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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갑의 수요뮤직] 가장 정확하고 성의 있는 2019년 서울의 음악기록
9와 숫자들 4집 ‘서울시 여러분’
9와 숫자들 4집 ‘서울시 여러분’ⓒ제공 = 오름엔터

모던록 밴드 9와 숫자들의 정규 4집 ‘서울시 여러분’은 역작이다. 9와 숫자들이 그동안 발표한 ‘9와 숫자들’, ‘보물섬’, ‘수렴과 발산’이 모두 역작이었기 때문에 이 음반도 역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다. 한 장의 역작을 만들었다고 그 후의 작품이 자동으로 역작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까. 9와 숫자들이 내놓은 음반들을 호평한 이유는 음악에 담은 이야기의 방향과 깊이, 울림 때문이다. 9와 숫자들은 음반 숫자를 더할 때마다 시선을 넓히고 키웠다. 자신의 삶과 추억에서 출발한 음악은 상대와의 교감과 단절로 이어졌다. 그리고 3집 ‘수렴과 발산’에서는 ‘우리’의 이야기로 나아갔다. 모든 이야기는 이야기의 무게만큼 소리의 울림을 남겼다.

최근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존재와 경험과 욕망에서 출발한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고 꿈꾸는 것들을 모으고 정리하고 다듬어서 작품으로 내놓는다.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느끼는 만큼 말하는 정직함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상은 나라는 존재, 혹은 너라는 존재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나 혹은 너라는 프레임만으로는 세상을 온전히 담을 수 없다. 물론 나를 스쳐가는 세상, 내 안에 고인 세상을 기록하고 이야기 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주체가 반드시 작가와 동일한 나일 필요는 없다. 예술은 나를 더 깊게 들여다보는 일인 동시에, 너를 들여다보는 일이고, 내가 아닌 나들을 만나는 일이다.

9와 숫자들의 4집 ‘서울시 여러분’을 주목하는 이유

그럼에도 내가 아닌 다른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귀를 세우는 작품은 갈수록 드물다. 한 사람의 예술가는 자신의 목소리, 혹은 자신의 주변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데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하더라도 차츰 수없이 많은 다른 이들의 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목소리처럼 대신해야 한다. 신내림 받은 무당이 빙의하듯 다른 정체성, 다른 존재를 최대한 대변할 때 작가는 온전히 제몫을 다한다. 그리고 그가 옮긴 목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시선은 비로소 온전해질 기회를 만난다. 하지만 최근 한국문학작품에서 대하장편소설을 보기 어렵듯 예술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인간군이 크게 확장되지 않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대개 서울/대도시, 젊음, 대학졸업자 등으로 한정되는 시선에 사랑과 이별과 꿈, 직장생활을 반복하는 이야기는 세상에 비해 너무 작고 좁다.

그것이 9와 숫자들의 4집 ‘서울시 여러분’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9와 숫자들의 음반은 제목처럼 서울시에 사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서울에 한정되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10곡의 수록곡에 담은 사람들은 제각각이다. 첫 곡 ‘서울시’에서 “반듯한 빌딩 사이 볕들 날 없는 골목”을 주목하는 노래는 계속 흔하고 평범한 사람들, 존재하지만 빛나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9와 숫자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방식이 아니다. 대부분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어법으로 노래하는 곡들은 열 곡의 짧은 인물 다큐멘터리를 연결해 서울시 여러분이라는 모자이크 기록을 완성한다.

‘She’s International’에서는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여행사 직원 A의 목소리로 일과 자신만의 항해를 들려준다. ‘주부가요’에서는 “가정이란 미명 아래서/주부라는 오명을 입고/내 자신을 잊고 살아온” 여성의 목소리로 노래한다. 경쾌한 분위기의 곡임에도 숨겨진 사연은 가볍지 않다. ‘24L’에서는 전업 작가의 시선으로 “채워지지 않는 텅 빈” 마음을 증언한다. ‘I.DUB.U’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뒤늦은 방황기를 맞은 이의 결정을 노래로 부른다. ‘지중해’는 “카페 식당 술집 꽃집 다 좋았는데 남겨진 것은 몇 장의 연체 고지서”뿐인 커플의 한탄이 노래가 되었다. ‘그녀의 아침’은 여성 직장인의 고단하고 분주한 아침을 따라가며 여성에게 일상화된 현실의 폭력을 기록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삶을 들려주는 ‘고학년’은 어떤 노래보다 신랄하고 비극적이다. “난 높이 배워서 공무원이 될 거야”라는 노랫말은 “주부가요 뭐 전기밥솥인가요?”라고 묻는 ‘주부가요’, “흙엔 주식이 매겨지고 우리 지분은 단 한 푼도 없어”라고 쓸쓸하게 토로한 ‘지중해’, “뒤엉킨 인파 속 유쾌하지 않은 눈빛과 감촉 섬뜩함을 떨칠 새도 없이 지나쳐버린 정거장”을 빠트리지 않은 ‘그녀의 아침’과 함께 ‘서울시 여러분’ 음반을 2019년 서울의 현미경처럼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냈다.

9와 숫자들 4집 ‘서울시 여러분’
9와 숫자들 4집 ‘서울시 여러분’ⓒ제공 = 오름엔터

“노래가 서울에 사는 모든 이들을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이 노래가 껴안은 만큼의 삶을 느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다”

이 음반에는 상수동이나 성수동 같은 핫 플레이스에 대한 경탄이 없다. A매치 경기의 역동도 없고, 번화가의 화려함도 없다. 가진 게 별로 없고, 그래서 허덕이며 사는 사람들, 단절되고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다. 때때로 촛불을 들었을지 몰라도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사람들, 사실은 ‘아무 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들의 노래가 서울에 사는 모든 이들을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이 노래가 껴안은 만큼의 삶을 느낄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존중할 수 있다. ‘4학년’에서 노래한 초등학생의 삶, ‘물고기자리’가 노래한 청년의 삶, ‘Silver House’가 노래한 노년의 삶만이 아니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주부, 프리랜서, 취업준비생 등등을 아우르는 음반은 파편처럼 부유하는 제각각의 삶 사이를 연결하고 건너갈 다리를 놓는다. 가혹하고 비정한 오늘의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도 바로 우리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에서 싹튼다. 지금 연결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언젠가는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음반의 마지막 곡이 윤복희의 명곡 ‘여러분’ 리메이크라는 사실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번 음반에서 9와 숫자들은 모던 록과 기타 팝, 신스 팝 등의 장르를 적절하게 활용해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삶을 기록했다. 어느 때보다 시선은 넓어졌고 인물은 다양하다. 목소리에서 연민과 애정이 느껴질 뿐 아니라 때때로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She’s International’, ‘주부가요’, ‘그녀의 아침’에서는 여성들의 삶을 존중하며 따라간다. 편견이 없고 치우치지 않는 기록에 이전 음반들부터 한결같은 멜로디와 사운드의 매력이 더해지면서 9와 숫자들은 이제 중견 뮤지션의 경계를 완전히 넘어섰다. “빚으로 빚은 빛/밑으로 쌓은 위/기억을 압도하는 망각/점점 커져만 가는 차이”라는 ‘서울시’의 노랫말만큼 자본주의 도시 서울의 오늘을 적확하게 압축한 노래가 있는가. 이렇게 예술은 인간학이자 사회학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품이 있어 예술은 오늘의 뜨거운 일부이자 오늘을 바꾸는 역동이 될 수 있다.

‘24L’의 매혹적인 사운드 메이킹이나 ‘서울시’, ‘물고기자리’의 내밀한 목소리는 9와 숫자들이 음악 역시 깊고 단단한 밴드임을 다시 증거한다. ‘주부가요’를 구현하는 앙상블, ‘I.DUB.U’의 리듬과 키보드 사운드 뿐 아니다. 감칠맛 나는 ‘지중해’의 편곡을 비롯해 음반의 음악과 노랫말은 완전히 한 몸이다. 오늘의 이야기를 다채롭고 날카롭게 포착해 매력적인 음악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오늘을 말할 때 갖춰야 할 자세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9와 숫자들의 [서울시 여러분]은 가장 정확하고 성의 있는 2019년 작품이다. 다른 삶과 세상 앞에서 눈 감거나 관성으로 살지 않으려는 정신이 한 장의 음반에 송글송글 맺혔다. 이제 “서럽게 울고 또 울던” 이들의 손을 잡는 일,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이 음반을 들은 이들의 몫이다. 음악은 음악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자.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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