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8년 4월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선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김영란 재판장은 “피고 대한민국은 국가배상법 제 3조에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원고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 등에 관하여 공식인정하라”고 판결했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시민평화재판이지만, 원고로 재판에 참여한 1968년 베트남 퐁니·퐁넛마을과 하미마을 집단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두 명의 응우옌 티 탄(생존자의 이름은 응우옌 티 탄으로 같다)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생존자의 평화법정에서의 증언과 한국 내에서의 다양한 연대활동, 그리고 베트남 현지 취재를 통해 학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꾸준히 담아온 이가 있다. 바로 이길보라 감독이다. 이길보라 감독은 당시 촬영한 영상으로 영화 ‘기억의 전쟁’을 만들었고, 오는 2월 27일 개봉한다. 개봉을 앞두고 지난 14일 이길보라 감독을 만났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영화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탄 아주머니가
제가 베트남 참전 군인의 손녀인 것을 알고도,
한국에서 온 사람임을 알고도
‘따뜻한 밥 한술 뜨고, 자고 가라’고 하셨다.
이런 관용과 환대의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생각하게 됐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기억의 전쟁’은 개인적 질문으로 시작된 영화다. 우리 할아버지는 자신을 ‘베트남전 참전용사’라고 부르던 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집에 가면 월남전 참전 고엽제 후유증과 함께 얻은 훈장과 표창장이 자랑스럽게 걸려있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알게 됐다. 할아버지가 말하던 그 베트남과 이 베트남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의문을 가지고 베트남에 찾아갔다. 잔혹한 학살이 있었음을 직접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탄 아주머니가 제가 베트남 참전 군인의 손녀인 것을 알고도, 한국에서 온 사람임을 알고도 ‘따뜻한 밥 한술 뜨고, 자고 가라’고 하셨다. 이런 관용과 환대의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생각하게 됐고,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

베트남 전쟁은 사실 대한민국 사람들에겐 현대사인 동시에 가족사다. 우리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삼촌이, 형님이, 남편이, 또는 자신이 참전했던 전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벌어들였던 외화가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밑바탕이 됐다는 분석도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베트남 전쟁, 그리고 그 전쟁이 낳은 비극인 학살과 관련해 자유로울 수 없다. 이길보라 감독은 “우리 가족에게도 베트남은 베트남전이 가져다준 풍요의 물품과 함께 기억된다. 그런 기억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퐁니·퐁넛마을과 하미마을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생존자들이 온몸으로 증언하는 그날의 기억
이런 기억을 뒤로하고, 베트남은 이제 휴가를 떠나기 좋은 나라로, 박항서 감독이 국가대표 축구팀을 맡은 나라로 기억되고 있다. 집단학살이 있었던 퐁니·퐁넛마을과 하미마을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베트남 휴양지인 다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다. 수많은 한국인이 베트남을 찾고 있지만, 아무도 학살의 진실에 눈과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영화 ‘기억의 전쟁’은 그렇게 학살의 진실을 외면하는 우리에게 생존자들의 절실한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전쟁과 학살의 기억을 전하지만, 그 증언의 잔혹함과 처절함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늘을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몰랐던 학살의 기억과 삶의 기억을 목소리로, 온몸으로 증언했다.

“학살과 전쟁의 기억은 참혹하다, 영화에선 학살의 기억 그 자체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생존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전쟁은 참혹하고 끔찍하지만, 그럼에도 응우옌 티 탄아주머니가 매일 같이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는 모습. 자기 자신은 죽고 싶었지만, 희생자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담았다. 그리고, 자기가 본 것을 온몸을 사용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딘 껌과 전쟁 2세대로서, 2차 피해자로서 자기가 들었던 이야기를 전하려고 애쓰는 응우옌 럽의 모습을 전하고 싶었다. 응우옌 럽은 영화에서 ‘여기에 지금 한국 아이들이 와 있다. 한국 사회를 축복하고 싶다’고 물씀했다. 또 그런 말씀도 하셨다. ‘너희가 뭘 할 수 있겠어, 할아버지가 한 일은 할아버지가 책임지고, 아버지가 한 일은 아버지가 책임져야지. 이건 너희들이 책임질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저는 이 사람들의 이런 기억과 태도를 전하고 싶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학살이 많다.
심지어 아직도 한국인이 들어가지조차
못하는 마을도 있다.
한국인이 들어가면 인사도 받지 않고,
몰매 맞고 쫓겨난다.
이렇게 아직 증오로 가득한 마을이 있다.
이 모든 걸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
생존자들이 온몸으로 그날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는 건 아직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이었고, 약 9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한국 정부는 물론 베트남 정부도 이와 관련한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하미마을 위령비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거기에 최종적으로 희생자가 136명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누군가 돌로 희생자 숫자를 137명으로 수정했다. 희생자는 137명일 수도 있고, 138명일 수도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학살이 많다. 심지어 아직도 한국인이 들어가지조차 못하는 마을도 있다. 한국인이 들어가면 인사도 받지 않고, 몰매 맞고 쫓겨난다. 이렇게 아직 증오로 가득한 마을이 있다. 이 모든 걸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마을에는 수많은 위령비와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위령비와 증오비를 세웠다. 희생자들이 죽은 날이 같기에 해마다 같은 날 동시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런 증오와 비극의 기억이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베트남에 방문할 때마다 조심스럽다. 아무래도 영화에 등장하는 3명을 중심으로 방문할 수밖에 없는데 가끔 옆집 분이 길목에서 우리를 잡고 ‘너희 왜 우리 집엔 안 오냐, 나도 가족을 잃었는데 왜 응우엔 럽 아저씨네만 매번 가서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우고, 인사를 드리냐’고 한다. 마을 사이에도 갈등과 반목이 깊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화 기행을 다닐 때 어떤 마을에 위령비를 찍기 위해 방문했는데, 어떤 베트남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 관광버스에 오르셔서 말을 하셨다. ‘우리 마을에서도 사람이 죽었는데 왜 우리 마을엔 안 오냐. 다른 마을엔 가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면서 우리 마을엔 왜 안오냐, 50년이 지났는데 왜 한국 사람은 안 보이냐’면서 울면서 하소연을 하셨다. 여전히 그런 마을들이 남아있다.”
베트남 곳곳에 세워진 위령비와 한국군 증오비
하지만, 우리나라 곳곳엔 월남전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추모와 증오 그리고 기념
“우리는 ‘기억의 전쟁’을 여전히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전혀 다른 기억으로 50년 전을 추억하는 이들이 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은 지난 1987년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의 전신인 ‘따이한 클럽’을 만들어 1992년 5월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월남전참전기념비 건립운동을 벌였고, 수십 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훈련을 받았던 강원도 화천군엔 월남 파병용사만남의장이라는 시설이 세워졌다. 그곳에 있는 월남 참전기념관에선 디오라마로 당시 전투상황을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디오라마에선 전투 종료 이후 상황을 보고하며 “현재 확인된 전과를 보고하겠다. 베트콩 사살 32명”이라고 외치는 파병 군인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전시장엔 베트남 전장에 걸려있던 ‘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구호가 걸려있다. 참전 군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학살은 없었다면서, 사죄를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콩과 민간인을 구분하는 건 어려웠다. 이길보라 감독은 “베트콩 사살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또 옳은 것일까? 그것 자체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인가?”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전쟁과 학살에 관한 기억을 두고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영화의 제목이 ‘전쟁의 기억’이 아닌 ‘기억의 전쟁’이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의 전쟁’을 여전히 하고 있다. 학살의 기억을 절절하게 호소하는 베트남 생존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처음엔 무력했다. 저 개인 혹은 우리 제작팀이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말할 수 없고, 모두의 집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향을 올릴 수 없다. 이런 현실은 한국 사람 모두가 마찬가지다. 한국정부가 정확하게 진상규명을 하고, 그에 맞는 배상과 보상을 통해 마음을 달래야 하는데, 사과조차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베트남의 학살 유가족들을 만나면
‘차라리 미군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국은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사과도 하고, 제사도 오는 데
미군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한다
… 그분들 앞에서 베트남 정부가 과거를 묻고 싶어 하는 데
사과와 보상 그리고 배상을 왜 하냐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있을까?”
베트남정부에게 베트남전은 승리한 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자신들이 피해자로 비춰는 걸 꺼린다. 때문에 베트남전 학살 진상규명과 사과 및 배상에도 베트남 정부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베트남정부의 태도를 핑계로 한국정부는 미온적인 태도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 “베트남의 학살 유가족들을 만나면 심지어 그런 말씀까지 한다. ‘차라리 미군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미국은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사과도 하고, 제사도 오는 데 미군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이렇게 말씀하는 분들 앞에서 베트남 정부가 과거를 묻고 싶어 하는 데 사과와 보상 그리고 배상을 왜 하냐는 이야기를 감히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피해자가 원하는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미군 손에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하겠나, 그 말 앞에서 다른 이야기는 도저히 할 수 없다.”

한국정부가 베트남전 학살과 관련한 공식 사과와 배상과 보상에 침묵하면서 참전 군인들은 더욱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 이들도 베트남전에 참전해 고엽제 후유증 등 수많은 아픔을 겪었지만, 이러한 아픔은 외면당하고, 정부가 나서서 사과하지 않으니 자신들의 과거를 미화하는 것에 힘을 쏟을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엔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의 모습도 담겨 있다. “베트남 시민 평화법정에 온 참전 군인들이 우리와 인터뷰했다. 영화에 실리진 못했지만. 그분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가 아니다. 참전 군인 가운데 그 마을에 가서 학살한 부대가 있을 거다. 그 책임자들을 찾아서 그들을 처벌하고, 진상조사를 해서 책임을 물어야지 왜 참전 군인 모두를 가해자로 모냐’고. ‘왜 우리 모두가 살인자가 되어야 하냐. 정확한 정부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우리 모두를 가해자이자 살인자로 모는 건 부당하다’고 하셨다. 그분들이 정부의 사과와 진상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광장에 나와서 목소리를 높이고, 과거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분들도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아직도 참전 군인 조직이 존재하고, 참전 군인 커뮤니티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면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참전 군인들을
조금씩 이해됐다. 나라도 그랬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그분들을 가해자로서만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이 부분을 흑백논리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이길보라 감독은 참전 군인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도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자기의 자리가 사라지니깐 그분들이 광장에 나와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처음엔 군복을 입고 카메라를 향해 욕하는 그분들을 찍는 것이 무섭고, 어려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참전 군인들을 조금씩 이해됐다. 나라도 그랬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그분들을 가해자로서만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이 부분을 흑백논리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아울러 이 영화는 그동안 남성 중심의 영웅 이야기로 기록되고 기억된 전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고자 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저희 할머니에게 베트남전과 관련한 기억을 물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나는 그런 것 몰라, 남자들이 더 잘 알지’라고 말 하셨다. 할머니가 직접 참전한 건 아니지만, 베트남에 가신 할아버지가 보내오는 돈으로 가족들을 먹였고, 할머니 자신이 한국전쟁을 경험했는데 왜 할머니는 전쟁에 대해서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걸일까? 저는 군대에 가지 않은 사람들이 이 전쟁에 대해 더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메인 스텝을 20대 여성으로 꾸렸다. 이번 영화도 여성,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의 시선으로 학살과 전쟁을 보여주려고 생각했다. 영화에 나오는 시민평화법정 장면에서 중학생들이 나와 캠페인과 자원봉사를 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뻔한 장면인 것 같지만 저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고, 그 아이들에겐 베트남은 전쟁보다는 베트남은 다낭 등 휴가지로 더 가깝게 기억되겠지만, 그들이 베트남전이 무엇이고, 당시의 학살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10대고, 여자잖아’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들이 이것에 대해 훨씬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의 만남
“ 내가 당신의 아픔을 이해한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일본군 ‘위안부’ 등 과거사를 두고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선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다. 영화 속에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둘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당했던 상처와 그들의 상처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응우옌 티 탄 아주머니가 한국 방문 했을 때 나눔의 집을 방문하고, 수요집회에도 참석했다. 저는 그때 과연 두 피해 주체들이 만났을 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두 분은 서로를 꽉 껴안고 내가 당신의 아픔을 이해한다면서 연대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모은 ‘나비기금’이 큰 역할을 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이렇게 그들과 우리가 이어짐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들에게서 위로와 관용을 태도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길보라 감독은 응우예 티 탄과 함께 광화문 세월호 천막을 방문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제가 당시에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난감했다. 이 사고를 어떻게 이야기하지, 그들에게 이 고통을 어떻게 알릴지 고민했다. 탄 아주머니가 당한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 고통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으시고 탄 아주머니는 테이블 밑 현수막에 있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셨다. 한글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이름과 얼굴 하나하나를 마음에 담으시는 모습을 봤다. 나는 그곳을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해보지 않았던 행동이다. 이 사람들에겐 이것이 베트남에 있는 자기 엄마의 비석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마음인 걸까? 그렇게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여성의 시선으로, 10대의 시선으로,
20대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시선으로
각자가 경험했던 그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했을 때
전쟁과 학살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길보라 감독을 그렇게 자신이 느낀 걸 영화를 통해 나누고,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이 베트남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추모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본다는 건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동시에 수동적으로만 영화를 보 는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에게 베트남은 무엇이고, 베트남전은 무엇이고, 학살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 꼭 전쟁에 참여했던 참전 군인과 국가만이 아니라, 여성의 시선으로, 10대의 시선으로, 20대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시선으로 각자가 경험했던 그것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했을 때 전쟁과 학살에서 벗어나서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권종술 기자
문화와 종교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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