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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보] “조선학교 학생을 응원하는 기적의 ‘꽃송이’가 활짝 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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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인이지?"
1학년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말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일본말이 아니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물었습니다.
"아니다. 유사는 조선사람이야."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아주 놀랐습니다.
"조선사람?!"

- 재일동포 학생들의 문학작품집 '꽃송이'에 실린 니시고베조선초급학교 4학년 김유사 학생의 글 <조선사람> 중에서.

멀지 않은 이역의 땅에서는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아는 말과 글이라고는 일본어뿐인 이 어린 학생은 얼마나 어리둥절했을까. 일본의 유치원과 학교를 다니면서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일본인의 정신을 교육받던 김유사 학생은 '우리학교'에 들어갔다. 우리말과 글, 역사를 배우면서 자신이 '조선사람'임을 자각하게 됐다. 그 자긍심을 글의 제목으로 지었다. 지금 이 순간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이야기다.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일본 도쿄의 문부과학성 앞에서는 익숙한 우리말 외침이 울려 퍼진다. "조선학교를 차별하지 마라!" 조선학교 학생들이다. 벌써 7년째다. 동포사회에서는 '금요행동'이라고 부른다. 2013년 2월 아베 내각이 들어서자마자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에 대상에서 배제한 뒤 시작된 싸움이다. 이렇게 길어질 줄 처음에는 그들도 알지 못했다.

잔뼈 굵은 통일운동가를 향한 일본인의 호통
"재일조선인 문제를 빼놓고 무슨 통일운동입니까!"

손미희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한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손미희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한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남쪽에서도 '민족교육'을 사수하기 위한 동포들의 싸움에 어깨걸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 정부의 민족·인종 차별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남쪽 사회의 목소리를 모아내고 동포들과의 연대에 앞장서는 손미희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도 그 중 한 사람이다.

"2013년 2월 20일 아베 정부는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 제외를 단행하면서 다른 외국인학교는 다 포함시켰어요.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 간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는 못 할망정 오히려 동포들을 차별하고 박해하는데 같은 동포가 힘을 모으지 않으면 누가 대신 싸워주나요. 그래서 이듬해인 2014년 6월에 우리학교 시민모임을 발족한 뒤 그해 10월부터 우리학교 지지방문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문부과학성 담벼락을 향해 하염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손 대표의 가슴에 가장 먼저 올라온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재일동포 6세가 태어날 때까지 분단을 물려주는 동안, 일본 땅에서 해방을 맞지 못한 동포들은 여전히 분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통일조국에 돌아갈 때까지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70년이 넘도록 싸워온 동포들 옆에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이 미안했다.

손 대표는 남쪽 사회에서 전국여성연대를 이끌고 여성운동과 통일·평화운동에 앞장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의 옛 이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힘써왔다. 남편인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와 함께 진보운동의 콤비로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인생의 전환적 계기를 가져온 만남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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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간 과거사 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여성연대를 대표해서 일본을 방문한 2013년 어느 날, 한 일본인 퇴직교사를 만나게 된다. '고교무상화에서 조선학교 배제를 반대하는 전국연락회' 하세가와 가즈오(長谷川和男) 공동대표. 동포 사회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손미희 선생 이름은 많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손 선생이 여성운동과 통일운동 분야에서 의미 있게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조선학교 문제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적 있으십니까?…(중략)…통일운동 한다면서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빼놓고 무슨 통일운동입니까! 비겁한 것 아닙니까! 한국에서 온 통일운동가라는 사람에게 꼭 이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손 대표는 입만 꾹 다문 채 "미안합니다"라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반도(조선반도)의 남과 북에만 분단이 있고, 통일도 남과 북이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죠. 하지만 분단의 복합적 산물인 '조선학교' 문제가 있는데, 이걸 외면하고 통일운동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해외 동포들과 함께 하는 통일운동으로 발전해야 하고, 그 길을 피해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한 거죠."

'우리학교'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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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은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라고 부른다. 일본에 강제징용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은 1945년 해방 직후 우리말과 글, 우리 문화와 역사를 어린 아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국어강습소를 세웠다. 고향 땅에 돌아가면 당당한 조선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조선학교의 시작이다. 한때 일본 전국에 500곳(학생 수 4만4천여 명)이 넘었지만, 현재는 조선대학교를 비롯해 60여 곳(학생 수 8천여 명)의 학교에서 유치반과 초·중·고급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해방 당시 일본에는 200만에 달하는 동포들이 살았지만 현재는 60만여 명이 남아있다. 많은 동포들은 조국이 분단되면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남과 북이 아닌, 통일된 나라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땀과 눈물로 조선학교를 지켜왔다. 동포들은 '지식 있는 자 지식을, 힘 있는 자 힘을, 돈 있는 자 돈을!' 구호를 내걸고 헌신했다. '조선학교 폐쇄령'에 맞선 4.24교육투쟁은 빼 놓을 수 없는 피의 발자취다.

하지만 아베 정부는 2013년 2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와 북쪽의 관계를 문제 삼아 조선학교에 대한 고교무상화 완전 배제 조치를 단행했다. 일본에 존재하는 모든 외국인학교와 고등학교에는 적용하지만 조선학교만 안 된다는 명백한 차별이었다. 올해 10월에는 조선유치반에 대한 유아교육‧보육무상화(유보무상) 배제 조치도 취해졌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과 똑같은 세금을 내고 살면서도 부당한 각종 차별과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제도에서 배제되고 사회에서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손미희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한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손미희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공동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한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철수 기자

"2014년 10월에 남쪽에서 조선학교 투쟁 지지방문을 한 사실이 당시 일본 조간신문에 조그맣게 났습니다. 조선학교 어머니회에서 그걸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해요. 수십 년을 싸워도 일본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는데, 고향 땅에서 와서 연대하니 보도가 되고 고마웠나봐요. 동포들은 일본에서 차별을 당하면서 오랫동안 억눌려왔는데, 고향 땅에서 사람들이 와서 일본 관리들에게 '이놈들아!' 고함 치면서 싸우고 손 잡아주는 모습들이 동포들에게는 큰 힘이 됐다고 해요."

지금까지 우리학교 시민모임은 13차례에 걸쳐 지지방문을 했다. 2014년 첫 방문 때 동포들과 약속을 한 것이 있다.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금요행동을 할 때 우리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함께 행동하겠다'고.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같은 마음으로 싸워서 반드시 이기자'고. 그렇게 시작한 서울 금요행동이 11월 22일(금)로 벌써 246차를 맞았다. 그동안 각종 집회와 기자회견은 물론 1인시위, 각종 캠페인과 플레시몹, 항의서한 전달 등 안 해본 것이 없다.

"처음엔 1~2년이면 끝날 줄 알았죠. 일본대사관 앞에서만 하는 게 아니에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금요행동 시간이 되면 자신의 노동현장에서 응원의 메시지를 들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공유하죠. 전국에서, 심지어 해외여행 중에도 피켓을 품고 다니다가 금요일이 되면 SNS에 올려요. 그럼 순식간에 일본의 동포사회에도 퍼져나가고 함께 연대의 의지를 다집니다. 이런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동포사회에 큰 활력이 된다고 해요."

남쪽 고향과 일본에서 함께 피어난 기적의 '꽃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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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희 선생, 혹시 '꽃송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손 대표는 지난해 11월 해외동포들과 아베정권 규탄 국제선언문을 손에 들고 지지방문을 했을 때 동포사회 신문사 '조선신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그 자리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꽃송이'.

조선신보사는 1978년부터 매년 조선학교 초급부 2~3학년부터 고급부 3학년까지 학생들의 글을 모집하고 있다. 해마다 일본 전역에서 1천여 편 가까운 시와 작문이 우리글로 응모된다. 전국적 규모로 진행되는 일종의 '우리글 백일장'이다. 그 작품들을 모은 문집의 이름이 꽃송이다.

여기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면 학생들은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23년간 꽃송이 작품 심사 등에 관여한 경험이 있는 조선신보사 기자가 남쪽 동포들에게도 작품들을 소개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어린 동포들이 잘 자라나고 있다고.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고 있다고.

"4.27 시대에 정말 반가운 일이죠. 예쁜 책을 한 번 만들어보자 해서 바로 작업에 들어갔어요. 우선 100편을 달라고 해서 교사 등 7명의 엮은이가 모여서 작품을 읽고 골라내고 일일이 편집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올해 4.24교육투쟁일에 맞춰서 출판기념행사 날짜를 잡아놓고 시간을 쪼개가며 추진했어요. 처음엔 3천권을 찍어내서 일본에 500권을 보냈는데 동포사회에서 책을 갖고 싶다고 난리가 났어요. 학생들 사이에서 '야, 너 남쪽에서 유명한 작가가 됐다며?' 하는 인사가 오가고, 어른들도 아들 딸, 손주의 작품이 실린 이 꽃송이를 간직하고 싶어하니까요"

우리학교 시민모임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 동안의 학생 응모작 입선 작품 중 52편을 골라 담았다. '꽃송이 - 우리는 조선학교 학생입니다' 이름을 달았다. 표지에는 천진한 얼굴로 등교하는 조선학교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도 실었다. 지난 6월 우리학교 시민모임 12차 방문단이 찾아갔을 때는 꽃송이에 실린 작품을 쓴 주인공을 일일이 찾아가 전달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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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3쇄 1만부의 꽃송이가 나왔다. 남쪽에서 발간해 전달된 꽃송이는 동포들에게 그저 '책'이 아니었다. 꽃송이 발간사업을 동포사회와 공동으로 본격 추진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는 학교당 20권씩 비치하는 것을 목표로, 11월 말까지 3천권 전달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학생들의 글을 읽고 느낀 벅찬 감동을 동포사회와 다시 나눠보자는 것이다.

"조선학교의 어떤 선생님은 '우리의 꽃송이가 남쪽에 가서 기적의 꽃송이로 피었다'고 표현하시더라고요. 정말 뜻깊은 일이죠. 이번에는 1978~1983년까지의 작품을 모아서 '우리는 왜 민족교육을 하는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꽃송이 2집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고향 땅에 광주항쟁이 벌어져 동포사회가 함께 가슴으로 아파했던 시기이기도 하죠. 당시 어린 학생이었을 글쓴이들이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도 영상에 담아서 QR코드로 삽입할 계획이에요. 그렇게 연도별로 하나씩 모아나가면 언젠가 수십 편의 꽃송이가 알록달록 피어나겠죠?"

요즘 남쪽 출판시장의 사정이 녹록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1만권을 찍어낸 꽃송이 사업의 성과는 대단한 것이다. 갈수록 아이들을 조선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남쪽에서 엮어 보낸 꽃송이는 동포사회에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남쪽 선생님들은 같은 나이대의 학생들이 꽃송이를 읽고 쓴 글을 모아서 동포사회와 나누는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꽃송이 사업은 북쪽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북쪽 동포들이 모두 보는 노동신문 10월 7일자 <민족의 넋을 이어가는 이역 땅의 꽃송이들> 제하의 기사에서 관련 소식을 보도하기도 했다. 신문은 남쪽의 시민단체가 꽃송이를 동포사회에 전달한 사실을 전하며 "재일조선인 운동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보여주는 시대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재일동포들은 모든 것을 바쳐 안간힘을 쓰고 조선학교를 지켜왔다. 학생들의 자긍심도 대단하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조선민족 핏줄을 가졌다고 해도 조선학교를 안 다녔으면 아마 일본 사람으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선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로서 살 수 있고 조선사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보다 통일을 기다리는, 남쪽이 '고향'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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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 중에는 제주, 함양, 부산 등 남쪽 출신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대개 남쪽을 '고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북쪽에 대해서는 '조국'으로 부른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동포들은 해방 후 자식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가르쳐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 사이 조국은 갈라졌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갖은 탄압을 다 겪었다. 16살 소년 김태일 열사가 4.24교육투쟁 과정에서 총에 맞아 희생되기도 했다.

하지만 남쪽은 어려운 환경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내려는 이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일본에 귀화해서 잘 적응해 살라"며 모르는 체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으면서 공식적으로 이들을 버렸다.

반면 북쪽은 1957년부터 현재까지 62년간 165차례에 걸쳐 484억4천373만엔(한화 약 5천250억원)에 달하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조선학교에 전달했다. 가장 어려운 시절에 그 돈으로 부지를 구해서 건물을 짓고 교과서도 만들 수 있었다. 또 '이국에 사는 우리 아이들도 조국의 과일 맛을 봐야 한다'며 감과 밤 같은 제철과일을 보내왔고, 학용품과 민족악기를 전해 받은 아이들은 "조국의 냄새가 난다"며 기뻐했다고 한다. 동포들은 아직도 길에서 감과 밤을 보면 당시의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고 회상한다.

"한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여러분 같으면 어디가 고향이고, 어디가 조국이겠습니까. 태어나긴 남쪽에서 태어났지만 우릴 믿고 손을 잡아준 건 북부 조국입니다'라고. 그럼에도 동포들은 남과 북이 통일되면 남쪽 고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요. 어린 아이들도 남쪽을 '고향'으로 부르죠. 누구보다 통일을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재일동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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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사회는 조선학교에 대한 무상화·보조금 배제 정책에 맞서 도쿄·오사카·아이치·히로시마·후쿠오카 등 5개 지역에서 소송전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2017년 7월 19일 히로시마 재판을 시작으로 부당판결은 거듭되고 있다. 그해 7월 28일 오사카 재판 1심에서 이긴 기쁨 역시 최고재판소 부당판결로 이어지며 오래 가지 못했다. ▲2013년 유엔사회권규약위원회 ▲2014년 유엔인권차별철폐위원회 ▲2018년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 등 국제사회의 잇따른 '차별철폐' 권고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이에 남쪽 시민사회는 물론 일부 정치권에서도 일본의 조선학교 탄압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올해 국정감사에서 "고교무상화 제외 문제는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로 확정된 것"이라며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와 관련된 문제라는 점 등에서 정부 차원의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동포사회를 지원하기 위해 1955년 결성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조선학교에서 민족교육의 질과 양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고, 일본 정부의 탄압에 맞서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해왔어요. 하지만 남쪽에서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동포사회를 싸잡아 이념적으로 규정하는 태도가 강합니다. 동포들이 우리를 볼 때마다 어떤 얘기를 가장 많이 하는지 아세요? '제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봐주세요. 우리와 함께 해주세요'라는 호소입니다. 재일동포의 문제를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함께 손을 잡아야 해요. 분단사회를 살고 있는 현재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니까요."

"민족교육을 지켜내기 위해 수십 년간 싸워온 재일동포들이 지금 가장 어려운 고빗길에 있습니다. 꽃송이 출판 사업은 조선학교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응원하는 작은 시도입니다. 그 아이들을 응원하는 일을 우리 말고 또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조선학교 학생들은 남과 북, 일본의 사이에서 통일의 오작교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새싹입니다. 다 같이 뜨겁게 응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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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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