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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나는 이렇게 읽었다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표지이미지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 표지이미지ⓒ민중의소리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한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깊은 우물이란 넓은 우물인 것이다.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의 신간 「혐오표현을 거절할 자유」를 읽고 나는 그 깊이에 놀랐다. 그리고 그 깊이가 넓이에 기반한 것임을 발견하고 또 놀랐다. 이 책의 주제인 혐오는 2016년 출간된 「진보를 복기하다」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었다(pp.250-275). 그때 나는 이 주제를 여러 주제 중의 하나로만 읽었다. 그러나 저자는 한번 던진 문제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버리기는커녕 심연의 구렁텅이까지 자신을 몰고 가 우리에게 마침내 진주를 꺼내 보여준다. ‘혐오’라는 단어 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넓고 깊게, 게다가 중심을 잃지 않고 일관된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저자의 학문적 천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나에게 처음엔 법학으로 읽히다가 어디쯤엔가는 정치학으로 읽혔고, 마지막에선 윤리학으로 읽혔다.

법학
저자는 ‘철학적·정치학적 논점들이 매우 많은 주제인데다 실무가일 뿐인 필자로서는 이 논점들을 깊게 탐구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p.33)고 겸손을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의 발견은 저자가 철학적 사유를 치열하게 전개했기에 얻은 발견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긴 쉽지만 나에게 없는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자기의 안이 아니라 밖까지 보았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는 이처럼 법학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우선 저자는 역사주의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순수법학의 한계를 넘어선다.

‘「인간의 존엄론」은 이미 근대 헌법형성기부터 활발하게 제기된 견해이다. 권력의 전횡과 종교의 틀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존재를 확보하는 것이 당시의 과제였다’(p.189)

「인간의 존엄론」을 「권리」라는 말로 바꾸면 법의 형성과 함께 권리역시 형성되었다는 의미로 읽힌다. 소위 천부인권론은 몰역사적이고 근거를 댈 수 없기에 논리가 아니라 주장이다. 법과 권리는 역사 속에서 발생했다. 대담한 가설을 적용하면 발생했다는 것은 소멸한다는 의미이기도하다. 역사·사회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체제의 변화와 함께 생성·발전·소멸한다. 역사적 방법론이란 법학내부의 완결되고 폐쇄된 순환논리를 추구하는 순수법학이 아니라 법 밖에서도 법의 관계를 설명하는 객관적이고 열린 방법론이다. 따라서 저자는 법의 발전을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근거의 변화를 통해서도 설명한다.

‘혐오표현이 확대되지 않게 하려면 다수 시민들이 처한 불안을 줄일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개혁이 진전되어야 한다.’(pp.302-303)

또한 저자는 자유주의법학의 논리 틀을 회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부딪친다. 자칫하면 이들의 긍정으로 읽기 쉽다. 그러나 책 전편에 흐르는 혐오에 대한 주제는 저자가 이들 법철학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음을 확인케 한다. 저자는 우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민주주의 헌법은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p.83)
‘현대 헌법이 기본권의 주체로 전제한 인간은…상호인정의 원리에 따른 인간이다’(p.190)

이 정도의 논리마저 주류법학은 외면해 온 사실을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나 다원성과 상호인정조차 차이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차이는 대립에서, 대립은 모순에서 자신의 진리를 발견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 노랑과 파랑이 있다. 노랑과 파랑은 서로 무관심하고 다르다. 이런 전제에서 차이의 인정은 당연하다. 그러나 노랑과 파랑이 보색관계로 연관될 때 두 색은 대립한다. 보색이란 동일성과, 노랑과 파랑이라는 차이성의 통일에서 차이는 대립이 된다.

다원성은 상호무관심을 유지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다원성의 인정상태란 이미 무관심한 상태가 아니다. 인정이란 상호간의 인정관계이고 이 관계자체가 하나의 동일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동일성만 인정하고 차이는 부정하거나 차이만 인정하고 동일성을 부정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대립관계에 있는 일방이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자립성을 유지하려면 상대를 배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적대적인 상대를 제거하면 자신의 존립기반도 무너진다. 주인은 주인이기 위해 노예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은 노예가 제거되는 순간 자신을 주인으로 모실 노예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다.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종북과 동성애자의 다원성을 제거하려 한다면 그 다원성의 제거와 함께 자유주의자체도 붕괴시키게 된다. 상대를 배제함으로서 자신도 배제되는 대립관계가 바로 모순이다.

이 책 전체에서 일관되게 다루고 있는 혐오란 상대를 배제하고 심지어 제거하려는 대립관계의 다른 표현이다. 결국 저자는 차이의 인정만이 아니라 배제하기의 모순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원성의 인정만으로는 이 대립을 완화할 순 있으나 해결할 순 없다. 인정을 통한 해결은 혐오표현의 가해자들이 이런 완화와 지연에 동의·동참할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대립과 배제로 관계를 몰고 가는 주동자들이다.

‘혐오표현’이란 용어의 정의에서 부터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의 자유’가 왜 대립되는지에 대한 논쟁은 너무 흥미진진하다. 반론을 충분히 소개하고 근거를 대며 재반론하기에 진영논리에 선다는 불편함이 없이 우리는 진리에 다가서는 즐거움을 선사받는다. 또한 이 과정에서 법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내는 저자의 집요함과 성실함을 만나게 된다. 단 1그램의 라듐을 얻기 위해 수만톤의 광물을 정제하는 퀴리부인처럼 저자는 광범위한 참고자료를 동원하고 걸러낸다. 그러나 성실함에 더해 창의적이고 탁월한 정치적 안목이 없었다면 이 책은 평범한 법해설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치
저자는 종북이란 단어를 혐오라는 개념에 융합함으로서 종북좌파란 틀에서 혐오피해자란 틀로 프레임을 전환하는 데 성공한다. 배제대상일 뿐이었던 피해자들은 그 배제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로 새로이 탄생한다. 전체를 위해 배제되어야할 ‘부분’에서 ‘전체자체’로, 보편을 방해하므로 제거해야할 ‘특수집단’에서 보편적 인권을 가진 ‘보편자체’로, 주동과 피동이 뒤바뀐 것이다.

혐오표현을 주도하는 가해자들은 ‘종북게이’ ‘종북페미’(p.107)처럼 다양한 소수자를 하나의 적으로 주조해내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 피해자들은 이들 가해자들에 대항하는 주체로 단결하지 못했다. ‘나는 동성애자이지만 종북은 아니야’이런 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혐오표현’의 피해자란 개념을 통해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가장 억압받은 피해자가 자기의 억울함을 뛰어넘어 덜 억압받거나 다르게 억압받는 피지배자와 단결할 보편의 논리를 찾아냈다. 그 점만으로도 이 책은 법률문제를 넘어 정치주체를 확장하고 통일시켰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의 정치적 천재를 발견한다.

또한 저자는 혐오자체가 가진 정치적 측면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구분해낸다.

‘혐오표현은 사상의 자유시장이 없어도 표출되는데 아무지장이 없다. 오히려 과잉이 문제다…사상의 자유시장이 있다면 그곳에서 보호되어야 할 것은 「혐오표현」이 아니라 「혐오표현을 거절하고 비판하는 표현」이다’(p.206)

저자는 ‘과잉’으로서의 혐오표현이 권리가 아니라 권력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축적된 권리는 산술적이 아닌 기하급수적 권력으로 등장한다. 헤겔은 사면권에서 이같은 권력을 발견한다. 사면권은 인민이 지배자에게 위임한 적이 없는 권한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법밖에 있다. 권리 대 권리가 아닌 권리 대 권력관계에서 평등한 상호인정관계란 성립되지 않는다. 혐오자체가 불평등한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혐오가 관념의 표시에 불과한 표현자체라면 그 관념의 인정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권력관계에 혐오표현이 들어오게 되면 그것은 바로 현실의 힘으로 전화한다. 언어의 물질성이다. 혐오표현과 혐오행동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한편 저자는 ‘더 가난한 자가 덜 가난한 자를 끌어내리는’ ‘약자의 항변’(p.101)에서 전가되는 모순, 심화되는 모순을 발견한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친위대가 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러시아 이반4세의 오프리치니나, 이승만의 서북청년단은 당시 사회의 최하층민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예를 제거하면 주인 자신도 제거된다는 원리를 깨달은 자들은 노예를 제거하는 대신 노예를 상층노예와 하층노예로 분리하여 대립하게 한다. 모순을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인은 노예를 제거하지 않고도 노예가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를 일시나마 유지할 수 있다. 약자의 항변은 전가된 모순관계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저자는 질문을 아예 바꿀 것을 제안한다.

‘누가 더 큰 피해를 입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누구도 이런 피해를 입지 않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pp.313-314)

인정관계의 불평등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을 넘어서 불평등을 만든 조건자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상대가 처한 조건을 바꾸지 않고 사상만을 바꾸겠다는 것은 사상의 도둑질이다. 칼 슈미트는 정치가 ‘적과 동지’를 나누는 일이라고 했다. 아감벤은 슈미트의 정치론이 결국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를 만드는 배제와 제거의 철학임을 폭로했다. 아렌트는 적과동지구분론은 정치실패의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정치성공사례에서 정치의 정의로 찾고자 하는 학자들은 비스마르크를 인용한다. 어떤 대립상황에서도 공통점이라는 가능성을 찾아내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스마르크에게 정치란 ‘가능성의 예술’이다. 그러나 ‘적·동지구분론’과 ‘가능성의 예술’론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완적이다. 가능성의 예술이 대립관계 해소라는 관념적 처방에서 그치지 않고 적대관계를 해결할 수 있으려면 대립관계의 근거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저자는 바로 객관적 근거자체의 변화에서 모순의 해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근거가 모든 모순을 해소하진 않는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발전시킨다. 상품교환의 모순이 화폐의 출현으로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것과 같다. 모순해소책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대립관계를 계속 해체하며 지연시키는 길과, 대립의 격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길이다. 전자의 길이 상품에서 화폐로 전화하는 모순을 지연시키고자 화폐사용을 거부했던 푸르동의 길이었다면, 후자의 길은 상품이 화폐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하며 전가된 모순이 결국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붕괴시킬 것을 예측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한 맑스의 길이다.
어느 경우에도 그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종북페미, 종북게이가 아닌 혐오피해자라는 새로운 주체를 발견한 일이야말로 그래서 진정 정치적이다.

윤리
저자는 이 책을 종북표현에 대한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저자를 발견하게 된다. 정치적 지위의 정점에서 부당한 권력에 의해 패배한 지도자들은 피해자로서만이 아니라 비극적 영웅으로서도 남는다. 이름 없는 존재로 죽는 것보다 비극적 영웅으로서 최후를 마치고자 하는 것은 상징과 기호로서 자신을 남기려는 정치적 선택이다. 자신을 상징으로 적과동지의 대립관계를 지속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와 다른 선택의 길을 보여준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바로 혐오표현의 피해다. 피해자가 그 피해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피해자 자신의 마음의 변화다. 당신의 피해가 이만큼 컸다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주변의 노력은 피해자를 지탱해 줄 수는 있어도 피해를 극복할 수는 없다.’(p.317)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왕으로서 죽는 정치적 선택 대신 최하층의 시민으로 돌아가 성찰하는 윤리적 길을 택한다. 그리하여 왕이란 상징으로 물신화하는 길이 아니라 평등한 이웃으로, 관계자체로, 권력이 아니라 권리로, 연대하는 길을 택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혐오표현을 한 가해자를 적으로 만드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또한 현실에서 자신을 정치적 희생자이자 비극의 영웅으로 만드는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저자는 법으로도 정치로도 해결되지 않는 인간문제영역에서 상징으로서의 정치대신 존재로서의 윤리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 윤리를 통해 새로운 정치, 새로운 법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법과 정치와 윤리를 전체라고 가정하면 헤겔의 말처럼 “전체는 주체”이다. 주체는 전체로서 설명되어야 한다. 이 책은 혐오란 화두 하나를 들고 주체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길을 함께 걸어볼만 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시우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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