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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의 삶과 문학]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
정지아 작가의 소설 <행복>
정지아 작가의 소설 <행복>ⓒ기타

“알고 봉게 당신, 순 패배주의자구만. 우리가 옛날 역사를 지대로 알리는 것도 통일운동이요, 혁명가답게 넘헌티 신세 안 지고 똑바로 사는 것도 통일운동에 일조허는 것이여. 노조운동 허고 환경운동 허는 젊은 친구들헌티 잘허고 있다고 칭찬 한마디 해주는 것도 다 통일운동인 것이여. 늙었다고 할 일이 없간디?”

정지아의 소설 <행복>에서 아버지는 젊은 시절 동지였던 자신의 아내에게 ‘늙은’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오십여 년 전 각각 전남도당과 남부군 소속의 빨치산 대원이었으나,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변혁의 꿈은 실패하고 동지들이 죽어간 지리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노년이 된 그들은 가난하고 누추한 일상에서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혁명가의 삶을 지켜나간다. 불의를 묵인하는 것도 불의라는 지론으로, 동지들의 목숨을 희생한 대가로 자신의 삶을 구했던 음식, 먹는다는 것의 일상적 공경으로, ‘혁명의 낭보’를 기다리듯 첫 뉴스와 두 종류의 신문을 빠짐없이 챙겨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지막 뉴스를 보며 잠자리에 드는, 세상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생활의 엄격함으로.

‘행위 할 수 없는 열정을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마땅한 것인가.’

‘평생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된’ 젊은 날의 짧은 시간을 지나 이제는 노인의 냄새를 풍기며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늙어가고 있는 부모의 삶을 두고, 그들의 딸인 ‘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브레히트의 시구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해 곤두세운 그 열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억압과 착취가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
-정지아의 소설 <행복>

이제는 나에게도 먼 시절이 된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저 ‘도달 불가능한 유토피아’와 같은 꿈을 꾸며 무도한 자들이 통치하던 80년대의 험한 시절을 보냈고, 그 시절의 끝에서 서로의 길이 갈라지기도 했다. 대개는 먹고사는 일로, 누군가는 후퇴와 작은 전진을 반복하며 여전히 그 길 위에. 누군가는 가치를 수정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반대편으로 방향을 돌려서. 나 역시 대개의 사람들처럼 나만의 삶을 찾아 이 세계의 어디쯤에서 먼지 같은 존재로 살아왔지만, 모든 계급계층이 차별받지 않는 삶을 누려야 한다거나 어떤 제국의 지배와 간섭도 받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야 한다거나 우리시대에 분단체제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등, 그 시절 젊은 날이 아니고서는 배울 수 없었던 가치를 잊거나 수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나와는 다르게 마음에 품은 소망을 향해 수십 년을 ‘행위’하는 사람들의 삶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군사독재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가 바뀌어 얼마간의 민주적 절차와 정치적 자유가 이 사회의 근간이 되었다고는 하나,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대한 자본을 지키기 위해서, 지켜주기 위해서, 불법과 편법과 위장과 착취와 기울어진 입법을 강행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다수의 민중이 허덕이며 감내해야 하는, 여전히 분단과 전쟁의 불안을 안고 강대국의 강압적 요구를 수용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는 때로 입진보가 되고 근본주의자가 되고 회의론자가 되고 물러나야 할 세대가 되며, 가장 푸르던 시절에 배웠던 가치를 어디까지 지켜내야 할지, ‘혁명이 필요할 때 혁명을 겪지 못해 우리 땅에서의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난쏘공의 작가 조세희의 말처럼 개혁의 과제 또한 끝없이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행위 되지 못하는 가치는 또 무어라 불러야 할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사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문학 따위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되죠?”라는 정지아의 소설 속 어린 학생들의 항변처럼 ‘문학’을 ‘역사’나 ‘가치’, ‘신념’으로 바꾸어 말해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에 수평선 너머에서 흰 돛이 오르기를 기다리다가 승리의 피로 물든 붉은 돛을 보고 자결한 배롱나무 전설 속 처녀와 같은 이야기가 퍼질 수 있는 것은, 작가 정지아가 애초에 도달 불가능할 것 같은 유토피아의 소망을 품고 늙어가는 어느 생의 이야기에 <행복>이라 이름붙인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역병이 돌아 거리가 텅텅 비어도 어느 노동자는 과로로 죽었다는 아픈 봄날, ‘살아있는 빨치산’의 딸인 정지아의 소설을 읽으며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미몽에 젖어.

-정지아

1990년, 전남도당과 남부군 이현상 부대의 빨치산 대원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담은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출간. 소설집으로 <행복> <봄빛> 등이 있다.

이수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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