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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자라는 아빠] 아빠의 ‘낚시 육아법’ : 우는 척하기

평소처럼 어린이집에서 하원 하던 길이었습니다. 자동차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던진 짧은 말 한마디에 나는 큰 소리로 엉엉 우는 소리를 냈습니다. 아이가 나를 위로하듯이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좋았어.' 기대했던 대답이 아이 입에서 나왔습니다. 아이에게서 내가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던진 미끼를 아이가 문 것입니다.

방금 전 상황은 이랬습니다. 퇴근 후 어린이집에 가니 아이는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빠의 축하 폭죽 같은 감탄에 아이 표정에는 자랑스러움이 한껏 피어났습니다. 그림을 엄마에게도 보여주겠다며, 집에 갈 때 꼭 챙겨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가려 하지 않고 친구들과 마저 노는 데 열중했습니다. 시곗바늘이 밤 9시를 넘어가자, 아이는 슬슬 다른 친구들과 부딪히거나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졸린 것입니다. 우리 차가 아닌, 다른 친구의 차에 타려 하는 아이를 바둥바둥 안아 들고, 서둘러 차에 태웠습니다. 이제야 우리 부자간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아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오늘 아빠 안 보고 싶었어? 바깥나들이는 어디로 갔어? 간식은 뭐였어? 낮잠은 잤어? 뭐 하고 놀았어?"

어째서인지 다 모르겠다는 대답만 합니다. 그러다 아이가 질문했습니다.

"아빠 그림 챙겨왔어?“

노란 눈! 붉은 혀! 티라노사우르스
노란 눈! 붉은 혀! 티라노사우르스ⓒ필자 제공

동공 지진. '그림'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보다, 졸린 아이의 투정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회사 일에 지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울고 떼를 쓰게 되더라도, 지금은 적절한 표정과 어조로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며 달래주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쩌면 되레 화를 낼지도 몰랐습니다.

대답을 잘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머릿속 생각의 RPM이 '부우웅' 올라갑니다.

'지금은 울리면 안 돼! 집에서 다시 그리자고 할까? 싫다고 울 게 뻔해. 어린이집에 그림을 가지러 가자고 할까? 아냐. 빨리 집에 가야 해. 그냥 미안하다고 할까? 어쩌지.'

그림을 안 챙겼으니 그냥 집으로 가자는 일방적인 대답은 '떼쓰기 일발 장전'한 5살 아이가 받아들일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떼쓰기 방아쇠를 당기고 말 것입니다.

분주한 생각의 장막을 아이의 같은 질문이 뚫고 들어옵니다.

"아빠! 그림 챙겨왔어?!"

차는 삼거리 빨강 신호등 앞에서 멈췄습니다. 지금 타이밍에서는 설득보다 납득이 필요하다는 아이디어가 불이 번쩍이듯 스쳤습니다. 아이 스스로 만들어낸 답이라면 어렵지 않게 납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이가 울 때 내가 답을 제시하며 달래주었듯, 내가 울면 아이도 그렇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다다르자 나는 큰 소리로 우는 척을 했습니다. 누가 봐도 거짓 울음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프게 울었습니다. 아이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니까요.

"엉엉 어떡해. 그림을 놔두고 왔어~ 엄마한테 보여줘야 하는데~ 수현이랑 약속했는데~ 어떡해~ 엉엉"

아이는 이것이 장난임을 바로 눈치챘습니다. 새로운 놀이를 포착했을 때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어른을 흉내 내는 듯한 말투로 나를 달래었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내일 챙기면 돼. 어린이집에 잘 있으니까."
"엄마한테는 어떻게 보여줘? 엉엉"
"내일 보여주면 되지."
"정말 괜찮겠어? 엉엉"
"괜찮아."
"(울음 뚝) 그러면 되겠네! 그럼 집으로 바로 간다."

계획대로 되고 있어!
계획대로 되고 있어!ⓒ유튜브 캡쳐

낚시 성공. 아이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군요. 아이 스스로 답을 찾고 표현하도록 이끄는, 이른바 '낚시 육아법'이 창시된 순간이었습니다. 우선 아이를 울리지 않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우려하던 나의 수고는 증발했습니다. 앞으로는 우는 시늉 대신 다른 방법도 개발해봐야겠습니다.

한편 놀라웠던 것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는 내 평소 말버릇이 아이의 마음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가 꽤 적절한 타이밍에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아이는 아빠의 거울이라고 했던가요. 아이는 종종 뭔가를 엎질러 쏟거나, 물건을 망가뜨리는 등 사소하지만 번거로운 실수를 일으킵니다. 평소 그럴 때 '대체 왜 그랬어?'라며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거나, '이제 어떡할 거야!'라며 추궁하듯 아이를 혼내왔더라면 이번 낚시는 대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과장을 보태자면, 예상 밖의 상황에도 '그럴 수도 있다'로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아이 마음속에 심어준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이대로 더 나아가 타인의 허물이나 자신의 흠에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한 사람으로 자라나도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가 답을 찾도록 판을 깔아주는 낚시가 당분간 계속될 것입니다.

이 '낚시 육아법'은 아이 마음속에 적절한 언어가 차곡차곡 쌓여야 제대로 작동합니다. 그것은 결국 양육자인 나 자신의 언어를 평소에 가꿔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군요. 오늘은 좋았지만 또 모르죠. 언젠가 아이에게서 서운한 소리가 되돌아올지. 괜히 조심스러워집니다.

오창열 정신건강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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