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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아닌 정혈” 대구 여성들의 ‘정혈대 연대’가 시작된다
영남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Ready for Radi(레디 포 래디·이하 RFR)가 지역 여성들을 위해 대구시설공단과 협력해 프로젝트 ‘작은 상자 안의 큰 연대; 정혈대 공유함 ’로 지난 한 달 간 대구역 지하상가 여자 화장실에 '정혈대 공유함'을 설치했다.
영남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Ready for Radi(레디 포 래디·이하 RFR)가 지역 여성들을 위해 대구시설공단과 협력해 프로젝트 ‘작은 상자 안의 큰 연대; 정혈대 공유함 ’로 지난 한 달 간 대구역 지하상가 여자 화장실에 '정혈대 공유함'을 설치했다.ⓒ영남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Ready for Radi

대구 여성들의 ‘정혈(精血)대 연대’가 시작됐다. “당신을 위해 다른 여성들이 준비했어요” 지난 한 달간 대구역 지하상가 여성 화장실에 생리대 공유함이 시범 설치됐다. 영남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Ready for Radi(레디 포 래디·이하 RFR)가 지역 여성들을 위해 대구시설공단과 협력해 진행한 프로젝트 ‘작은 상자 안의 큰 연대; 정혈대 공유함 <정혀리의 모험>’이다.

그날? 마법? 생리? 월경? 완곡한 표현 대신 RFR은 깨끗할 정(精)에 피 혈(血)을 써 ‘정혈’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다. 깨끗하고 맑은 피라는 뜻이다. RFR은 “남성의 정액(精液)은 깨끗할 정, 진 액을 쓰는데 여성은 ‘달마다 하는 것’이란 뜻의 월경이라 부르는 게 이상했다. 그마저도 생리, 마법, 그날로 바꿔 부른다”라고 말했다.

이어 “여성은 생리적 현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지 못하도록 사회·문화적 압박을 받아왔다”라며 “이에 기존 단어를 여성 중심적으로 대체해 정혈이 부끄럽고 숨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2016년 ‘깔창 생리대’로 떠들썩한 지 4년. 여전히 생리대 구비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 여성들을 위해 RFR은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여성 노숙인을 위해 설치된 영등포역의 생리대 공유함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다. RFR은 “정부는 뒤늦게 저소득층 여성을 대상으로 정혈대 지원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다지 많이 바뀌지 않았다”라고 비판했다.

현재 정부는 저소득층 만 11~18세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월 1만 500원의 생리대 구매 비용을 지급하고 있다. 저소득층 ‘낙인’을 두려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보건소에서 생리대를 지급하는 방식에서 지금 같은 바우처 방식으로 변경했다.

'정혈대 공유함'에 기존 생리대뿐 아니라 탐폰도 구비돼있다.
'정혈대 공유함'에 기존 생리대뿐 아니라 탐폰도 구비돼있다.ⓒ영남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Ready for Radi

정부의 선별 지원은 생리대가 여성에게 생활필수점인 점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RFR은 지적했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 비용은) 한 팩당 평균 5천 원 안팎인 정혈대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라며 “심지어 소득 수준을 증명해야만 지원받을 수 있는 선별적 복지 방식이다. 여성 노숙자들은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저소득층 여성이 주요 대상이지만, ‘정혈대 공유함’을 거치는 모든 여성이 이번 프로젝트의 대상이다. RFR은 “‘여성 간의 연대’라는 기치도 함께 담고 싶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은 정혈대가 없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상황을 겪어봤다. 시급한 상황에서 서로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여성들은 그들만의 결속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유와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시민들의 참여가 핵심이다. 지난 11월 텀블벅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목표 금액 130만 원을 훌쩍 넘은 242만 원을 모아 생리대를 구비했다. 생리대 업체 NOW(나우)로부터도 지원받았다. RFR은 “정혈대 지원으로만 끝나는 일시적인 캠페인이 아닌 지속적이며 시민 참여 유도적인 방법을 모색했다”라고 말했다.

시범 운영 뒤 설문조사를 한 결과, 긍정적인 평가가 다수였다. 이용자 만족 이유 중 1순위는 ‘갑자기 생리대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였고, 2순위는 ‘여성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였다. 이용자들은 ‘급한 상황에 사용할 수 있었다. 다음엔 제 것도 넣어두고 싶다’, ‘여성들의 자발적인 선의와 참여로 그치는 것이 아닌 국가 지원 사업으로 발전하길 바란다’, ‘생리대는 휴지처럼 어디서나 제공돼야 한다’ 등 답변을 했다.

서울시 여성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운동본부 회원들이 22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별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의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조례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19.10.22.
서울시 여성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운동본부 회원들이 22일 서울 중구 서울시의회별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의 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조례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2019.10.22.ⓒ뉴시스

궁극적으로 국가의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 한국 생리대 가격은 OECD 국가 중 가장 비싸다. 개당 평균 331원으로, 평균 181원에 그친 미국·일본과 비교하면 2배가량 높다. 이에 모든 여성 청소년에게 생리대를 무상 지급하는 지자체들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4월 경기 여주시를 시작으로 지난해 12월 서울시도 관련 조례안을 통과시켜 무상 지급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반면 국가 예산은 줄어들었다. 올해 여성가족부의 ‘여성청소년 보건위생물품 지원사업’ 예산안은 지난해보다 2억 6천만 원가량 감축됐다. 여가부 측은 청소년 인구 자연감소분에 따라 신청률을 하향 조정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들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지원책이 여성 청소년에 집중된 탓에 여성 노숙자가 배제되는 일도 있다.

정부의 공백 속에 고통받을 여성들을 위해 ‘정혈대 공유함’은 계속된다. RFR은 “앞으로 지하상가, 대구역, 동대구역 등 접근성이 높고 출입이 쉬운 장소에 정혈대 공유함을 설치할 계획이다”라며 “본 프로젝트 또한 대구시와 협업을 통해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운영이 이뤄지길 바란다. 이를 위해 대구여성가족재단과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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