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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장관님의 얇아진 월급 봉투

새로운 바이러스가 한국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을 하나 둘 드러내고 있는 와중이다. 그래서 이 무명의 바이러스는 당대에 이름을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이 페허 위에 덮인 얇은 거적에 불과했음을 응시한다. 바이러스는 삶의 비참과 노동의 불안을 관통하며 어느 이단 교회의 방석과 정신병원의 얇은 매트와 콜센터의 칸막이를 순환하는 중이다. 감염병의 위험이 응시하는 것은 삶에 누적된 불안이다. 이것의 해결은 이미 의료 전문가의 역할을 벗어난다.

며칠 전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비상국무위원 워크숍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장·차관급 이상 공무원들의 월급 30%를 4개월 간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국민과 고통을 함께한다’는 차원에서 내렸다는 결정은 하릴없이 돌려보는 드라마 재방송처럼 따분하다.

정부 스스로도 재난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재난이 왜 재난인가. 하던 대로 하면 욕먹고, 그래도 기어이 하던 대로 하면 권력자들이 쫓겨날 수도 있는 ‘준전시상황’이 재난이 아니던가. ‘금모으기’, ‘태안 기름유출사고’로 이어지는 “국난극복이 취미” 어쩌구하는 해외 홍보 동영상까지 공들여 만들어 너스레를 떨며 내건 대책이 월급 반납이라니. 둘 중 하나다. 선의로 포장된 사악함이거나 코로나19가 들춰낸 지배 집단의 무능력이거나.

정세균 국무총리가 2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감염 예방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를 위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2020.03.21
정세균 국무총리가 21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감염 예방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를 위한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2020.03.21ⓒ김철수 기자

또 다시 ‘고통 분담’인가

정부의 셀프 임금 삭감 발표 이틀 후 경총은 ‘쉬운 해고’와 ‘법인세·상속세 인하’를 정부에 ‘건의’했다. 이쯤되면 하품 끝에 찔끔 나오는 눈물만큼도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은 고통 분담이 아니라, IMF 외환위기 이후 반복된 ‘국난(國亂)’의 통치술이다.

지난 20여 년간 집권세력은 삶의 위기를 국가의 위기로 뒤집어 놓은 후, 국가의 위기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며 ‘고통 분담’이라는 무통증 마취제를 국민들에게 처방해왔다. 그러는 동안 해고는 쉬워졌고, 고통은 너무 많은 노동과 너무 적은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에게 할당되었다.

코로나19가 톡톡히 해내고 있는 몫은 ‘국난극복’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고통의 무감각에 대한 균열이다. 바이러스가 사회의 ‘약한 고리’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취약성, 고통의 불평등한 할당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재난을 야기한 원인은 단일하지 않다. 우발적인 사건과 복잡한 모순들이 얽혀 재난이 되고, 사회의 다른 위험들로 전이되고 전파되며 재난다운 재난이 된다. 이는 재난에서 벗어나려면 얽혀있는 복잡한 원인들, 이미 재난의 일부가 된 사회적 문제들을 뒤로 미룬 채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필요한 건 ‘공공성 회복’

미국과 유럽의 미숙한 바이러스 대응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우리의 질본을 응원하는 동안 이탈리아는 60일 간 해고금지 조치를 했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생명과 생존 둘 다의 안전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그외 유럽 곳곳에서 행한 선제적 조치들은 생존을 위해 공공성을 회복하자는 내용이다. ‘마스크 사회주의’ 논란을 야기한 ‘공적 마스크’대신, 병원을 한시적으로 국유화하고 공장 가동을 멈추고 해고를 금지시키며 휴업수당을 늘리는 공적 조치들이 핵심이다.

국난극복과 공공성의 회복이라는 재난에 대처하는 상반된 갈림길을 결정짓는 것은 서로 다르게 밟아온 역사적 경로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재난에 대한 의료적, 과학적 조치와 함께 사회적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을 위해 생존을 뒤로 미룰 수 없고,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고통을 담보로 연명할 수 없다.

모두 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방역이 만들어낸 시공간에 새로운 사회적 시도들이 들어와야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지연되면 될수록 누군가의 생존은 위태로워진다. 위태로운 삶이야말로 방역의 구멍이 되고 있다는 것이 자명해진 지금, 또 다시 꺼내든 국난극복용 고통분담은 얇아진 장관님의 월급봉투만큼 얄팍하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에 따르면 입사 4주차의 40대 신입 쿠팡맨 김 모씨(46)가 지난 12일 경기 안산시에서 배송 도중 쓰러져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16일 오전 서울 시내의 쿠팡 캠프에서 배송 기사들이 배송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2020.3.16.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공항항만운송본부에 따르면 입사 4주차의 40대 신입 쿠팡맨 김 모씨(46)가 지난 12일 경기 안산시에서 배송 도중 쓰러져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16일 오전 서울 시내의 쿠팡 캠프에서 배송 기사들이 배송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2020.3.16.ⓒ뉴스1

임금 삭감과 해고로는 재난 넘어설 수 없어

경기도 어느 빌라의 4층과 5층 사이에서 죽은 쿠팡맨의 과도한 노동은 그의 월급봉투를 얼마나 두껍게 만들어 주었을까? 비정규직으로 채용된 지 18일 만에 사망한 쿠팡맨과 달리, 배달 건수로 임금을 받는 ‘쿠팡플렉스’란 또 다른 형태의 플랫폼 노동자는 오히려 배달 건수가 줄었다. 과도한 노동과 과소한 노동은 모두 재난을 틈타 호황을 누리는 비즈니스 아래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고 얇은 월급봉투 옆에 더 얇은 월급봉투를 만들어 고통을 경쟁하게 만든다.

이는 곧 경총이 예고한 대로 본격화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도 노동자와 시민들이 ‘국난극복’을 위해 고통을 감수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바이러스가 진정한 적이 아님을 알아챌 만큼 생존을 위한 고통이 일깨우는 각성 또한 따르기 때문이다.

장관님의 얇아진 월급봉투로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월급 반납하지 마시라. 지난 20여년간 늘상 하던 대로 월급을 깎고, 일자리를 빼앗는 것으로 재난을 넘어설 수는 없다. ‘하던 대로’가 들어먹지 않는 상황이 재난이니까.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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