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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세상읽기] 이반 크람스코이와 러시아 이동파

1867년 어느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졸업반 학생들은 졸업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졸업 작품의 주제를 신화나 1861년에 발표된 ‘농노 해방령’과 관련된 황제의 업적으로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가뜩이나 아카데미의 진부한 교육 방법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 가운데 한 명이 이를 거부하고 자퇴를 선언합니다. 그의 이름은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1837 ~ 1887)였습니다. 뒤이어 그와 뜻을 같이한 13명이 동조해서 모두 아카데미를 자퇴하는데, 미술사에서는 이 행동을 ‘14인의 반란’이라고 부릅니다. 아카데미를 나온 14명은 우선 집과 화실을 나누어 사용합니다. 당시 결혼을 한 크람스코이의 집에 모여 살았던 그들의 뒷바라지는 크람스코이 아내 소피아의 몫이었습니다. ‘새우잠을 자도 함께라면 행복한 것’이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지만 실생활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 1872, oil on canvas, 180cm x 210cm
광야의 그리스도 Christ in the wilderness, 1872, oil on canvas, 180cm x 210cmⓒTretyakov Gallery

다시 아침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황무지와 바위투성이인 광야에서 기도를 시작한 지 꽤 오랜 날들이 지났습니다. 맨발의 그리스도는 밤새 올린 기도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듯 두 손을 풀지 않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밤의 찬 기운을 피할 곳도 없는 생활은 얼굴을 핼쑥하게 만들었지만, 눈빛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지금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 작품은 크람스코이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그리스도의 고행을 통해서 그는 사회에 대한 도덕성을 진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덕성은 그가 평생 가지고 갔던 기준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본 그리스도 중 최고’라고 말했다지요.

1870년, 크람스코이는 미술비평가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를 만나 ‘이동 전시 협회’를 결성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동파(移動派)’라고 부르는 화가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시대 예술 작품의 감상 기회를 제공하고, 러시아 사회에 대한 애정을 함양하며, 미술계의 민주화 및 작품 애호가층의 확대를 통해 작가들의 생존권 확보를 목적으로 내세웠는데, 뜻을 같이하는 젊은 화가들이 모여듭니다. 1871년, 첫 이동파 전시회가 개최됩니다. 황궁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미술관을 통해서만 그림을 만날 수 있었던 대중들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동파 화가들은 러시아 주요 도시를 이동하며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합니다. 모임 이름에 걸맞은 전시 방법이었지요.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Portrait of Leo Tolstoy, 1873, oil on canvas, 98cm x 79.5cm
레오 톨스토이 초상화 Portrait of Leo Tolstoy, 1873, oil on canvas, 98cm x 79.5cmⓒTretyakov Gallery

크람스코이는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60여 점의 초상화는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사진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구도는 간단했지만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초상화 주인공의 깊은 내면까지 정확하게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그런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미술계의 후원자이자 미술품 수집가였고 훗날 이동파의 전폭적인 후원자가 되는 트레챠코프였습니다. 트레차코프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가지고 싶었지만, 톨스토이가 여러 번 거부하는 바람에 전전긍긍하다가 크람스코이에게 부탁을 합니다. 크람스코이를 만난 톨스토이는 기꺼이 그를 위해 모델이 되어 줍니다. 서로의 인간성에 반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톨스토이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탄생했고 ‘안나 카레리나’를 집필 중이었던 톨스토이는 크람스코이의 성격을 소설 속 조연 가운데 한 명인 미술가 미하일로프에 반영합니다. 멋진 화가와 작가였습니다.

크람스코이는 ‘화가는 사회에 대해 도덕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당대의 사회적인 이상과 높은 도덕을 추구했고 예술의 진실과 아름다움, 도덕, 미적 가치는 상호불가분의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를 뛰어난 미학 이론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그의 생각에 처음에는 소수가 동조했지만 나중에는 많은 후배 화가들이 따르게 됩니다. 사실 당시 러시아 이동파 화가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당대의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아주 강했지요.

미지의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1883, oil on canvas , 75.5cm x 99cm
미지의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n unknown woman, 1883, oil on canvas , 75.5cm x 99cmⓒTretyakov Gallery

마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에는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을 가진 당당함이 어려 있습니다. 그런데 도도해 보이는 차가운 표정 안에는 꼭 누르고 있는 뜨거운 열정도 함께 느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러시아 여인의 외모입니다. 이 작품 속 여인은 크람스코이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주인공 안나를 그린 것이라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자신의 생을 마감했던 소설 속 그녀의 모든 것을 상상으로 담아낸 크람스코이의 표현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이 작품은 인물 표현 기법에서 완벽에 가까운 경지를 보여 주었지만, 배경과는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마치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여인과 배경을 합성한 듯 합니다. 이미 파리에서는 인상파가 빛과 대상을 어떻게 조화 시킬 것인가로 고민을 하고 있었고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크람스코이는 아직 그런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내용은 없고 형식만 있다. 우리에게는 형식은 없고 내용만 있다’라는 말로 서유럽과의 다른 점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미학적인 문제는 일리야 레핀에 이르러서 비로소 해결됩니다.

쉰 살이 되던 1887년, 크람스코이는 의사 라우흐푸스의 초상을 그리다가 손에 붓을 든 채로 이젤 앞에서 세상을 떠납니다. 크람스코이다운 마지막 순간이었고 라우후푸스의 초상화는 미완성인 채로 남았습니다.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회를 개최하고 해체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53년, 한 유파의 이름을 걸고 활동한 것으로는 역사상 가장 긴 것이었습니다.

선동기 미술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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