을 여러 시선으로 보게 만든다. 그런 복잡한 과정이 촘촘히 잘 짜여져 있어 혼란스럽지 않다. 매우 정치적인 사건들은 순간순간 아이의 시선으로 처리하여 담담하게 그려낸다. 수시로 등장하는 애드립같은 대사는 무겁고 엄중했던 역사를 개인의 삶에 녹여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 전 태통령이 서거한 해, 나는 아홉 살이었다. 라디오에서는 계속 음악이 흘러나왔고 아버지는 하루종일 라디오를 붙잡고 서너 개의 테이프를 돌려가며 녹음을 하고 계셨다. 그것이 지루했던 내가 집 문을 연 순간 골목을 휘감고 있었던 정적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역사는 내 삶 속에서도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 모두 역사가 되는 이유다. 태용과 재엽처럼 죽는 순간까지 누구나 삶의 알리바이 몇 개씩은 안고 살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권력자들이 내세우는 알리바이에 지치고 답답했을 우리가 적어도 우리 삶만은 알리바이 연대기가 되지 않도록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였으니 이 연극은 그 역할을 잘 해낸 셈이다.
연극 ‘알리바이연대기’
공연날짜:2019년 10월 16일-11월 10일
공연장소:명동예술극장
공연시간:160분
관람연령:중학생 이상
제작진:작 연출 김재엽/드라마투르기 이지현/무대 서지영/조명 최보윤/의상 오수현/음악 음향 한재권/소품 박현이/분장 이지현
출연:남명렬, 백운철, 유병훈, 유종연, 유준원, 이종무, 전국향, 정원조, 지춘성

이숙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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