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보기
댓글보기
[리뷰]당신의 존재와 가치를 증명하시오. 그렇지 못하면 탈락입니다.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두산아트센터

학교를 졸업하고 잡지사를 다닌 몇 년을 제외하면 거의 이십여 년을 프리랜서로 살아왔다. 프리랜서는 시간이 자유롭고 일정을 조정하기 쉬운 장점이 있는 반면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대출을 받기가 쉽지 않다. 소속이 없다는 것은 늘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았다. 더군다나 어딘가에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무척 곤란해진다. 내가 한 일을 증명서로 발급받을 수가 없고 들어오는 수입이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같은 양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늘 내가 누구이고 어느 정도 값어치가 있는 존재인지 증명하기를 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딸 아이는 취직을 하기 위해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취직을 원하는 사람은 많고 취직할 곳은 적으니 포트폴리오를 만드는데 몇 개월의 시간을 통째로 들여야 했다. 문제는 자신이 만든 포트폴리오가 원서를 넣을 회사의 요구에 맞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경력 있는 신입을 원하는 현실은 취준생에게 넘을 수 없는 벽과 같다. 경력을 쌓을 곳 없는 취준생에게 경력을 요구하다니 말이다. 일에 대한 열정만으로 뽑을 수 없으니 경력을 요구한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아이러니 같은 현실 앞에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의 투쟁은 성공할 수 있을까.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은 이같은 일상의 투쟁을 독특한 방식으로 무대에 옮겨 놓았다. 커튼콜로 역주행하듯 시작하는 무대 위로 빈 전동 휠체어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뒤이어 신체장애 배우들이 한명씩 등장한다. 7명의 배우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사라졌다가 다시 무대에 자유롭게 등장한다. 배우들은 관객을 응시하며 미소 짓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한다. 예술가의 인정투쟁이란 이 연극의 주제를 보고 신체장애 배우들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갈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신체장애 배우 외에 비장애 배우가 한두 명은 더 등장하지 않을까란 예상은 빗나갔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자신들이 예술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이 예술가임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예술가들에게 국가공인자격증으로 불리는 ‘예술인 패스’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예술가임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증명을 해야 하는 항목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 예술가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작품이 있어야 하고 작품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필요하다. 7명의 예술가들은 번번이 증명에 실패한다. 어디에도 이들이 예술가임을 증명할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예술가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혹 증명없이 그냥 예술가로 존재하는 것은 가능할까.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두산아트센터


반복되는 질문과 절망 속에서도 이들은 무대를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보기로 한다. 무대는 ‘나’에서 ‘너’, 그리고 ‘그’로 시점이 옮겨가며 나에게서 내가 보는 너로 다시 우리가 보는 그로 상황을 객관화시켜간다. 그렇다면 굳이 왜 신체장애 배우들을 무대에 세웠을까. 장애 예술가들의 현실을 고발하기 위함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신체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겪는 이중삼중의 불평등때문은 아닐까. 언제나 자신들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에 들어갈 수 없는 신체장애 배우들이 보여주는 인정투쟁이 예술가들의 인정투쟁과 닮아 있어서는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더 의문점이 생긴다. 아무리 실험적인 무대라 할지라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 감정노동자 등 현실에 기반한 날 것의 진실을 주로 다뤘던 연출가가 예술가들에 한정된 이야기를 하자고 판을 벌인 것일까? 그 의문은 적절한 지점에서 풀린다. 예술에 열정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는 국립극단 구인 지원자격에는 버젓이 상업 무대 경력 5년 이상이라 적혀 있다. 경력있는 신입을 원하는 요즘 기업들의 구인광고와 겹쳐지며 이 작품의 인정투쟁은 예술가편이 아니라 모든 구직자편으로 확장된다. 더 나아가 끊임없이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해야만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고 대출도 받을 수 있는 생활인편으로 넓어진다고 봐도 될 것이다.

무대 위 배우들의 대사는 객석을 향해 놓인 스크린 속에 동시에 기록된다. 대본이 있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것처럼 보여준다. 무대는 관객들이 예상하거나 볼 것이라 기대하는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 또 영화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여긴 서사가 없어”, “너무 올드하지 않아” 등 많은 대사들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고 어려운 주제임에도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 작품의 힘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인정투쟁을 관객 개개인의 보편적 경험과 공감으로 이끌어 내기에 이 연극은 친절하지 않다. 한동안 고민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연극을 읽는 재미이기도 하지만, 딱히 신나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 ‘인정투쟁;예술가편’

공연날짜:2019년 10월 29일-11월 16일
공연장소:두산아트센터 space111
공연시간:95분
관람연령:14세 이상
제작진:작 연출 이연주
출연진:강보람, 강희철, 김원영, 김지수, 백우람, 어선미, 하지성

이숙정 객원기자

기자를 응원해주세요

기사 잘 보셨나요? 독자님의 작은 응원이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독자님의 후원금은 모두 기자에게 전달됩니다.

이시각 주요기사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카카오스토리2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