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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노동이야기] K-방역에서 빠뜨린 것들

코로나19가 한창인 와중, 대학 시간강사 K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처음 첫 주는 2시간 수업을 위해 8시간동안 온라인 강의를 만드느라 진이 빠졌고, 그 다음 주는 업로드에 실패해서 재촬영을 해야 했으며, 3주차에는 줌(ZOOM)을 이용해 실시간 화상강의를 시도하려다 실패했다. 4주차에는 촬영장소인 자신의 공부방에 놓인 책 목록이 신경 쓰여 가리개로 가렸다.

이후 학교당국은 코로나19가 장기화돼 온라인 강의를 한 학기 내내 진행한다고 발표했고, K는 펜슬이 부착된 아이패드를 구매했다. 강의안을 아이패드에 띄워 펜슬로 강의 중 메모와 중요표시를 하고, 이 화면을 데스크탑에 동기화해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다.

요즘 K의 큰 즐거움은 ‘마켓○○’의 새벽배송이다. 잠자기 전에 누워서 다음날 먹고 싶은 반조리 식품이나 재료들을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면, 아침에 선물처럼 문 앞에 배송되어 있다. 코로나19가 유행한 이후 집안에 먹을 것을 잔뜩 쌓아놓았지만 새벽배송을 시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내일 아침에 먹고 싶은 것은 오늘 밤에 결정되기 때문이야. 온라인 강의준비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은 날은 어쩔 수 없다구.”

16일 오전 서울 시내의 쿠팡 캠프에서 배송 기사들이 배송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2020.3.16.
16일 오전 서울 시내의 쿠팡 캠프에서 배송 기사들이 배송준비 작업을 하고 있다. 2020.3.16.ⓒ뉴스1

쿠팡이나 마켓컬리 같은 온라인 전용 쇼핑몰은 ‘아르바이트’로 불리는 파트타임, 풀타임, 조기출근, 마감근무 등 여러 형태의 초단기 노동자들을 수시로 고용한다. 특히 마켓컬리의 아르바이트는 ‘꿀알바’로 불리는데, 급여가 당일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은 해당 노동이 지속적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한다. 날품팔이, 일용직 등의 형태인 만큼 TO는 매일 정해진다. 고객들의 새벽까지의 주문량에 따라 TO가 정해지는데, 개별노동자에게 보내지는 출근 확정 문자는 늘 TO보다 많이 보내진다. 노동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는게 아니라 더 빨리 출근해 선착순으로 TO안에 들어야 한다.

코로나19 특수로 온라인 식료품 판매 업체들의 주문량이 늘었다. 코로나19 확산이후 배달 주문 증가세는 41.7%, 배달로 주문할 수 있는 가정 간편식 판매량은 490.8%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배달노동자들은 “일자리 끊기는 게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보다 두렵다”고 한다. 올 초 배달의민족은 배달노동자에게 주는 건당 수수료를 인하했지만, 코로나 특수가 왔다고 해서 다시 인상하지는 않았다. 일할 사람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K가 대학에서 수년째 강의해 온 내용은 ‘청년들의 불안정한 삶과 노동’이다. 그가 배달노동자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새벽 배송을 주문한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포스트 코로나 국제협력방안 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0.04.28.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2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포스트 코로나 국제협력방안 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0.04.28.ⓒ사진 = 기획재정부

전 세계로부터 'K-방역'(한국의 코로나19 방역모델)이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간 한국 사회는 ‘경제냐 안전이냐’ 이분법에서 늘 경제에 우선순위를 뒀다. 그런데 이번에는 안전을 우선했다. 하지만 ‘K-방역’이 빠뜨린 것은 없을까? 보편적 재난지원금 지급, 빅데이터에 기반한 위치추적으로 감염정보 실시간 공개만으로 ‘성공한 민주주의적 방역’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코로나19의 방역지침이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라면, 모두가 따를 수 있는 조건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적 방역의 성공을 논할 때 ‘평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가격리, 재택근무가 가능하려면 안정적인 ‘자가’와 재택근무에 적합한 생산수단을 구매할 돈이 있어야 한다. ‘아프면 쉴 권리’를 행사하려면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고용 관계에 속해있어야 한다. 전국민이 재난지원금을 받는다고 해서 평등한 것으로 오인하면 안 된다.

최근 미국 사회엔 코로나19에 취약한 인종이 탄생했다. 2020년 4월초 기준, 미국 시카고 지역 코로나19 사망자의 72%가 흑인이었다. 이들은 질낮은 음식과 반복적인 식량 위기, 고속도로나 산업지대 인근의 거주 환경, 더 위험한 일자리, 언어 장벽, 인종 혐오에 시달린다. 또 폐쇄를 버티지 못하는 미국 저소득층은 트럼프의 경제 활동 재개 선언에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미국은 경제냐 안전이냐의 이분법에서 여전히 경제를 선택한 셈이다.

한국은 미국과 다른 길을 가고 있지만, ‘코로나19에 취약한 사람들’이 적지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길거리보다도 못한 주거환경에 살거나 집이 없는 이들, 국가에 등록되지 않아 마스크를 살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 대면 서비스업에 집중되어 있는 여성노동자들. 이들이야말로 사회적 위험을 자신의 몸으로 흡수하며 버티고 있는 존재들이다.

20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원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타격을 입은  항공·공항 노동자 한시적 해고금지 및 비정규직 정리해고 중단을 촉구하는 현장 실천단 발족을 선언했다. 2020.04.20
20일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원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타격을 입은 항공·공항 노동자 한시적 해고금지 및 비정규직 정리해고 중단을 촉구하는 현장 실천단 발족을 선언했다. 2020.04.20ⓒ김철수 기자

위험이 특정한 이들에게 집중되는 사회는 위험이 그만큼 개인화 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시간강사 K처럼 자신의 안전을 위해 타인의 위험을 구매하고 안전을 위해 새로 투자를 하는 것은 K-방역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이다. 국가적 조치에서 빠진 영역은 오로지 개인이 책임질 몫으로 할당된다. 경제적 비용이든 도덕적 비난과 자책이든 말이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달라질 것이라며 세계적인 석학과 전문가들이 거대한 전환에 대한 거시적인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우리에게 부여된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안전의 연관 검색어가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분석은 희소하다.

코로나19 와중에 회자되는 영국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years & years)’는 위험과 불안정성이 팽창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그 안의 개인과 가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매우 사실감 있게 보여준다. 그 드라마에서 개인을 압도하는 위험과 불안정성에 무력해진 손주들에게 할머니 뮤리엘은 이렇게 말한다.

“20년 전 마트에서 계산하던 직원들을 해고할 때부터 세상은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너희들은 다들 뭐했니? 누구 하나 반대 시위에라도 참여한 적 없잖니? 다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잖아. 그게 시작이었던 거야”

전주희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 ·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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