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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의 삶과 문학] ‘벚꽃 흩날리는’
-조해일 작가의 소설 <아메리카>
-조해일 작가의 소설 <아메리카>ⓒ기타

바이러스가 인간의 신체에 감염되어 급속하게 전염되기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고 있다. 개인의 자발적 격리와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요구되었고, 대부분의 사회적 활동과 참여가 중단되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어 사회 전체가 거의 마비된 국가들도 생겨났다. 그 사이 우리 사회에서는 대규모의 공범을 포함한 성착취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고, 그것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뒤흔들 정도였다. 강남 사거리 철탑 위의 노동자는 300일이 지나도록 방치되어 또다시 목숨을 건 단식을 시작하였고, 선거일정이 진행되며 더러 다시는 보이지 말아야 할 정치인의 이름이 거리에 내걸렸다. 그렇게 4월이 되었고, 아직도 바다에 잠긴 미해결의 슬픔이 일상을 잠식하지만, 그날의 버려진 배처럼 모든 것이 멈춰있다.

‘…… 그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죽어간, 얼핏 보기에 절망 이외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루 보이기 쉬웠던 시대들을 겪어 오면서, 물론 용기있게 죽음을 맞아들인 사람들을 나는 존경한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천하게, 비겁하게 살아 남았다구 해야 옳겠지.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도 있다구 생각한다. 뭐라구 할까. 고난의 몫이라구나 할까.’
- 조해일의 <아메리카>

1971년에 발표된 조해일 작가의 중편소설 <아메리카>는 소설 속 ㄷ읍의 미군부대 주변 사람들, 그 중 미군 클럽을 통해 생계를 잇고 일상을 살아가는 ‘양공주’ 사회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인물 ‘효식’은 군복무 중 가족을 사고로 모두 잃고, 제대 후 당숙이 운영하는 ㄷ읍의 미군 클럽에서 문지기 일을 하게 된다. 그는 클럽 여자들의 방을 드나들며 언젠가는 그곳을 떠날 기숙자나 구경꾼으로서의 나날을 보내는데, 그에게 기지촌의 여자들은 팔자에 순응하며 그 생활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한편, 윤리적 자의식도 없이 매춘으로 ㄷ읍의 실질적인 경제를 움직이는 존재로만 인식된다. 그러던 중 양공주 ‘기옥’이 발가벗겨져 흑인 병사에게 골목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지만 그것 또한 그들만의 일로 여기며 외면한다. 그날 밤, 기옥은 미군에게 살해당한다.

기지촌 여자들의 자치 조직인 ‘씀바귀 회’ 장으로 치러진 기옥의 장례식 행렬의 뒤를 따르며, 그녀 역시 기지촌의 여자로 검은 피부의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씀바귀 회 회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는 숱한 이유로 일어나는 자살과, 질병과, 또 기옥과 같은 사고로 여자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는 것과, 그리하여 마을의 벌거숭이 야산 하나가 통째로 그녀들이 묻힌 공동묘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양춘실의 무덤, 다음 세상엔 좋은 팔자 타고 나기를’
‘장미화의 묘, 24세 꽃다운 청춘을 두고’
‘한기옥의 새 집, 이 새 집으로 이사 오다’

야산의 무덤들을 둘러보며 지금 와 있는 그곳이 어디인지, 기옥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에 빠진 효식은 자신 역시 ‘잡놈’처럼 탐닉하고 소비해온 여자들의 존재에 그때서야 알지 못할 서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미군부대의 군표 개신으로 그간 미군을 상대하며 벌어 모은 군표들이 휴지조각이 되어도, 헌병의 ‘토벌’에 걸려 ‘성병 집단치료소’에 강제 수용되었다가 돌아와도, 갑작스러운 홍수로 마을과 집 전체가 물에 잠긴 끔찍한 재난 속에서도, 그녀들은 스스로 삶의 터를 복구하고 변함없이 그곳에서 살아가고 또 그곳에서 죽어간다.

‘나는 이곳 사람이며 이 곳에 오기 전에도 이곳 사람이었으며……’

양공주 기옥의 죽음 후 소설 속 인물 효식은 그가 있는 곳 ㄷ읍의 ‘바른 자리’와 ‘분명한 의미’를 찾으려 했으나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 내지는 소외 관계’라는 도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한국인이라는 모멸감과 수치심까지 느꼈지만, 작가 조해일은 기지촌 주변에서 살아가는 여성들과 그녀들의 삶을 강자와 약자, 성적 착취 관계의 도식만으로도, ‘윤리적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마땅할 세상 밖의 타자로도, 그리하여 기어이 사라져야 할 부끄러운 삶의 모습으로도 묘사하지 않는다. 여타 민중의 삶이 그렇듯이 그녀들 또한 맨몸으로 세상을 버텨나가는 애처롭지만 질긴 민초일 뿐이었다.

벚꽃이 바람에 지던 주말 오후, 23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작가의 묘지에 다녀왔다. 그 역시 민중의 언어로 그들의 삶을 쓰고 떠난 작가였다. 드넓은 공원묘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역병에 움츠러든 세상의 외진 곳에서 나이든 남자와 여자 인부들이 마스크도 쓰지 못하고 돌과 흙을 트럭에 실어 나르고 있었다. 홍수가 지나간 다음날, 햇살을 받으며 무너진 삶의 터를 일으키던 조해일의 소설 속 그녀들의 아침처럼,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지 않고는 알지 못할 장면이었다. 벚꽃은 아름답게 흩날리는 봄날의.

-조해일 (1941~ )
1970년 소설 <매일 죽는 사람>으로 등단. <지붕위의 남자> <겨울여자> <임꺽정> 등 현실의 부조리와 사회상을 반영한 다수의 작품이 있다.

이수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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