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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전쟁 같은 현실을 이기는, 작지만 아름다운 환상의 이야기, 연극 ‘환상동화’
환상동화_프레스콜_육현욱 윤문선 기세중 송광일
환상동화_프레스콜_육현욱 윤문선 기세중 송광일ⓒ스토리피

전쟁 같은 삶이라고 말한다. 박노해 시인은 ‘노동의 새벽’에서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가운 소주를 붓는다”고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했다. ‘전쟁 같은’이란 수식어를 들으면서도 아직은 어렸던 내게 ‘전쟁’이란 단어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삶의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면서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고, 예술도 피어난다.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 갇혔던 김수영은 포로 생활의 힘겨움을 생니를 뽑으며 견뎠다. 김수영은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나날이 한 개씩 없어지는 이빨을 보면서, 새롭게 내 정신을 가다듬고 내 시의 구심점이 사랑에 있다고 굳게 마음먹었지”라고 고백했다. 비참과 절망의 그 끝에서 김수영을 버티게 한 것도 예술이고, 사랑이다.

연극 ‘환상동화’는 전쟁 같은 현실과 사랑, 그리고 예술이 담긴 우리의 삶을 보여준다. 전쟁광대, 사랑광대, 예술광대가 신으로 등장해 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겠다고 싸운다. 전쟁광대는인간의 파괴본능과 전쟁의 이야기를, 사랑광대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예술광대는 영원불멸의 가치를 창조하는 예술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싸우던 세 광대는 결국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환상동화_프레스콜_육현욱 장지후 강하늘
환상동화_프레스콜_육현욱 장지후 강하늘ⓒ스토리피

그곳은 독일과 연합군이 전쟁을 벌이는 전장이다. 독일군으로 참전한 피아노와 음악을 사랑하는 ‘한스’는 부상 당해 버려진 전장에서 우연히 적군인 연합군 병사를 만난다. 그는 시인이었다. 그는 한스에게 총을 버리며 이곳이 전쟁터가 아닌 커피향이 은은하게 풍기며,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카페로 상상해보라고 한다. 한스는 적군의 목소리를 따라 환상을 품으며, 조금전까지 포성과 연기가 자욱했던 전장은 어느새 연합군 지역에 있는 카페로 바뀐다.

그 카페엔 연합군 병사의 동생인 ‘마리’가 전쟁에 나간 오빠를 기다리며 춤을 추고 있다. 한스는 마리와의 만남과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운명은 언제나 가혹하다. 전쟁터를 뒤흔든 폭음은 음악을 사랑하는 한스에게서 소리를 빼앗았고, 춤을 추는 마리에게선 빛을 빼앗았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한스는 연합군 병사가 동생에게 부치려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그 카페를 찾고 ‘마리’를 만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마치 동화 같은 환상의 사랑 이야기를 펼친다.

한스와 마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았다. 내가 뜻하지 않았지만, 전쟁 같은 삶의 현장에 던져져 때론 피 터지는 생존의 싸움을 치러야 한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남보다 앞서기 위한 ‘노오력’과 피눈물없는 ‘승부욕’이 필요하다고 세상은 말한다. 환상을 품고, 꿈을 꾸는 이들을 향해 아직 현실을 모른다며 “꿈에서 깨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전쟁 같은 현실 속에서 그런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아주 조그만 곳에 있다. 예술과 사랑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파괴의 현실에 불안하게 흔들리지만, 그 흔들리는 작은 불빛 하나가 현실을 바꾸는 희망이 된다.

환상동화_프레스콜_송광일 백동현 한소빈
환상동화_프레스콜_송광일 백동현 한소빈ⓒ스토리피

한스와 마리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채워나간다. 사랑은 포성 가득한 전쟁터에 갇혀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귀가 된다. 사랑은 방공호에 갇혀 어둠 속에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눈이 되고 빛이 된다. 예술은 전쟁 같은 현실을 마법 같은 음악으로, 그리움 가득한 시로 바꾼다. 예술은 화약 냄새 가득한 현실을 헤이즐넛 향이 퍼지는 어느 카페로 만든다. 광대들의 말처럼 “현실은 환상이고, 환상은 현실이다.”

음악, 무용, 마임, 마술이 결합된 환상과 현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동화는 그렇게 다시 우리들 마음에 환상과 꿈을 품게 하고, 사랑과 예술을 담게 한다. 어쩌면 그것이 전쟁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닐까? 연극을 보고 나오는데, 문득 젊은 시절 보았던 ‘체 게바라 평전’의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자.”

연극 ‘환상동화’

기간:2019/12/21 ~ 2020/03/01
장소: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코튼홀
출연:강하늘, 송광일, 백동현, 장지후, 기세중, 원종환, 육현욱, 박규원, 최정헌, 한소빈, 윤문선
관람등급: 만 13세이상
관람시간: 110분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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