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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세상읽기] 성폭력을 깬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1997년 10월, 프랑스에서 아그네스 멀릿(Agnes Merlet) 감독의 영화 ‘아르테미시아 (Artemisia)’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근대 회화사에 첫 여성 화가로 기록된 이탈리아의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 (Artemisia Gentileschi/1593 ~ 1656?)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여성 화가는 종교화와 역사화를 그릴 능력이 없다는 시대의 편견을 날려버리고 성공을 거둔 그였지만, 개인의 삶은 그리 간단치 않았습니다.

마돈나와 성자   Virgin with the Child  c.1609~1610
마돈나와 성자 Virgin with the Child c.1609~1610ⓒPalazzo Pitti

이 작품은 젠텔레스키의 것이라고 보는 의견과 그의 아버지 작품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보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대개 그의 초기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그렇다면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16세였습니다. 뛰어난 기술과 구성력도 돋보이지만 남자 화가들이 거의 잡아내지 못했던 아들과 엄마 사이의 친밀감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교감은 아버지의 그것과는 다르지요.

수산나는 겁에 질린,
상처 입기 쉬운 여인의 모습인데,
여기에는 젠텔레스키에게 가해지던
남성들의 비겁하고 추잡한 짓에 대한
그의 심리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젠텔레스키는 로마의 이름난 화가였던 아버지 오라치오와 어머니 푸르덴사아와의 사이에서 4남 1녀의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딸을 화가로 키우고자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렸지만,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입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직접 딸을 가르치던 그의 아버지는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소에게 보내 그림을 배우게 했는데, 이 일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비극이 됩니다. 젠텔레스키가 타소에게 그림을 배울 때 많은 남자 화가들이 그를 성적으로 괴롭혔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내가 있던 타소는 그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고는 그를 강간했고, 이 사실을 안 젠텔레스키의 아버지는 타소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법정에 선 타소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습니다. 우선 타소는 젠텔레스키가 처녀가 아니었고 이미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은 여자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증인들을 세워 그의 행동이 난잡했다고 증언하게 했습니다. 처녀가 아니고 난잡하면 강간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수산나와 늙은 장로들  Susanna and the Elders
수산나와 늙은 장로들 Susanna and the EldersⓒSchloss Weissenstein

구약성서에 나오는 수산나와 늙은 장로 이야기는 고전 회화의 단골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늙은 장로들이 요아킴의 아내 수산나를 유혹하다 실패하자 오히려 그가 외간 남자와 나무 아래에서 부정한 짓을 했다고 모함을 해서 수산나는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다니엘이 등장, 수산나의 무죄를 밝힌다는 내용이지요. 이 작품은 그의 서명과 제작 일자가 표기된 최초의 작품으로, 수산나의 오른쪽 다리의 그림자 속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다른 남성 화가들의 수산나에 비해 이 작품 속 수산나는 겁에 질린, 상처 입기 쉬운 여인의 모습인데, 여기에는 젠텔레스키에게 가해지던 남성들의 비겁하고 추잡한 짓에 대한 그의 심리가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by Caravaggio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by Caravaggioⓒ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1~1612 oil on canvas 158.8cm x 125.5cm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611~1612 oil on canvas 158.8cm x 125.5cmⓒNational Museum of Capodimonte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젊고 나약하고,
소극적이고 주저하는 듯 모습이라면
젠텔레스키의 유디트는 강하고
적극적이고 씩씩합니다.

유디트는 남편과 사별한 과부였는데,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그의 고향을 포위하자 그는 하녀와 함께 홀로페르네스의 막사로 찾아가 그를 유혹, 침실에서 목을 베어버림으로 마침내 적군을 물리친다는 구약성서 속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초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던 아버지의 화풍을 따라 젠텔레스키의 작품에서도 강렬한 명암 대비가 돋보이는데, 카라바조의 영향이지요. 카라바조도 같은 주제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림을 비교해 보면 유디트에 대한 묘사에서 차이가 보입니다.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젊고 나약하고, 소극적이고 주저하는 듯 모습이라면 젠텔레스키의 유디트는 강하고 적극적이고 씩씩합니다. 젠텔레스키가 강간을 당한 직후 또는 그 과정 중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에는 혹시 남자들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요?

7개월에 걸친 재판은 젠텔레스키에게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강간당했다는 것을 증명받기 위해 여러 사람이 보는 중에 산파들로부터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도 오래전에 당한 것인지, 최근에 당한 것인지 밝혀져야 했습니다.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서 엄지손톱을 조이는 고문 틀에 묶여 고문을 당했습니다. 거짓말이면 아플 때 다른 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젠텔레스키의 승리로 재판은 끝났습니다. 여인과 아이가 행복한 세상이 건강한 사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중세는 건강하지 못했던 것 아닐까요? 그렇다고 지금이 건강한 사회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   Mary Magdalene c.1620
막달레나 마리아 Mary Magdalene c.1620ⓒPalazzo Pitti

막달레나 마리아는 젠텔레스키가 피렌체에 거주할 당시 즐겨 다뤘던 주제였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은 서기 200년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달레나 마리아의 참회는 많은 화가가 좋아했던 주제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후회는 우리가 유한한 삶을 살기 때문에 얻게 되는 지혜입니다. 작품 속 막달레나 마리아가 입고 있는 옷의 황금색이 너무 강렬하여 ‘아르테미시아의 골드’라고 한답니다. 물론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상처만 남은 젠텔레스키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지참금을 들고 피렌체 출신의 화가와 결혼을 해서 로마를 떠납니다. 피렌체를 거쳐 제노바에서 화가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그 후 유명한 로마의 화가, 뛰어난 여성 화가로 불리게 됩니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지요. 원숙하고 존경받는 화가가 된 그는 나폴리로 이사를 가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냅니다. 젠텔레스키의 후원자 중에는 스페인의 필리페 4세, 영국의 찰스 1세와 같은 국왕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후원을 받았던 화가가 어떻게 그리 쉽게 잊혀질 수 있었을까요? 그의 작품이 그의 아버지나 다른 화가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도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여자가 어떻게 이런 그림을 ---‘. 저열한 남자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한때는 그런 남자들이 세상을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시저의 용기를 가진 한 여자의 영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젠텔레스키가 그의 고객에게 보낸 편지 중의 구절이라고 합니다. 그럼요, 그런 영혼이 빛나고 있기에 그나마 역사가 여기까지라도 흘렀겠지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34점의 그림과 28통의 편지로 세상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선동기 미술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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