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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에 대해 알아야 할 55가지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주자 조 바이든 전 부통령ⓒAP/뉴시스

편집자주/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대세론’을 굳혀 가고 있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 그는 초반 아이오와 경선 등에서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지난 3일 슈퍼 화요일에 14곳 중 10곳에서 이기면서 부활에 성공했다. 이후 연승 가도를 달리며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크게 앞서고 있다. 바이든의 면면과 이력을 짚어 본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 기사를 소개한다.

원문:55 Things You Need to Know About Joe Biden

조 바이든의 정치 인생은 초반부터 굉장한 성공과 엄청난 좌절로 점철됐다. 승리 뒤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개인적 불행이 뒤따랐다. 스스로 자초한 일들이 출마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래도 바이든은 살아남았다. 상원에서 36년, 오바마 정권에서 8년을 말이다. 그 과정에서 바이든은 정계의 궁극적인 윙맨이자 미국의 비공식적인 최고의 위로자(consoler in chief)가 됐다.

바이든의 세 번째 대권 도전도 예정된 수순을 밟을 듯했다. 선두주자로 올라섰다가 대중의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수순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슈퍼 화요일이 있었다. 바이든은 불가능해 보이는 부활에 성공했다. 이 정도로 부활에 성공한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 사람에 대해 유권자들은 무엇을 알아야 할까?

조제프 바이든 시니어와 캐서진 유지니아 진 피네의 네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나 현재 일평생의 꿈을 이루는 데 가장 가까이 다가선 조제프 로비네트 바이든 2세의 삶을 짤막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여러 책과 광범위한 언론보도,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의 과거 기사들을 종합했다.

1. 바이든은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몇 차례 사업에서 좌절한 후 직장을 제대로 잡지 못해 고생했다.

2. 아버지가 자동차 판매원 자리를 얻자 “조이”는 10세 때 부모를 따라 델라웨어주 윌밍턴으로 이주했다. 바이든 가족은 침실 3개와 화장실 2개가 있는 규격형 주택에서 살았다. 바이든 3형제는 외삼촌 에드워드 블레위트 피네간과 한 방을 썼다. 2층 침대 두 개에 두 명씩 잤다. 에드워드 외삼촌의 애칭은 “부우-부우(Boo-Boo)”였다. 말을 더듬었기 때문이다.

3. 바이든도 어려서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학교 친구들은 스타카토 같은 그의 말을 모스 부호의 대시(긴 점) 부호에 빗대며 그를 “대시”라고 놀렸다. 또 그들은 바이든이 자기 성을 말하려고 할 때 말더듬는 소리를 흉내내며 그를 “바이-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이든은 머릿속으로 대화를 미리 생각하거나 입에 작은 조약돌을 물고 말 연습을 했다. 수업시간에는 교과서를 소리내어 읽지 않고 문단째 외우면서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4. 바이든은 가톨릭계 사립고등학교인 아키메어 아카데미 3학년과 4학년 때 반장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벌점이 너무 많아 전교학생회장 출마가 무산되자 크게 실망했다.

5. 바이든은 무패의 1960년 아키메어 미식축구팀에서 와이드 리시버와 하프백으로 활약하면서 터치다운 패스를 19개나 받아냈다.

6. 바이든은 델라웨어 대학교 재학 당시 기숙사 사감에게 소화기를 분사해 징계를 받았다.

7. 바이든은 대학 3학년 봄방학 때 바하마스에 놀러갔다가 훗날 아내가 된 네일리어 헌터를 만났다.

8. 네일리어와의 두 번째 데이트에서 바이든은 저녁값을 낼 돈이 없었다. 그러자 네일리어는 레스토랑 웨이터가 보지 못하게 테이블 아래로 그에게 20불을 건넸다.

9. 네일리어의 어머니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바이든에게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바이든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10. 바이든과 네일리어는 1966년 결혼했다. 그들의 장남 보는 1969년, 차남 헌터는 정확히 1년 1일 후에 태어났다. 바이든은 1970년 한 인터뷰에서 “나는 ‘여자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애나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딸이 태어날 때까지 여자가 애를 낳는 것에는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좋은 것은 아이들이다”라고 말했다. 바이든과 네일리어의 딸 나오미는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11. 바이든은 1967년 시라큐스 로스쿨 재학 당시 아내를 위해 강아지를 샀다. 강아지 이름은 “상원의원”이었다.

12. 바이든은 로스쿨을 마친 후 징집됐으나 천식 때문에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바이든은 훗날 왜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방탄조끼나 (당시 시위대가 즐겨 입던) 홀치기염색을 한 티셔츠에 열광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거리에서 행진했다. 나는 출마했고 29세 나이에 미국 상원의원에 당선돼 베트남 전쟁 중단에 보탬이 된 한 표가 됐다”고 말했다.

13. 바이든은 델라웨어주에서 국선 변호인으로 활동하면서 홀스타인 소를 훔친 25세 어부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14. 바이든은 1970년 뉴캐슬 카운티의 카운티의회 의원 선거운동을 할 당시 자신이 공공주택을 지지한 것을 두고 인종차별주의적인 비난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전화가 처음 울렸을 때 상대방이 ‘야, 깜둥이 러버, 걔들이 옆집에 살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난 '당신이 대신 옆집에 들어온다면 난 그들이 더 낫겠어'라고 답했다"고 회상했다.

15. 바이든은 29세이던 1972년 선거에서 현직 공화당 상원의원 칼렙 보그스를 꺾고 승리,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젊은 나이에 상원의원이 됐다.

16. 오는 11월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현재 77세인 바이든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다.

17. 바이든의 아버지는 86세에, 어머니는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18. 바이든이 상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지 한 달쯤 후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서 돌아오던 길이었다. 바이든 가족이 탄 차가 옥수수 화물차에 치였다. 바이든의 아내와 13개월이었던 딸 나오미는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숨졌다. 바이든의 어린 두 아들 보와 헌터는 중상을 입었다.

19. 바이든은 아들 보의 입원실에서 상원의원으로 취임했다.

20. 바이든은 그 교통사고 이후 상원이 있는 워싱턴 D.C.에 거처를 마련하지 않고 델라웨어주 윌밍턴의 집에서 계속 살았다. 그는 30여 년 동안 매일 앰트랙 열차를 타고 75분 거리를 출퇴근했다. 그는 승무원을 비롯한 앰트랙 직원들을 “가족”이라 불렀고 이들을 집으로 불러 바비큐 파티도 열곤 했다.

21. 바이든은 1974년 한 기자에게 “낙태 같은 문제와 관련해 내 개방성은 당신의 할머니 정도이다. 나는 (낙태를 합법화한 대법원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결정은 너무 나간 것 같다. 나는 여성의 몸에 일어날 일을 결정할 권리를 여성이 독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1981년에도 각 주가 연방대법원의 낙태 합법화 결정을 뒤집을 수 있도록 하는 헌법 개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바이든은 그 이후 입장을 완전히 바꿨다.

22. 바이든은 1970년대 법원 명령에 따른 공립학교 인종차별 해소를 위한 통학버스 운영에 반대했다. 그는 주택 등을 통한 다른 방식을 선호하며 통학버스는 자발적 운영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23. 바이든은 1977년 남동생 소개로 만난 영어 선생님 질 트레이시 제이콥스와 재혼했다.

24. 바이든은 1984년 미국 상원 법사위원회의 민주당 최고참이었다. 그는 당시 인종차별적 발언을 이유로 앨리배마 검찰총장이었던 제프 세션스의 연방판사 임명을 막으려고 주도적으로 노력했다. 세션스는 그런 혐의를 부인했다. (세션스는 현 트럼프 정권에서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25. 바이든은 스스로를 “실수 제조기”라고 부른다. 바이든은 이라크에서 총상을 입었다고 주장했고(나중에 “총알이 근처에 떨어졌다”고 변명했다), 부통령이었던 당시 2018년 플로리다 파크랜드 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생존자들을 만났다고 했으며(그 일은 바이든의 임기가 끝난 이후 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넬슨 만델라를 만나려다가 거기서 구속됐다고(나중에는 그냥 연행됐다고 말을 바꿨다) 하는 등 사실이 아닌 얘기를 많이 했다.

26. 바이든은 자동차 판매점에서 일한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준 1967년식 2세대 콜벳 스팅레이를 보유하고 있다.

27. 바이든은 1980년대에 여러 연설을 통해 자신이 “1960년대의 민권운동 시위에 참여”했고 (앨리배마주 버밍햄의 경찰국장으로 흑인 민권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한 인종분리주의자로 악명 높은) “불 코너와 그의 경찰견들” 때문에 자신이 정치적으로 깨어났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1960년대 백인의 입장만 허용했던 윌밍턴의 리알토 영화극장 앞에서 진행된 피케팅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그가 민권운동 시위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28. 바이든은 1987년의 첫 대권 도전 당시 영국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의 연설을 표절하고 광부로 일한 선조가 있다고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 중도하차했다.

29. 같은 해 상원 법사위 위원장이었던 바이든은 연방판사이자 보수적 법학자였던 로버트 보르크의 대법관 임명을 막는 데 앞장섰다. 바이든의 전략 중 하나는 일종의 미끼를 놓는 것이었다. 그는 일반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명확한 표현으로 질문을 던지고, 보르크에게 충분한 답변 시간을 줬다. 주어진 답변 시간 동안 보르크는 난해한 법률 용어를 써가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논란성 답변을 내놨다. 상원은 42대 58로 보르크 임명을 반대했다. 사법부를 둘러싼 정치적 전쟁의 효시로 이 사건을 꼽는 학자들이 있다.

30. 1988년 2월 몇 주 동안 두통에 시달리던 바이든은 뇌동맥류 수술을 받았다. 3개월 후 두 번째 뇌동맥류 수술을 받았다.

31. 바이든은 상원 법사위 위원장 시절 당시 대법관 후보 클레런스 토머스의 청문회를 주관했다. 당시 토머스의 전 직장 동료 아니타 힐 법학교수가 그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증언했으나, 바이든은 힐의 증언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여러 여성 증인 채택을 거부했다. 상원은 토마스 대법관 임명안을 52대 48로 가결했다.

32. 대권 도전을 준비하던 2019년 바이든은 1991년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아니타 힐에게 유감을 표했다. 하지만 힐은 그건 사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바이든은 “힐이 마땅히 보장받아야 했던 청문회 장을 마련해 주지 못해 오늘날까지도 후회한다”며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33. 바이든은 1991년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몰아내기 위한 무력 사용에 과반의 민주당 상원의원들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34. 1993년 발칸반도 순방 때 바이든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 대통령를 만나 면전에서 “빌어먹을 전범”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바이든이 훨씬 유한 표현을 썼다고 말했다.

35. 바이든은 1994년 강력범죄 처벌 강화법을 입안했다. 이 법안은 연방교도소 형량을 강화했고, 불균형적으로 많은 유색인종 감금으로 비판을 받았다.

36. 바이든은 1994년에 오린 해치 공화당 상원의원(유타주)과 함께 여성폭력방지법을 공동발의했다. 더 광범위한 범죄 관련 법안에 포함돼 있는 이 법은 여성을 상대로 한 강력범죄를 조사하고 기소하는 데 16억 달러를 책정하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자동적, 강제적으로 배상을 하도록 했으며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은 경우라도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37. 바이든은 2002년 이라크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다. 또 조지 W. 부시 당시 미 대통령이 이라크를 상대로 한 무력 사용을 승인하는 결의안에 서명할 때 백악관에서 이를 지켜봤다. 바이든은 그 후 당시의 찬성표를 “실수”라고 했다.

38. 미 의회에서 바이든은 두서없는 장광설과 준비되지 않은 발언으로 악명 높았다. 바이든의 끝도 없는 연설을 듣고 있던 버락 오바마 당시 상원의원이 보좌관에게 “날 그냥 죽여 줘, 지금”이라는 쪽지를 건넸다고 한다.

39. 바이든은 존 매케인이 상원 해군 연락장교로 의회에서 파견 근무할 당시부터 그와 가까이 지냈다. 바이든 부부와 함께 있던 매케인은 1979년 하와이의 한 해군 연회에서 훗날 아내가 될 신디를 처음 봤다. 바이든 부부가 등 떠미는 바람에 매케인이 그녀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40. 매케인은 숨을 거두기 전 바이든에게 자신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매케인은 2018년 별세했다.

41. 바이든은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그는 술, 담배를 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다고 말한다. 1970년 한 인터뷰에서 바이든은 “난 미식 축구와 모터사이클 점프, 스키에 의지한다. 그것들은 최소한 내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얘기했다.

42. 바이든은 2008년에 두 번째로 대권에 도전했다가 민주당 아이오와 경선에서 5등을 하면서 하차했다. 7개월 후, 버락 오바마는 바이든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43. 바이든은 흑백갈등 논란을 일으킨 흑인 교수인 헨리 루이스 게이츠 하버드대 교수와 백인 경찰관 제임스 크롤리 경사가 참여한 악명 높은 2009년의 백악관 “맥주 회동”에서 하이네켄의 무알코올 맥주인 버클러를 마셨다.

44. 바이든은 동성 결혼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 한창 재선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던 오바마 당시 대통령을 극도로 분노케 했다.

45. 바이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령이었던 크림반도를 병합한 이후 오바마 정권이 펼치는 우크라이나 친서방화 정책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 외교를 총괄하는 “최고위 특사”가 됐다.

46. 같은 해 5월, 바이든의 차남 헌터가 아무 연고 없는 우크라이나의 대형 에너지 기업 ‘부리스마 홀딩스’의 사외이사가 됐다. 당시 부리스마 홀딩스의 사주는 부패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헌터 바이든은 5년 동안 월 약 6천만원을 받았다. 2015년 12월 많은 서방 지도자들이 부패 척결을 위해 충분히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빅토르 쇼킨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의 사임을 요구했다. 바이든도 그 중 하나였다. 2019년 10월에 바이든은 “내 아들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47. 바이든의 맏아들 보가 2015년에 뇌암으로 사망했다.

48. 바이든은 2014년 자산이 가장 적은 미국 고위관리 중 한 명으로 꼽혔다. 581명 중 577등이었다.

49. 바이든은 2016년에 대선 출마를 고려했으나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 오바마의 설득으로 출마를 포기했다.

50. 바이든과 그의 아내 질은 2017년과 2018년 1천50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신고했다.

51. 바이든의 최애 영화는 “불의 전차”라고 한다.

52. 바이든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53. 바이든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레슬링 한 판 하겠냐고 한 적이 있었다.

54. 바이든은 핸드폰으로 (북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미국의 자동차 애호가 잡지) “카 앤 드라이버”의 알림을 받는 자동차광이다.

55. 바이든은 32년간 세 번이나 대권에 도전했다. 하지만 지난 2월 29일 민주당 사우스캐롤라이나 경선 승리 전까지는 단 한 곳의 경선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슈퍼 화요일까지 바이든은 11곳의 경선에서 승리했다.

정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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