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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 범죄 인정하는데 재판 없이 용서해준 검찰

박슬기(26·가명) 씨는 2016년 대학교 같은 과 선배 A(27) 씨에게 성추행당했다. 강간미수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선배에게 느낀 배신감, 학내 악의적 소문에 대한 두려움, ‘왜 같이 술을 마셨을까’하는 자책감에 3년을 지옥 속에 살았다. 박 씨는 성폭력 상담센터의 도움으로 지난 4월 경찰에 A 씨를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경찰은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넘겼다.

그러나 검찰은 A 씨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A 씨의 강제추행 범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검사가 A 씨를 재판에 넘기지 않은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엄벌만을 요구하며 합의에도 응하지 않았던 박 씨다. 그러나 검찰은 ‘서로 호감이 있던 사이다’, ‘피해자가 먼저 스킨십 했다’ 등을 이유로 박 씨의 거부에도 A 씨가 범행을 저지를만했다고 판단했다. ‘남자라면 그럴 수 있지’, 검찰의 불기소 이유에 깔린 시각이다.

대법원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
대법원 조형물 '정의의 여신상'ⓒ뉴시스

수사기관서 ‘강제추행’ 혐의 인정
피해자, 3년간 자책하며 불면증·거식증 시달려
뻔뻔한 가해자 태도에 고소 결심

박 씨가 제출한 경위서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박 씨는 2016년 평소 호감을 가지고 연락하던 과 선배 A 씨와 저녁을 먹은 뒤 A 씨의 자취방에서 술을 마셨다. A 씨는 계속해서 술 마실 것을 강요하며 박 씨를 만취하도록 만든 뒤 스킨십을 유도했다. 술에 취한 박 씨는 A 씨에게 먼저 입을 맞췄다. 그러자 A 씨는 박 씨의 신체 일부를 만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박 씨는 ‘내 몸을 만지지 말라’라며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A 씨는 멈추지 않았다.

수사기관에서 인정된 A 씨의 범죄 사실은 강제추행이다. 검찰에 따르면, A 씨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스킨십을 거부하는 피해자의 다리를 강제로 벌려 피해자의 속옷 위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갖다 대고 비비는 등 피해자 의사에 반해 강제로 추행했다. 박 씨 측 변호인은 A 씨가 박 씨의 몸 위에 올라타 강하게 누른 뒤 속옷을 벗기며 성관계를 강요한 점 등을 근거로 강간미수에 해당한다고 의견서를 제출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뒤 박 씨는 A 씨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A 씨는 ‘인기 많은 내가 너와 사귀어주지 않아서 미안하다’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다고 박 씨는 말했다. A 씨는 동아리 회장을 하는 등 학교 활동을 활발히 했던 사람이었다. 이후 학내에서 박 씨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일로 지방에서 학교생활을 하던 박 씨는 휴학하고 서울로 이사까지 왔다.

졸업했다고 A 씨가 그의 인생에서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학교 친구들의 SNS에 A 씨 사진이 주기적으로 올라왔다. 박 씨는 자신과 달리 잘살고 있는 A 씨를 볼 때마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손에 멍이 들 정도로 바닥을 내려쳤다”라고 말했다. 취업 이후에도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탓에 박 씨의 회사와 A 씨의 회사가 공동 작업을 하는 일도 있었다. A 씨의 회사 이름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고 박 씨는 전했다.

광주지역 예술인들과 여성단체는 17일 오후 5·18민주광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진행하고 있는 #Me_Too 운동에 함께하는 #With_You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
광주지역 예술인들과 여성단체는 17일 오후 5·18민주광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진행하고 있는 #Me_Too 운동에 함께하는 #With_You 촛불문화제를 열고 있다.ⓒ김주형 기자

박 씨는 사건 이후 자책감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3년 동안 A 씨를 고소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왜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을까’, ‘왜 뽀뽀를 했을까’, ‘왜 제대로 따지지 못했을까’라고 자신을 탓하며 박 씨는 분노, 스트레스 등으로 불면증과 거식증에 시달렸다. ‘여자가 먼저 유혹했다’라며 박 씨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주변의 시선도 한몫했다.

지난 3월 해바라기센터, 지역 성폭력 상담센터 등에서 상담을 받고서야 박 씨는 A 씨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처음부터 고소할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된 사과를 받고 싶었다. 박 씨는 3년 만에 A 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A 씨는 “싫다는 의사 표현을 무시하고 지속해서 무력 사용해서 추행한 점 인정하고 정말 미안하다”라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반성하지 않는 A 씨의 태도에 박 씨는 고소를 결심했다.

강제추행 했지만, 재판 안 받아도 된다?
가해자 논리로 성범죄자 면죄부 준 검찰
“검찰도 내 탓…너무 억울하다”

A 씨는 용서받았다, 검찰에게. 경찰은 사건을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A 씨에 대한 처벌만을 바랐던 박 씨는 기소 전 검찰이 합의를 유도하는 형사조정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9월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A 씨에 대한 기소를 유예한다고 밝혔다. 죄가 없어서 무혐의 처분한 게 아니라 죄가 있지만 재판에 넘기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검찰은 “피의 사실은 인정된다”, “사안이 가볍지 않다”라면서도 “피의자는 동종 범죄 전력이 없다”, “피해자와 피의자가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관계였다”라고 불기소 이유를 설명했다. 또 “피해자가 먼저 피의자에게 입맞춤하자 피의자가 피해자의 가슴과 엉덩이를 만졌고, 피해자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피의자가 이 사건 범행으로 나아가 그 범행 경위에 참작할 사정이 있다”라고 봤다.

이어 “피해자가 당시에는 남녀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고소하지 않았다고 진술하는 등 이 사건 범행으로 인한 피해 정도가 매우 중하다고는 보기 어렵다”라며 “우리 청 시민위원회에서 본건을 심의한 결과 기소유예 처분이 타당하다고 의결한 점 등 그 정상에 참작할 사유가 있다”라고 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양지웅 기자

전형적인 가해자 중심주의였다. 검찰은 피해자를 탓했다. 피해자가 먼저 입을 맞췄으니, 범행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했다. 이른바 ‘썸 타는 관계’에서 여자가 스킨십을 하면 이후에 남자는 여자의 거부 의사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다. 박 씨는 “연인, 부부 사이에도 강제추행을 처벌하는데, 호감 사이라고 면죄부를 주는 게 말이 되냐”라며 “검찰도 내 탓을 하는 기분이다. 고통스러운 조사 과정을 참은 대가가 이건가, 너무 억울하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진술을 꼬투리 잡아 피해를 축소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사건 당시 가해자가 너무 당당하게 내 탓을 해서 내가 예민한 건가,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일인가, 하고 생각했다’라고 진술했다. 성폭력 통념 때문에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는 보편적이다. 박 씨 역시 상담 이후 피해를 인지했다. 그러나 검찰은 모든 맥락을 무시한 채 해당 진술만을 잘라 피해가 가볍다고 본 것이다.

피해자 합의 없이 기소유예 처분이 나온 것도 이례적이다. 박 씨 측 정수경 변호사는 “강제추행 사건에서 피해자가 합의하고, 가해자가 초범이면 (재범 예방) 교육 이수 조건부 기소유예가 많이 나온다”라면서도 “그러나 피해자 합의 없이 기소유예 결과가 나온 것은 이례적이다. (검찰이) 피해자가 별로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박 씨는 “기소유예가 나온 뒤 가해자 측은 SNS에 ‘이제 행복하자’, ‘가족을 지키자’라며 신난 듯 사진을 올리고 있다”라며 “사건이 발생한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항상 지옥이다. 특히 기소유예 이후에는 정신과 약 없이는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고통받고 있다”라고 호소했다. 그는 “항상 이어졌던 솜방망이 처벌, 가해자 중심의 수사기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현재 박 씨는 검찰의 처분에 불복해 수원 고등 검찰청에 항고를 낸 상태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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