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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숙 칼럼] 농사의 종말

개도국 지위 포기는 농업 포기 선언이다. 지난한 WTO협상 과정에서 강대국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은 농업을 제외한 부분에선 그런대로 합의가 이뤄졌다. 이마저도 ‘사다리 걷어차기’에 불과한 짓들을 과감히 처리한 강대국들의 후안무치는 이미 세계에 확인된 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문제는 도하개발아젠다(DDA) 이후 난항을 거듭하는 중이다. 후진국들이 받아낸 것이라면 ‘개도국 지위’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농업을 포기한 나라임을 국제적으로 선포했다. 농민들과는 단 한 번도 소통의 기회를 갖지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일방적 선언을 하고 말았다. 잃는 것보다 얻을 것이 더 많다는 논리였다. 당연히 농업을 잃고 농민을 잃을 것이다. 우리 밥상은 농산물 메이저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부터 개방농정을 경쟁력 강화란 허울로 포장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한 결과, 농업은 일정부분 확실한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재편됐다.

이로써 우리나라 농업은 다양성을 포용하는 농업이 아닌 단작과 규모화와 과학화로 대변되는 시장상업주의로 전락해, 농업생태계는 파괴되고 자본의 농업 진출만 가속화하기에 이르렀다. 일부 대기업이 농업 진출을 희망하다 좌절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기회만 되면 농업부문 투자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바라는 농업부문의 투자는 사실상 토지자본의 확보일 수도 있다. 이것이 가져오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시장지배력 독점의 문제, 환경문제, 토지개발의 문제 등 시장자본의 속성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전통적 농사의 지속가능성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규모화 된 농업인들이 경쟁력이 있는지, 지속가능성이 있는지의 문제도 검토되지 않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 결과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발표하고 있다.   2019.10.25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5일 서울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 결과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를 발표하고 있다. 2019.10.25ⓒ김철수 기자

홍남기 부총리도 그동안 정부는 농업을 개방하는 과정에서 ‘농업 개방 피해 보전’ 차원에서 정책을 시행해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이번 결정을 통해 한국 농업의 미래를 위한 투자 차원에서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언젠가 어디에선가 들어본 귀에 익은 말이라는 데에 문제가 심각하다.

문재인 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 것은 국내 농민들의 의사보다 다른 쪽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9년 7월 26일 “경제적 발전도가 높은 국가가 WTO 내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누리고 있다”며 WTO가 90일 내 이 문제에 실질적 진전을 이뤄내지 못하면 미국 차원에서 이들 국가에 대한 개도국 대우를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이 자동차 관세 부과, 한미 방위비 증액 등을 무기로 삼자 개도국으로서 유일하게 특혜를 유지했던 농업을 제물로 바친 것이다.

WTO 농업협상 개시 여부가 불투명할 뿐이지 협상이 진행되면 한국 농업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이나 미국산 쌀 가격이 우리 쌀의 5분의 1수준에 불과해 경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나마 수입쌀에 대한 관세(513%)로 버텨왔으나 이마저 무너지면 쌀농사를 지을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농업 전문가들은 개도국 지위가 사라지면 쌀 관세율은 513%에서 393%로 조정되며 고추는 270%에서 207%로, 마늘은 360%에서 276%로 낮아지는 등 8대 주요 기초농산물의 경쟁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으로 예측하고, 고정·변동직불금 등 연간 1조5천억원 가량의 농업 보조총액(AMS)도 반 토막 날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의 예측과 농민들의 전망과 느낌은 또 다르다. 쌀 관세율이 513%에서 154%까지 대폭 낮아지는 등 기초농산물의 관세율이 200%대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은 선진국형 수출국인 것이 맞지만
농업은 여전히 개도국 상태여서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모든 산업이 ‘선진국’인 것으로 왜곡되고 있다

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규탄! 자유한국당 해체! 민중생존권 쟁취! 재벌체제 청산! 한반도 평화실현! 2019전국민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WTO 개도국 포기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2019.11.30
30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규탄! 자유한국당 해체! 민중생존권 쟁취! 재벌체제 청산! 한반도 평화실현! 2019전국민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WTO 개도국 포기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2019.11.30ⓒ정의철 기자

자동차나 반도체 등 대부분 산업은 선진국형 수출국인 것이 맞지만 농업은 여전히 개도국 상태여서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도 모든 산업이 ‘선진국’인 것으로 왜곡되고 있다. 1년 농가소득 1000만원이 안되는 농가가 100만호에 달하는 나라가 어찌 농업선진국일 수 있는가. 1993년 개방농정 이후 농정당국의 ‘정책’은 없었고 늘 ‘대책’만 있었는데 이런 대책마저도 우리 곳간을 지켜내는 데엔 효과가 없었다. 농민 달래기용 대책과 농민에게 책임 떠넘기기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대책 없이 개도국 지위를 헌신짝 버리듯 포기했다. 이것이 과연 문재인 정부가 말했던 경쟁과 효율에서 벗어나 다원적이고 공익적 가치를 극대화해 지속가능한 농업, 농촌을 만든다는 농정철학이었는지 묻고 싶다. 국회가 내놓고 있는 공익형직불제도가 농민 모두에게 만병통치약인 양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가. 곡물 자급률은 21%지만 쌀을 제외하면 한 자릿수인 만큼 쌀을 포함한 농업은 주권이자 안보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이를 헌법에 반영하겠다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정치적 배신감마저 든다.

정부는 공익형직불제를 통해 대통령 공약사항이 이행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직불금을 통합하여 농가 단위로 지급하면 농업예산의 30%에 해당하는 돈이 직불금으로 투입된다. 총 2조4천억원다. 최소 0.5Ha미만 소농에게도 120만원을 주는 것으로 법이 통과 됐다. 그렇다고 소농들이 소득 안정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농산물 시장의 가격안정에 있다. 그것을 간과하고 정책을 시행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뿐이다. 적어도 기초농산물을 선정하고 시장가격이 하락할 때 물량을 긴급히 시장에서 격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농업의 지속가능 여부는 농가소득을 지탱하게 하는 것이고 그 장치는 최저가격보장제도가 되어야 한다.

개도국 지위 포기선언이 그동안 국민들이 상대적으로 값비싼 농산물을 소비하게 용인했던 것으로부터 전환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값싼 농산물로 인해 소비자의 선택권이 늘어날 것이며 이는 한국농업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호히 말하건대 이는 농사의 종말을 고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전문가들도 이제는 냉혹한 국제시장에 의해 식탁이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즉 식량주권이나 식량안보를 다국적 농산복합 농기업에 맡기게 된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늘어난다는 것은 역으로 농민들의 선택권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5천년을 이어온 우리 농사에 대한 국가폭력일 뿐이다.

한도숙 전국농민회총연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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