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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데리고 후쿠시마 핵발전소 500Km 밖으로 피난했다”
후쿠시마 시민 카토 린 씨가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과 방사능 위험’ 국제세미나에서  후쿠시마 사고와 주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발제하고 있다. 2019.11.28
후쿠시마 시민 카토 린 씨가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도쿄 올림픽과 방사능 위험’ 국제세미나에서 후쿠시마 사고와 주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발제하고 있다. 2019.11.28ⓒ정의철 기자

"2011년 3월 11일 사고 이후, 후쿠시마시 방사선량이 사고 전의 6백 배가 됐다. 후쿠시마는 안전한가? 이대로 여기 살아도 좋은가?"(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 리포트 중- 카토 린)

한 후쿠시마 주민이 일본 정부가 피난구역으로 지정하지 않았던 지역에서 피폭의 위협을 느껴, 딸과 함께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탈핵에너지전환국회의원모임, 반핵의사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공동주최로 2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3세미나실에서 '도쿄 올림픽과 방사능 위험' 국제세미나가 열렸다.

일본 후쿠시마 주민인 카토 린 씨는 이날 '후쿠시마 사고와 주민의 삶'이라는 주제로 이날 발표했다.

그가 살던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는 사고가 발생한 핵발전소에서 북동쪽으로 60km로 떨어져 있다. 사고 당시 일본 정부는 원전 사고 반경 20km 지점까지만 피난 지시를 내렸다. 이 때문에 그가 살고 있는 지역은 일본 정부의 대피 명령 대상이 아니었다.

카토 린은 "많은 사람들이 '60km까지는 방사능 영향이 없겠지’라고 생각했다"며 "그러나 후쿠시마 핵발전소에서 흩뿌려진 방사성 물질은 60km까지 떨어진 우리 도시까지 날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2011년 3월 11일) 직후인, 그해 3월 15일 일람표를 보여주며 "제가 살던 도시에서 24.24μSv(마이크로시버트)의 방사선량이 계측됐다"며 "이 수치는 사고 전의 600배에 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카토 린은 그때부터 피난 전까지 공간선량을 근거로 초기 피폭량을 대강 계산했더니 11일 동안 1.5mSv(밀리시버트)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연간 허용 피폭선량을 1밀리시버트로 권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카토 린 씨는 고작 11일 동안 연간 허용량을 넘는 피폭을 당한 것이다. 현재 일본 정부는 국제 연간 허용피폭선량에 20배인 20밀리시버트를 기준으로 잡고 있다.

그는 핵발전소 사고 후 매일 저녁 '배가 아프지 않은 설사'를 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피폭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정보를 구하러 다녔고, 체르노빌 사고 때 300km 권내에 핫스팟이라고 불리는 고선량 지대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후쿠시마에서 300km 이상 떨어진 장소로 피난을 가기로 판단했고, 곧 딸을 데리고 후쿠시마에서 약 500km 떨어진 오사카로 떠났다.

그는 아버지와 동생 가족과 이별을 고하던 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인근에서 살던 아버지와 동생 가족은 '방사선 전문가도 일본 정부도 후쿠시마현도 안전하다고 하니까 피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냉랭하게 말했다고 한다. 떠나기로 한 2011년 4월의 어느날, 그는 아버지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버스 터미널으로 향했다. 버스 터미널이 가까워지자 평소에 말이 없는 아버지가 불쑥 '오사카 쪽이 아이에게는 좋겠다. 힘내라'고 말해줬다고 한다.

카토 린은 '왜 우리는 아버지와 동생 가족을 남기고, 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먼 장소로 피난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건강하게 살 수 있을 있을 것인가'하는 온갖 생각이 들어, 오사카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고 고백했다.

피난 이후 8년이 지난 올해 2월, 후쿠시마에 살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2015년부터 심근경색을 수차례 겪었고 4년 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고 한다.

카토 린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후쿠시마에 갔다가 자신이 살았던 주택 앞에 고선량 토양을 제염해 담아둔 포대자루가 산처럼 쌓인 것을 봤다. 그는 "그 자리에 다가가면 방사선량이 팍팍 올라갔다"고 전했다.

그는 오사카에 정착한 이후 설사가 바로 멈췄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이상 증상은 계속 됐다. 그해 여름 쯤엔 팔과 다리 안쪽에 이전엔 본 적도 없는 큰 푸른 멍이 생겼고, 겨울 쯤엔 아래 앞니가 흔들거리며 빠질 것 같았고, 치료한 적이 있는 충치가 차례로 빠졌다고 한다.

그는 "핵발전소 사고로 가장 무서운 것은 피폭"이라며 "피폭 중에서도 몸 안에서 계속 방사선을 쏘아대는 내부 피폭이 무섭다"고 말했다.

그의 딸은 피난 직후에도 한참 대량의 코피를 쏟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피난한 다른 아이들도 비슷했다고 그는 말했다.

카토 린은 "아이들은 '후쿠시마에서 살겠다/살지 않겠다', '후쿠시마 식재료를 먹겠다/먹지 않겠다'는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며 "방사능은 단기간에 그 영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방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방사능 위험에서 지키는 것이 어른의 책임"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현재 그는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한 미래를 위해 국가를 상대로 배상 소송을 벌이며 싸우고 있다. 후쿠시마 핵 발전소 사고와 관련해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에 대한 재판에는 일본 전국에서 30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으며, 원고 수는 1만2,500명이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발표를 마치며 그는 "후쿠시마 주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양아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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