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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은희의 내가 만난 동남아_1] 연재를 시작합니다

V의사가 선고한다. “엄은희씨, 확진입니다!”
V방역당국이 묻는다. “지난 2주간 다녀오신 곳을 모두 말하세요. 네네.. 13일 전에는 필리핀에 계셨고, 그저께 인도네시아에서 입국하셨다고요? 그동안 간 곳과 만난 사람들을 상세히 밝히십시오. 아이고, 방문한 곳과 만난 사람들이 너무 많군요”
V언론의 집중포화를 받는다. “슈퍼 전파자 OO대 연구원, 감염 상태로 동남아 광폭 횡보” “한-인도네시아, 한-필리핀 여객 중단” “공들여 쌓아온 新남방정책 비상” …

다행히 악몽이었다.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걸 보니 꿈이 확실하구나!’ 꿈속에서마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달 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자택격리 중이던 3월 초에 꾼 꿈이 이러했다. 다행히 증상은 없었고, 나와 가족과 연구소에서 종종 만나는 주변인들 모두 아직까지는 안전하다. 그렇지만 약간 다른 버전의 꿈을 두 번이나 꿀 만큼 코로나19는 위협적이었다. 방학 때마다 한 달 이상을 동남아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지역연구자로서 스스로가 잠재적 감염원이 되지는 않았을 지 두려운 시기였다.

행동주의자에겐 갑갑할 수밖에 없는 2주간의 자택근무를 마치고 3월 중순엔 출근을 시작했다. 그런데 웬만한 회의와 강의 요청도 줄줄이 취소되었고 공부도 연구도 진척 없이 개점휴업 상태다. 우리 집에 불이 난 격이나 남의 집 사정이 궁금할 여유가 아직은 없는 게 당연하지. 긴급 순위가 아닌 동남아지역의 정보와 소식을 찾는 이들도 확연히 줄었다.

필자의 아시아 이정표, 여전히 가고 싶은 곳 가야할 곳의 목록이 늘고 있다.
필자의 아시아 이정표, 여전히 가고 싶은 곳 가야할 곳의 목록이 늘고 있다.ⓒ구글맵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동남아시아의 여전히 많은 친구들이 이번 바이러스가 춥고 건조한 곳에서 발생한 유사폐렴 같은 것이니 온도와 습도가 높은 동남아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믿으며 여유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비행기 길은 막혔어도 바이러스에 장벽은 없었다. 현재는 수도를 중심으로 동남아의 주요 국가들도 도시봉쇄를 선언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도 도시의 일용직 노동자들, 관광 산업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에게 낭떠러지가 먼저 나타났다. 날이 갈수록 그곳의 정부와 시민들의 대응도 달라지고 있고, 급기야 메콩 국가들의 설날인 송끄란이나 이슬람인들의 최대 축제인 금식월 직후의 르바란 기간 중 고향방문(무딕)도 금지되는 분위기이다.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국가들이 절대다수인 동남아시아에서 이번 코로나19의 여파는 더 오래 짙게 남을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이후 문을 닫는 세계, 역설적으로 그동안 얼마나 촘촘했는지 보여줘
이런 시기 지리학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코로나19로 세계의 문이 닫히고 세계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만큼 어려워질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현실화되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세계가 그동안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국지적 문제가 왜 곧 세계적 문제일 수밖에 없는지를 실감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 사태로 지나가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언제가 될지 예측하기 어렵고, 현재의 위기로 인한 상처들이 정상화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시기를 지리학자는 어떻게 보내야할까? 그래서 나는 내 방식으로 다시 미래를 준비해 보려고 한다. 연구자라는 직업의 미덕은 새롭고 유용한 정보와 지식에 대한 캐치업 못지않게 특정 주제에 대해 되새김질하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남아를 연구하는 지리학자로서 나는 내가 만났던 공간에 대해 되새김질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박사학위 논문 현장조사를 시작으로 15년 동안 아시아 곳곳을 두 다리로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모든 지리학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지독한 경험주의자이자 현장파 연구자다. 직접 가서 사람을 만나고 장소를 느껴본 후에야 그 장소에 대해 이제 좀 알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캐리커처

그 여정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들을 앞으로 격주로 이 곳 온라인 칼럼을 통해 소개하려 한다. 멋진 장소와 경관들도 떠오르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 제도나 관계들, 일어났던 사건사고들이나 덜 알려지거나 우리가 외면했던 이야기들, 동식물이나 그것들이 환경과 어우러진 경관에 이르기까지 소개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다. 글을 쓰며 코로나19 이후 다시 만들어가야 할 세계시민들과의 관계나 사회-자연의 규범과 가치들에 대한 생각들도 함께 정리해 볼 참이다.

작년의 특별한 정상회의를 통해 ‘동남아시아가 이제 뜨나보네’ 생각한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의 시작은 생각보다 길고 관계도 깊다. 내 안에 깊숙이 들어와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된 ‘나’‘들’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 기쁘고, 공간을 할애해 준 ‘민중의소리’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모쪼록 독자들도 이야기 속에서 재미와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격주 월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편집자주: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엄은희의 내가 만난 동남아’를 격주 연재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엄은희 서울대 사회과학원·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지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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