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마산 민주항쟁’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 첫 기념식이 거행됐다. ‘부마항쟁’을 비롯해 ‘제주 4.3사건’, ‘광주 5.18민주화운동’ 등 근현대사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하나씩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과거에는 이들 사건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탄압의 대상이 됐었지만, 최근 근현대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이를 주제로 한 영화나 소설, 드라마 등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게임에서만은 근현대사 사건을 제대로 다룬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첨예한 이념 논쟁으로 다루기 민감한 주제이고, 게임을 주로 이용하는 낮은 연령대에게 무거운 근현대사를 풀어내기가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인디 게임 개발팀 COSDOTS가 만든 모바일게임 ‘언폴디드:참극’, ‘언폴디드:오래된 상처’는 한국 게임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제주민 수만 명이 희생된 ‘제주 4.3사건’을 다루고 있다.
‘4.3사건’이라는 주제도 눈에 띄지만, 사건이 일어난 1949년 제주를 배경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당시 제주민들의 상황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게 한 탄탄한 구성도 돋보인다. 무거운 주제지만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게임인 ‘언폴디드’ 시리즈는 한국 근현대사를 주제로 한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제 모바일에서 PC로 플랫폼을 옮겨 ‘언폴디드’ 시리즈의 글로벌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COSDOTS의 김회민 크리에이티브디렉터와 정재령 아트디렉터를 만나 제작 배경을 들어봤다.
“4.3사건을 알면 알수록 뭔가 알려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제주 4.3사건’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탄탄한 구성의 게임으로 담은 COSDOTS의 두 디렉터는 모두 20대다. 젊은 제작자들이 4.3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다.
4.3사건 70주년이었던 지난해 대대적으로 거행된 추념식을 TV로 접하면서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던 4.3사건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한다. 4.3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달려간 서점에서 고른 책은 현기영 작가의 소설 ‘순이삼촌’이었다.
“‘순이삼촌’을 읽었는데 충격적이었죠.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쓴 것라는 것도 충격이고,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것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는 것도 충격이었어요. 그러면서 이걸 왜 몰랐나 하는 반성이 들더라구요. 이걸 20대는 잘 모르고, 관심이 떨어지거나 왜곡해 알고 있어서 알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서 만들게 됐어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쉽게 접할 수 있는 유튜브 영상과 온라인 자료들을 찾았다. 의외로 조금만 검색하면 4.3사건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접할 수 있다는 것도 그때서야 알았다. 4.3사건에 대해 알면 알수록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지 않은 4.3사건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저희 20대가 생각하는 제주도는 그저 즐거운 관광지인데 사실은 우리들 발밑에는 4.3사건으로 희생된 유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스스로 부끄러워지더라구요. 뭔가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한국에서 근현대사를 주제로 만든 게임을 찾아보기 힘들다 보니 참고할만한 작품도 없었다. 아직도 역사를 민감한 정치적 쟁점, 이념 문제로 보려는 시선들 때문이다.
“4.3사건은 정치적 쟁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초점은 철저하게 피해자들에 맞춰서 봤어요. 당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있고, 무장대에게 죽은 사람도 있죠. 누가 더 잘못했는지 책임을 묻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이렇게 만들어진 ‘언폴디드:오래된 상처’에 이어 후속작인 ‘언폴디드:참극’이 올해 6월 모바일로 출시됐다.
“플레이하고 나서 4.3사건이 비극이라는 것만이라도 알아간다면 좋겠어요”
시리즈 중 첫 장에 해당하는 ‘언폴디드:오래된 상처’는 할아버지가 된 주인공 동주가 1949년 제주도에서 겪었던 일을 기록한 일지를 펼치면서 시작된다.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접하는 튜토리얼부터 동주와 손자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복잡한 설명보다 플레이하면서 게임진행 방식을 익히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장르의 정석을 잘 따라 잘 만든 탄탄한 구성이 플레이어를 이끈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경로를 정해야 하는 등 사운드를 이용한 부분도 흥미를 끈다.
두 제작자는 게임을 통해 4.3사건 당시 주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애쓰면서 느꼈을 공포와 분노를 공감하길 바랐다.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토벌대를 피해서 먹을 걸 찾아 헤매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그런 상황에 놓이면서 생존한다는 게 어떤 의미였을지 느껴봤으면 했죠. 주인공이 겪는 딜레마 같은 것들을 같이 체험해서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게임에서도 주인공이 생사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느낀 갈등을 플레이어들도 공감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장치가 있다. 토벌대에게 붙잡힌 상황에서 대답을 재촉하는 시간제한이 있는 것이다. 신중하게 선택해야 하는 선택지 앞에서 시간이 줄어드는 상황은 플레이어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흑백 드로잉으로 표현된 게임 아트도 어둡고 비극적인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다.
“어두운 이야기를 컬러풀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드로잉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주인공이 스쳐지나간 과거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니까요. PC판에서는 좀 더 바랜 기억의 이미지를 극대화해서 표현할 예정이에요.”
‘언폴디드’ 시리즈는 후속작인 ‘언폴디드:참극’이 올해 ‘챌린지 서울상’에 선정된 데 이어 ‘부산인디커넥트’(BIC)에서 최고의 소셜 임팩트, 그리고 최초의 서사까지 차지하면서 의미 있는 주제 뿐만아니라 작품성으로도 인정받았다.
“한국 인디게임에도 역사게임의 씬이 왔으면 좋겠어요”
‘언폴디드’ 시리즈의 모바일 버전으로 인정받은 두 디렉터는 PC로 플랫폼을 옮겨 4.3사건의 세 번째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이를 위해 게임인재단과 제주4·3범국민위원회가 ‘언폴디드’ 시리즈 제작에 필요한 역사적 자료와 자문을 제공하기로 협약까지 맺었다. 이를 통해 생존자 증언과 강연을 듣고, 제주의 4.3사건 현장을 둘러보면서 4.3사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느꼈다고 한다.
“인터넷 자료에서 제주 동양척식회사가 4.3사건 당시 수용소로 쓰였다는 자료를 그냥 읽고 넘어갔는데 4.3희장자유족회 송승문 회장님이 거기서 태어났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런 말씀을 직접 들으니 글보다는 많이 느껴졌죠. 알면 알수록 잘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들더라구요.”
‘언폴디드’ 시리즈의 후속작은 4.3사건 당시 토벌대에 맞서 싸운 무장대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PC로 플랫폼을 옮기는 만큼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장르에 어울리는 요소도 추가해 내년 겨울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COSDOTS는 ‘언폴디드’ 이전에도 간단한 진행을 통해 인종차별과 혐오를 생각하게 하는 ‘엘리자’라는 게임을 제작하기도 하는 등 ‘소셜임팩트’ 게임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역사를 주제로 한 게임을 꾸준히 낼 생각이다. 명함에도 ‘우리는 역사게임을 디자인합니다(We design historical video game)’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역사 게임이 씬(scene)이 됐으면 좋겠어요. 다른 인디 개발팀도 다 같이 성공해서 한국이 역사게임 잘 만든다고 하면 모두 좋은 일이잖아요. 많은 분들이 역사게임, 사회문화적인 게임을 인디씬에서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김백겸 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