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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사건, 잘 모르는데” 1호 청원 ‘졸속 처리’한 국회 회의록 보니…
2020년 1월 15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
2020년 1월 15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국민동의청원

“‘n번방 사건’, 저도 잘은 모르는데요”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듭니까?”

국회 청원 1호 ‘텔레그램 n번방 방지법’을 논의한 지난 4일 국회 회의록 일부다. 청원의 주요 내용이 모두 빠진 채 졸속 처리된 이유가 여기 있었다.(관련기사:“국회청원 1호 ‘텔레그램 n번방’ 법안, 사실은 통과 안 됐다”) 청원 내용은 회의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으며, 참석자 대부분 해당 사건에 대한 낮은 이해도를 드러냈다.

지난 4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제1소위원회는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과 함께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 법률안’ 4건을 일괄해 상정했다.

청원은 시작부터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권태현 전문위원은 “청원이 국회 규칙에 따라 소위에 회부됐다”라고 한 뒤 곧바로 의원들의 개정안 내용을 설명했다. 개정안은 이른바 ‘지인능욕’이라 불리는 딥페이크(deepfake) 영상물 등을 처벌한다는 취지였다. 소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은 “청원은 그렇게 됐다”라며 바로 개정안 관련 논의를 시작했다.

일부 의원은 청원을 무시하며 디지털 성 착취에 분노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공감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였다. 딥페이크 처벌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유한국당 김도읍 의원은 딥페이크 영상물 등을 음란물로 처벌하면 안 되는 거냐고 재차 물었다. 이에 송 의원은 “피해자성 때문에 새로 성폭력 범죄를 만들어서 처벌하자는 취지로 청원이 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김 의원은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드나”라고 반문했다. 송 의원이 “아니 그런 유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라고 말한 뒤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 역시 “요즘 새로운 시대의 물결이다. 필요할 것 같다”라고 대꾸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간사(오른쪽)와 김도읍 자유한국당 간사가 23일 국회에서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장을 나와 대화하고 있다. 2019.08.23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간사(오른쪽)와 김도읍 자유한국당 간사가 23일 국회에서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장을 나와 대화하고 있다. 2019.08.23ⓒ정의철 기자

n번방 사건을 제대로 파악도 못 한 채 법제화를 논의한 정황도 발견됐다. 김인겸(57·사법연수원 18기)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것(딥페이크 영상물)도 소위 ‘n번방 사건’이라는, 저도 잘은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장판사로서 국회의 법률 제정을 돕고 있다.

이에 백 의원이 “n번방 사건은 이것(딥페이크 영상물)하고는 좀 다른 형태 아니냐”라고 지적하자 김 차장은 “다른 형태인데 하여튼 맥락은 (같다)”라고 말했다.

‘청원 1호 통과’ 자랑할 땐 언제고…
“국회가 국민 기만했다”

지난 9일 법사위 회의록이 공개되자 국민을 기만했다는 규탄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해당 청원인이 설립한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이하 리셋) 등은 지난 11일 “다수의 피해생존자가 존재하는 n번방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 채 심사를 진행했다”라고 질타했다. 앞서 이들은 텔레그램 내 성 착취 내용을 상세히 기술한 자료집을 법사위 등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청원 1호가 입법화됐다고 알려진 지난 5일부터 논란은 시작됐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날 “10만 국민의 목소리에 국회가 응답할 때”라며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정작 신설된 조항은 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2(허위영상물 등의 반포등)로, ‘지인 능욕’을 처벌하는 데 그쳤다.

지인 능욕은 텔레그램 성범죄 중 빙산의 일각이다. 지인 능욕은 기존 인물 영상에 다른 인물의 얼굴을 합성하는 기술인 딥페이크를 악용해, 포르노 영상에 여성 지인의 얼굴을 합성해 능욕하는 행위다.

현재 텔레그램에선 여성 청소년 등의 성 착취 영상이 끊임없이 공유되고 있다. 범행 수법은 주로 성적 이미지, 신상 정보를 알아낸 가해자가 유포 협박 등으로 성 착취 동영상을 찍도록 강요하고, 텔레그램 비밀방에 이를 유포해 금전적 이득을 얻는 식이다. 대표적 가해자 중 한 명인 ‘박사’가 1번부터 8번까지 이름 붙인 비밀방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지만, 텔레그램의 폐쇄적 특성상 몇 개의 비밀방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어 이 사건은 ‘n번방’이라고 불린다.

DSE 처벌법안 전화 프로젝트 x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의 공동성명문 '국회의 청원 졸속 처리를 규탄한다'
DSE 처벌법안 전화 프로젝트 x 텔레그램 성착취 신고 프로젝트 ReSET의 공동성명문 '국회의 청원 졸속 처리를 규탄한다'ⓒReSET

리셋 등은 “일방적으로 청원이 잘 반영됐다는 내용만을 언론에 퍼뜨리고 있는 건 이 사건에 목소리를 낸 모든 국민에 대한 기만”이라며 “텔레그램 내 성 착취 사건의 해결을 촉구하는 10만 명의 목소리에 응답하겠다던 국회는 한 달 동안 사건 파악조차 하지 않은 채 무엇을 하고 있었나. 국회에 묻는다. 여성은 국민이 아닌가”라고 질타했다.

“n번방 시작인 ‘유포 협박’ 처벌해야”
“디지털 성범죄, 집단 성폭력으로 처벌해야”
“온라인서비스 제공자 의무 지워야”

텔레그램 등 디지털 성 착취 문제를 뿌리 뽑고자 하는 10만 국민의 열망에 응답하기 위해서 국회는 이번 개정 법안 하나로 그쳐선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동안 현행법 사각지대에 있던 지인 능욕을 처벌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고무적이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성 착취에 대응하기엔 부족하다는 취지다.

한국여성단체연합·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지난 11일 이같이 지적하며 디지털 기반 성 착취 종식을 위한 개정 방향을 제시했다.

성적 촬영물 유포 협박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고 공대위는 강조했다. 공대위는 “텔레그램 성 착취 단톡방의 시작은 불법적으로 취득한 개인정보와 성적 이미지를 빌미로 유포 협박을 하면서였다”라며 “가해자들은 경찰 등을 사칭해 피해 여성들의 개인정보를 받아내고 신상을 털고 협박해 성 착취 영상 촬영을 강요했다. 한번 시작된 강요는 유포 협박을 통해 반복됐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10명 중 3명이 유포 협박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공대위는 “가해자는 성적 이미지를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하며 피해자를 자신이 바라는 대로 조정하고 피해자는 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해자의 요구에 계속 따르게 된다. 이에 피해자는 점점 더 심각한 범죄에 노출된다”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유포 협박은 ‘성 착취 늪’의 핵심 원인이지만, 실제 유포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기관과 법망을 빠져나가고 있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 몰래카메라 촬영 규탄 집회에서 참가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8.08.04.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 몰래카메라 촬영 규탄 집회에서 참가 여성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8.08.04.ⓒ사진 = 뉴시스

공대위는 온라인서비스 제공자에게 의무를 지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대위는 “지난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성매매알선사이트 사례에서 봤듯이 온라인서비스 제공자는 단순히 공간만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불법 행위가 일어나게끔 공모하고 권장하는 등 디지털 성 착취의 핵심에 있다”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온라인서비스 제공자의 의무를 명시한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해당 안에는 온라인서비스 제공자는 자신이 관리하는 통신망에서 불법 촬영물을 발견하기 위해 조처하지 않거나 발견 즉시 삭제 등 기술적 조처를 아니 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성적 이미지를 텔레그램 등 온라인에 전시·공유하면 ‘집단 성폭력’으로 가중처벌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공대위는 “디지털 성 착취 문제는 영상물을 직접 제작·유포하는 1차 가해자 외에도 이를 함께 관람·소지·배포하는 2차 가해자들 때문에 심각성과 범위가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 있다”라고 짚었다.

이어 “디지털 성 착취는 1차 가해자가 제작한 성적 촬영물 등을 불특정 다수가 함께 관람하고 재촬영을 공모해 집단 성폭력 성격을 갖는다”라고 했다.

이밖에도 공대위는 ▲불법 촬영물 소지죄를 처벌할 것 ▲불법 촬영물 삭제에 불응할 경우 처벌할 것 ▲성폭력 범죄의 구성요건을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에서 ‘타인의 의사에 반해 타인의 신체를 성적으로 침해하는’ 모든 행위로 확대할 것 ▲온라인 그루밍에 대한 개념규정과 형법상 처벌법을 도입할 것 등을 촉구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분노한 여성들은 4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분노한 여성들은 4월 11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n번방 성 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를 진행할 예정이다.ⓒ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한편 미래통합당 김도읍 의원은 “국회에 청원을 관련 상임위에 회부시키는 권한은 국회 의장에게 있다”라며 법사위는 청원내용 중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만 회부받아 검토한 것일 뿐 청원을 졸속처리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청원 올라온다고 다 법 만드냐’ 발언에 대해 김 의원은 “현행법으로 처벌 가능한지 먼저 따져 보고 법률 개정 등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처리하자는 차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명했다.


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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